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孝)의 완성은 실천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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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인간은 말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나날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오늘 가족의 얼굴을 따뜻한 표정으로 대하면서 그 안에 행복이 가득하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는 공자가 말하는 효의 본질에 성큼 다가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어른이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 요즘처럼 어른이 풍자와 비판, 나아가 혐오의 감정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 역사적으로 볼 때 늘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와 갈등을 빚어 왔고, 그러한 갈등과 논쟁을 겪으면서 그들만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갔다. 기성세대의 눈으로 보면 젊은 세대는 공부를 하지도 않고, 무언가 엉성하면서도 부족해 보이고, 심지어 버릇도 없어 보인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자 예절도 그에 맞추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최근 교수와 학생들이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반말을 사용하는 수업이 있다고 해서 언론에 보도가 되기도 했다. 우리말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 위계질서에 새로운 질서를 도입해 보자는 취지에서 그런 방식을 시도해 보는 것이리라. 사실 30~40년 전과 비교해 보아도 요즘 가정과 사회에서 보이는 예절과는 상당히 차이가 난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하는 태도에서도 그런 기조는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자녀들이 부모님을 대신해서 여러 가지 일을 대신한다든지 식사 시간에 부모님이 수저를 먼저 든 이후에 자신도 수저를 든다든지 하는 생활 예절만 잘 지켜도 칭찬받는 시대가 되지 않았던가. 당연한 것이 칭찬의 대상으로 변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공자 시대에도 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공자가 제자 자하(子夏)에게 효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자하가 효에 대해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부모님께 일이 있으면 아이들이 그 수고로움을 대신해 드리고 술과 밥이 있으면 먼저 드시게 하는 것을 일찍이 효라고 할 수 있겠느냐?”(子夏問孝. 子曰, “色難. 有事, 弟子服其勞, 有酒食, 先生饌, 曾是以爲孝乎?” : 『논어』 <위정(爲政)> 편)

예나 지금이나 부모님께 무슨 일이 있으면 자녀들이 나서서 대신 처리하는 일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싶을 만큼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것을 발견하면 얼른 가서 물건을 대신 들어서 옮겨 드린다. 식사 자리에 식구들이 둘러앉았을 때 부모님이 수저를 들면 자녀들이 그제야 수저를 들어 식사를 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행동을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사람이 줄어 간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부모님이 무슨 일을 하건 말건 무심히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아이들이 매우 많다고 한다. 식사 자리에 모든 식구가 와서 앉아 있는 것과 관계없이, 일단 수저를 들어 맛있는 음식을 먼저 먹기 시작하는 아이들이 많아진 것도 현실이다. 어떤 집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어떤 집에서는 이렇게 행동하는 아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그렇지만 공자는 이런 수준의 행동을 가지고 효라고 할 수 있겠느냐며 반문을 한다. 부모님 대신 힘든 일을 하고 어른이 식사를 시작한 뒤에 자신도 함께 먹는 것 정도를 효(孝)라고 할 수는 없다는 말에서, 공자 당시의 분위기가 지금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공자는 효도에서 중요한 것이 얼굴빛을 온화하게 가지는 일이라고 했다. 특별히 어렵지 않아 보이는데 일상 속에서 실천할라치면 정말 어렵다. 『논어』를 읽으면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윤리적 덕목을 설명하는 걸 보노라면 너무 당연하고 쉬운 일을 거론하기 때문에 깜짝 놀랄 때가 많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상황 속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말과 행동이지만 막상 내가 그렇게 살아가는지를 되돌아보면 그와는 전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간다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란다. 얼굴빛을 온화하게 가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부모님은 물론이거니와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가족들에게 늘 온화한 얼굴빛으로 대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일부 젊은 친구들은 이따금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불편함을 보여 주는 것도 좋다는 의견을 가지기도 한다. 물론 상식적이지 않은 일에 늘 온화한 얼굴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밖에서 마음이 상했다고 해서 귀가한 뒤에도 얼굴을 찌푸린다면, 혹은 가족 중의 누군가에게 마음이 상했다고 그때마다 얼굴에 감정을 한껏 드러낸다면 과연 좋은 가족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겠는가.
   공자가 이런 조건을 내걸었던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부모님께 효성스럽게 대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정말 그런지를 알 수가 없다. 나도 내 마음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의 마음은 더더욱 알 도리가 없다. 그럴 때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얼굴을 살피는 것이었다. 얼굴의 표정은 그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는 일종의 바로미터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에 효성이 가득하다면 부모님을 대하는 얼굴이 온화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지극정성으로 부모님께 효도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얼굴을 자주 찌푸린다면 그것은 진정한 효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말 마음에 효가 들어 있다면 자연스럽게 온화한 얼굴빛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주장을 듣고 그것의 진위(眞僞)를 판단한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예컨대 누군가가 자신을 효자라고 주장한다면 그가 효자라는 사실을 무엇으로 판단할 것인가? 당연히 그의 말과 행동, 특히 행동을 보고 판단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얼굴빛과 행동이 판단의 기준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주하는 식구들의 얼굴이 환하다면 내 마음도 따라서 환해진다. 아무리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 하더라도 서로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논리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상대방의 얼굴빛과 행동을 통해서 그 사람의 진정성을 느낄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 느낌은 늘 온전치 않기 때문에 결국은 서로의 마음을 판단하고 알아차리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가 평소에 하는 말을 정확하게 실천하는가 하는 점이다. 말은 번지르르한데 정작 함께 생활하다 보면 행동이 따라 주지 않아서 적이 실망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공자가 『논어』 곳곳에서 말 잘하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발언한 것은 이러한 맥락 때문이다.
   옛 성현들의 글을 읽다 보면 그분들은 우리에게 어려운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필부(匹夫)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것을 요구한다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인류의 가르침으로 인정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효(孝)뿐 아니라 인간 사회의 윤리적 덕목이라면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름다운 인간은 말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나날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오늘 가족의 얼굴을 따뜻한 표정으로 대하면서 그 안에 행복이 가득하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는 공자가 말하는 효의 본질에 성큼 다가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풍기
강원대학교 교수

가정과 건강 12월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