9.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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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생애와 고난,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한 유일한 속죄의 수단을 마련하셨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이 속죄를 받아들이는 자들은 영생을 얻을수 있고,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주의 무한하신 사랑을 더 잘 이해할수 있게 되었다. 이 완전한 속죄는 하나님의 율법의 의로움과 하나님의 성품의 자비스러움을 옹호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죄를 정죄하고 우리를 위한 용서를 마련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대리적, 보상적, 화해적 및 변형적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악의 세력을 이긴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요, 속죄를 받아들인 이들이 결국 죄와 죽음을 정복할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분 앞에 하늘과 땅에 있는 자들이 다 그 무릎을 꿇게 될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권을 선언하는 것이다. -기본 신조, 9.

우주의 중심인 하늘에 이르는 한 문이 열려있다. 한 음성이, “들어와서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라”고 부른다. 성령에 감동하여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방을 주시한다.
눈부신 에메랄드 빛깔의 무지개가 중심 보좌를 두르고 있고, 번개와 뇌성과 음성이 거기로부터 흘러나온다. 귀인들이 횐옷을 입고 머리에는 금면류관을 쓰고 조금 작은 보좌에 앉아있다. 송영이 울려 퍼지자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며 그들의 면류관을 벗어서 보좌 앞에 던진다.
일곱 인으로 봉한 한 두루마리를 든 한 천사가 외친다.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계 5:2). 요한은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그 책을 능히 개봉할 자가 없는 것을 보고 실망하였다. 그가 실망해서 울고 있을 때, 장로중 하나가 그를 위로하였다. “울지 말라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계 5:5).
위엄의 보좌를 다시 바라본 요한은, “일찍 죽임을 당”했으나 지금은 살아 계셔 성령으로 능력을 받으신 어린양을 본다. 이 겸비한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취하자, 생물들과 장로들이 새 노래를 터트린다.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계 5:9, 10). 하늘과 땅의 모픈 피조물들이 함께 목소리를 합하여 노래한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3).
이 두루마리가 왜 그토록 중요할까? 이 두루마리는 사단의 노예 상태로부터 인류의 구출을 기록하고 있으며, 죄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선택하기만 하면 죄에 포로된 자들을 그들의 멸망의 감옥에서 석방시켜 줄 수 있는 너무도 완전한 구원을 드러내고 있다. 베들레헴에 탄생하시기 오래 전에 어린양은 이렇게 부르짖으셨다.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7, 8; 히 10:7 참조). 인류의 구속을 성취한 것은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강림이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
성경은 인류의 낙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신 하나님을 계시한다. 삼위 일체 하나님은 사람들을 그들의 창조주와 다시 연합시키시는 일에 연합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강조하셨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니라”(요일 4:8)고 선언한다. 그분은 “무궁한 사랑”(렘 31:3)으로 인류에게 접근하신다. 구원으로 사람들을 초청하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그러나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각인이 그 초청에 반응하는 데 있어서 선택의 자유를 갖도록 허용하셨다(계 3:20, 21). 강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품성에 배치되는 방법이며 하나님은 전혀 그러한 전략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선제 행위.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먼저 찾아 나서셨다. 범죄한 부부는 그들의 창조주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맞기 위해 이전처럼 기쁨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들은 몸을 숨겼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매우 집요하게 “네가 어디 있느냐? “고 부르셨다.
깊은 슬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순종의 결과들, 즉 그들이 겪어야 할 고통과 어려움들을 대략적으로 설명하셨다. 그들의 상황은 가히 절대적으로 절망적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와 사망에 대한 궁극적 승리를 약속하는 한 놀라운 계획을 공개하셨다(창 3:15).

은혜인가 공의인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의 배도 후에,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의 자비하시며 공의로우신 품성을 계시하셨다. 그분은 이렇게 반포하셨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 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6, 7).
하나님의 품성은 은혜와 총의의 독특한 혼합, 기꺼이 용서하심과 형벌받을 자를 면죄하시기를 꺼리심의 독특한 혼합을 보여준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는 이러한 품성의 특질들이 서로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용서인가 형벌인가? 이스라엘의 배도 기간 중에, 하나님께서는 자주 당신의 백성들이 그들의 죄를 인정하고 당신께로 돌이키도록 애타게 간청하셨다(렘 3:12-14).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초청을 일축하였다(렘 5:3). 용서를 비웃는 회개하지 않는 태도는 형벌을 불가피하게 만든다(시 7:12).
하나님은 자비하시지만 죄에 집착하는 자들을 용서하실 수 없으시다(렘 5:7). 용서에는 목적이 있다. 하나님은 죄인을 성도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신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 그분의 구원의 기별이 세계 방방곡곡에 명백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사 45:22).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최초의 범죄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을 증오하는 기질을 심어놓았다(골 1:21). 따라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는 “소멸하는 불”이 되시는 하나님의 불쾌하심을 받아 마땅한 존재이다(히 12:29; 합 1:13 참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롬 3:23)다는 것과 모든 사람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엡 2:3, 5:6 참조)며,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엄숙한 진리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를 죄와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라고 부른다(롬 1:18). 계시된 하나님의 뜻인 당신의 율법에 대한 계획적인 배척은 그분의 의분 혹은 진노를 촉발시킨다(왕하 17:16-18; 대하 36:16). 래드(G. E. Ladd)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인간은 윤리적으로 죄악적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범과들을 계수하실 때, 그분께서는 그들을 죄인으로, 원수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 보실 수밖에 없으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죄에 대한 진노로 표출되는 것이 윤리적, 종교적으로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반역적인 세상을 구원하시기를 갈망하신다. 그분은 죄는 모두 미워하시나 각 개인에 대하여 사랑의 관심을가지고 계신다.

인간의 반응.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취급은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분은 하나님의 은혜가 “지극히 풍성함”(엡 2:7)을 가장 명백하게 보여주셨다.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사도 바울은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30, 31)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누가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멸시할 수 있을까? 바울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롬 2:4)신다고 지적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제의에 대한 인간의 반응조차도 인간에게서 시작되지 않았고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일 따름이다(롬 12:3). 우리의 회개가 하나님의 선물인 것과 마찬가지이다(행 5:31).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에서 우러나온다(요일 4:19). 우리는 사단, 죄. 고통,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사 64:6).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4, 5, 8, 9).

그리스도의 화해의 봉사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고후 5:19)셨다는 것이다. 그분의 화목은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이 성경절은, 이 과정은 하나님을 죄인에게 화목시키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하나님께 화목시킨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죄인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화목의 계획은 놀라운 신적 겸비이다. 그는 인간을 멸망하도록 버려둘 온갖 권리를 가지고 계셨다.
전술한 바와같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데 있어서 선제 행동을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바울은 “우리가 원수되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롬 5:10)었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11).
화목의 과정은 “속죄”(atonement)라는 용어와 관련이 있다. “영어 단어 atonement(속죄)는 원래 ‘at-one-ment'(하나로 됨) 즉 ‘하나로 된’ 상태 혹은 ‘의견이 일치된’ 상태를 뜻했다. 그러므로 ‘atonement’는 관계의 조화를 의미했다. 그리고 관계가 소원해졌었던 곳에 이러한 조화가 회복되었다면 그것을 화목의 과정의 결과일 것이다. 그 단어의 윈래의 의미에 비추어 이해할 때, 그것은 소원한 상태를 종결시킨 화목의 상태를 훌륭하게 나타내 준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속죄라는 용어를 그리스도의 성육신, 고난, 그리고 죽음에만 한정시킨다. 그러나 성소 봉사에서 속죄는 희생 제물인 양을 죽이는 일뿐 아니라 제사장이 성소 안에서 그 흘린 피를 가지고 제사 집전하는 것도 포함하였다(레 4:20, 26, 35, 16:15-18, 32, 33 참조). 이러한 성서적 용법에 비추어 볼 때, 속죄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하늘 성소에서의 그분의 중보 봉사 모두를 지칭할 수 있다. 그곳에서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하여 당신의 완전한, 완성된 속죄 희생의 공로를 적용하고 계신다.*
빈센트 테일러(Vincent Taylor)도 속죄의 교리는 “(1)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행위, (2)믿음으로 그분께서 성취하신 일들을 개인적 및 공동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 등 두 가지 국면이 있으며, 이 둘이 합하여 속죄를 이룬다”고 진술하였다. 이러한 통찰에 기초하여 그는, “속죄는 우리를 위해 성취되고 또한 우리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결론지었다.
본 장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련지어 속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분의 대제사장의 봉사와 관련된 속죄는 뒤에서 다를 것이다(본서의 23장 참조).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
갈바리에서의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은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었다. 백성들의 죄의 기록이 남아 있었지만, 화목의 결과로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셨다(고후 5:19). 이것은 하나님께서 형벌을 철회하신다거나 죄가 더 이상 그분의 진노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율법의 공로를 여전히 유지하시면서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용서를 허용하시는 길을 발견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공의와 의를 유지하시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이 “도덕적 그리고 법적으로 불가피”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가 심판으로 옮겨질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와 죄인에 대하여 심판을 선고하셔야 한다. 이 선고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죄인인 우리의 자리를 취하셨다. 이 속죄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 아래 섰기 때문에 필요했다. 여기에 죄에 대한 용서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오묘와 핵심이 깔려 있다. 즉,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하나님의 공의를 합당하게 만족시켰고, 또 하나님은 인간이 죽는 것 대신에 그리스도의 자아 희생을 기꺼이 받아주신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사람들은 죄의 용서를 전혀 받지 못하며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다. 요한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고 말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비와 그분의 공의를 모두 드러낸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하려 하심이니라”(롬 3:25, 26).

속죄의 희생이 성취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의 아들을 “속죄의 희생 제물”[롬 3:25, NIV; 헬라어로 힐라스테리온(hilasterion)], “화목 제물”(KJV, NKJV), “속량 제물”(an expiation, RSV)로 드리신 분은 성부이시다. 신약에서 사용된 힐라스테리온의 용례는 “분노한 신을 달래”거나 “복수적이고 독단적이고 변덕스러운 신을 진정시키”는 이교적인 개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 구절은 “하나님은 당신의 자비로운 뜻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인간의 죄에 대한 그의 거룩한 진노에 대한 화목 제물로 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당신의 심판을 받도록 그리스도를 인간의 대표자와 하나님의 대속물로 받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자신을) 하나님께 드”(엡 5:2; 창 8:21; 출 29:18; 레 1:9 참조)린 것으로 묘사한 바울의 기술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은, 이 희생 제물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충분히 담당하셨다는 점에서 하나님과 죄된 인간 사이의 장벽을 헐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사랑으로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며, 이 진노가 인간에게서 떠나고 그분이 친히 담당하시게 되었다.”*
로마서 3장 25절은 또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죄는 그 값이 치르어졌다(혹은 제거되었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속량(expiation)은 속죄의 피가 회개하는 죄인에게 이루어 주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용서, 개인적 죄책의 제거, 그리고 죄로부터의 정결을 경험한다.*

죄를 대신 지시는 분 그리스도. 성경은 그리스도를 인류의 “죄를 지시는 분”으로 제시한다. 이사야는 심오한 예언적 언어로 이렇게 진술하였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 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사 53:5, 6, 10, 12; 갈 1:14 참조). 바울이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고전 15:3)셨다고 말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바로 이 예언이었다. 이 구절들은 구속의 계획에 있어서 한 중요한 개념을 지적한다. 즉, 우리를 더럽힌 죄와 죄책이 우리의 죄를 지시는 분에게 전가될 수 있으며, 그렇게 하여 우리를 정결케 할 수 있다는 것이다(시 51:10)… 구약 성소의 희생 제사 의식들은 그리스도의 이러한 역할을 계시했다. 그곳에서 회개하는 죄인으로부터 무고한 어린양에게로 죄가 옮겨지는 것은 죄를 지시는 분 그리스도에게로 죄가 옮겨지는 것을 상징했다(본서 4장을 보라).

피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피는 성소 봉사의 속죄 희생 제사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하나님께서 “육체의 생령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레 17:11)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속죄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으신 것이었다. 짐승을 죽인 후에, 용서가 주어지기 전 제사장은 그 피를 사용해야 하였다.
신약은, 대치물의 피를 통하여 용서, 정결, 화목을 얻는 구약의 의식들이 그리스도의 갈바리 희생의 속죄의 피로 성취되었음을 드러낸다. 구약과는 대조적으로 신약은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4)라고 말한다. 그분의 피 흘림으로 죄를 위한 속죄가 이루어졌다(롬 3:25). 요한은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 때문에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힐라스모스, hilasmos]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했다[요일 4:10; 속량(expiation), RSV; 속죄의 희생 제물, NIV].
요약하면, “화목에 대한 하나님의 객관적인 행위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적, 속죄적 보혈(자아 희생)을 통해 성취되었다. 그같이 하나님은 ‘화목의 제공자인 동시에 수령자이시다’.”*

속량물이신 그리스도
인간이 죄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정죄와 저주 아래 있게 되었다(롬 6:4; 갈 3:10-13), 죄의 노예로써(롬 6:17),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서 그들은 피할 길이 없었다.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시 49:7)한다. 속량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다.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호 13:14).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속량하셨는가?
자신이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마 20:28; 딤전 2:6 참조)기 위하여 오셨다고 증거 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 피로” 교회를 “사”셨다(행 20:28).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엡 1:7; 롬 3:24 참조). 그가 죽으신 것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딛 2:14)시려는 것이었다.

속전으로 무엇이 성취되었는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확증하였다. 바울은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고전 6:19, 20; 고전 7:23 참조)다고 말했다.
당신의 죽으심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죄의 권세를 깨뜨리셨고, 영적인 포로 생활에 종지부를 찍으셨고,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제거하셨고, 모든 회개하는 죄인들이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하셨다. 베드로는 신자들이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벧전 1:18)로부터 구속함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바울은 죄의 종살이에서, 그리고 그 죽음의 열매로부터 구출된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으며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고 기록하였다.
속량의 원칙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것은 “은혜의 복음의 진수를 잃어버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어린양께 대한 우리의 감사의 가장 깊은 동기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 원칙은 하늘 궁전에서 불리운 송영의 중심 내용을 이룬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계 5:9, 10).

인류의 대표자 그리스도
아담과 “마지막 아담” 혹은 “둘째 사람”(고전 15:45, 47)이신 그리스도는 둘 다 모든 인류를 대표한다. 육적인 출생은 각인에게 아담의 범죄의 결과들을 짊어지우지만, 영적인 출생을 경험하는 각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생애와 희생의 혜택을 받는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아담의 반역은 모든 사람에게 죄와 정죄와 죽음을 가져다 주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크신 사랑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친히 담당하시사 인류의 대표자가 되셨다. 그의 대속적 죽음은 죄의 형벌로부터의 해방과 회개하는 죄인을 위한 영생의 은사를 마련하였다(고후 5:21; 롬 6:23; 벧전 3:18).
성경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보편적 본질을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은 각 사람을 대신하여 죽음을 맛보셨다(히 2:9). 아담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롬 5:12) 모든 사람이 죽음 즉 첫째 사망을 맛본다.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을 위하여 맛보신 죽음은 둘째 사망 곧 죽음의 본격적인 저주였다(계 20:6, 본서 26장 참조).

그리스도의 생애와 구원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죄로 말미암아 생긴 틈을 메우는 데는 그리스도의 죽음뿐 아니라 그의 생애도 필요하였다. 둘 다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이며 우리의 구원에 기여한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생애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예수님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시면서 순결하고 거룩하고 사랑스러운 생애를 사셨다. 그분은 이 고귀한 생애를 회개한 죄인들에게 선물로 나누어주신다. 그분의 완전한 품성은 인간이 스스로 이루고자 시도함으로 입은 “더러운 옷”(사 64:6)을 가리기 위해 그분께서 주시는 결혼 예복(마 22:11) 혹은 의의 두루마기(사 61:10)로 묘사되었다.
우리 인간들의 타락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께 자신을 굴복시킬 때, 우리의 마음은 그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의지는 그분의 의지에 합병되고, 우리의 정신은 그분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의 생각은 그분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산다. 우리는 그분의 의의 옷으로 가리움을 입는다. 하나님께서 참회하는 죄인을 보실 때 그분은 벌거벗음이나 죄의 흉함을 보지 않으시고,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에 의하여 형성된 의의 두루마기를 보신다.* 이 두루마기로 가리움을 받지 않는 한 아무도 참으로 의로울 수 없다.
결혼 예복의 비유에서, 자신의 옷을 입은 채로 도착한 그 하객이 쫓겨난 것은 불신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잔치에 오라는 초청을 수락했다(마 22:10). 그러나 그가 온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는 결혼 예복이 필요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를 믿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왕 앞에 나설 수 있게 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생애, 그분의 의로운 품성이 또한 필요하다.
죄인들로서 우리는 빚을 탕감받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은행 계정이 다시 회복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 이상이 필요된다. 우리는 왕의 가족으로 입양될 필요가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중보봉사는 용서와 옷입힘이라는 이중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즉, 그의 죽으심과 생애를 우리의 생애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신분에 적용하는 것이다. 갈바리에서 외치신 “다 이루었다”라는 선언은 완전한 생애와 완전한 희생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죄인에겐 이 두가지가 다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생애의 영감. 이 땅에서 사신 그리스도의 생애는 또한 인류에게 삶의 방법에 관한 모델을 주었다. 예컨대, 베드로는 예수께서 개인적 학대를 받으실 때 반응하셨던 방법을 우리에게 모본으로 추천하고 있다(벧전 2:21-23). 우리 인간과 같이 되셨던 그분, 그리고 우리와 한결같이 모든 일에 시험을 받으셨던 그분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죄 중에 계속 빠져 있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우리도 승리의 생애를 살 수 있다는 보증을 준다.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증거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구원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고전 15:14, 17)이라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부활하셨고(눅 24:36-43), 신-인(神人)으로서 하늘로 승천하셨고,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에서 중보자로서 중요한 대언자의 일을 시작하셨다(히 8:1, 2; 본서 4장 참조).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에 달리셨던 금요일에 희망이 산산이 깨어진 제자들이 볼 수 없었던 의미를 십자가에 부여하였다. 그의 부활은 이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역사를 바꾸어 놓은 강력한 세력으로 만들었다. 부활은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결코 분리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사명의 중심이 되었다. 그들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리스도, 악의 세력을 꺾으시고 승리하신 분을 선포하였다. 사도들이 전한 기별의 능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절대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진위를 판가름 짓는, 기독교 신앙의 시금석이 되는 문제이다. 그것은 역사상 최대의 기적이던가 아니면 미증유의 기만이던가 둘 중의 하나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월버 스미스(Wilbur M. Smith)는 이렇게 논평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성채이다. 첫 세기에 세계를 뒤집어 놓고 기독교를 유대교와 지중해 세계의 이교 종교들 위에 현저하게 뛰어나게 만든 교리가 바로 이것이다. 이 교리가 무너지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지극히 중요하고 독특한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다(고전 15:17).*
그리스도께서 현재 수행하고 계시는 봉사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갈바리에서의 속죄의 죽음이 충분하고 또 완전하였더라도,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당신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셨다는 보증을 전혀 갖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무덤 저편에 있는 생명의 실재를 확증해 주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진실성을 입증해 준다.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봉사의 결과들
그리스도의 구속의 봉사는 인류뿐 아니라 전 우주에 영향을 끼친다.

우주 전체의 화목. 바울은 교회 안에서와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의 구원의 중대성을 이렇게 드러내고 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엡 3:10). 그는 또 하나님께서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골 1:20)셨다고 역설하고 있다. 바울은 이러한 화목의 놀라운 결과를 이렇게 나타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 11).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옹호.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의 희생은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품성뿐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율법의 공의와 선함 혹은 의를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속량은 율법의 요구(죄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를 만족시켰으며, 당신의 은혜와 자비를 통하여 회개하는 죄인을 의롭다 하였다. 바울은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 4)고 말하였다.

칭의. 화목은 용서를 받아들였을 때에만 이루어진다. 탕자가 그의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를 받아들였을 때 아버지와 화목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 자신을 세상과 화목케 하신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에 복종하는 자들은, 하나님과의 화목이라는 즉석의 열매를 맺는 무한히 소중한 칭의의 선물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될 것이다(롬 5:1). 의롭게 된 신자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이 된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감으로써 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존재했던 적대감으로 상징된 인간 사이의 모든 장벽 또는 증오심의 모든 분리의 벽을 깨뜨리기 위한 성령의 능력을 받는다(엡 2:14-16 참조).”*

행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무익성. 하나님의 화목의 봉사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 늘 인간의 노력이 헛됨을 드러내 준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통찰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의롭게 해주는 의를 받아들이도록 이끈다.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의 감사심은 순종을 기쁨으로 만든다. 그렇게 볼 때 행위는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그 열매가 된다.*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의 생애, 그분의 의, 그리고 그분의 죽음을 값없이 선물로 제공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로 이끈다. 감사, 찬양, 그리고 기쁨이 우러나고, 순종은 즐거움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기쁨이 되고, 마음은 성령께서 거하실 수 있도록 언제나 열려 있는 거처가 된다. 하나님과 회개하는 죄인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수립된다. 그것은 두려움과 의무의 관계라기보다는 사랑과 경탄에 기초된 교제이다(요 15:1-10 참조).
십자가에 비추어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면 할수록 자신의 의로움을 더욱 적게 느낄 것이며, 우리가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지 더욱 느끼게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관여하셨던 동일한 성령의 능력이 우리의 생애를 변화시킬 것이다. 실패하는 대신, 우리는 매일 죄에 대한 승리를 경험할 것이다.

사명을 위한 동기 부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화목의 봉사에 나타난 놀라운 사랑은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나누어주도록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해 준다. 그것을 스스로 체험했을 때, 우리는 죄를 위해 드리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죄를 돌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감추어 둘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0, 21)는 감동적인 복음의 초청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