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포스트 코로나’ 교회의 사회적 역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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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헌 교수는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재림교회의 교회론적 뉴 노멀이 무엇이 될 것이며, 그 역할과 책임은 무엇인지 재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코로나 이후 시대, 교회의 역할과 책임은 세계 속에 계신 하나님의 역할과 책임 바로 그것

이국헌 교수(삼육대 신학과)

코로나 19의 세계적 대유행(팬데믹)이 미증유의 사태를 낳고 있다. 현대 인류 문명이 이끄는 지구라는 열차가 갑자기 정지된 느낌이다. 그동안 문화의 일상성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던 인류는 자연의 위협 앞에 평범하게 맞서지 못하는 약점을 드러냈다.

4차 산업혁명을 앞둔 첨단기술사회에서 호모 데우스가 되기를 꿈꾸는 인간이 치사율도 높지 않은 바이러스 앞에서 대책 없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만 하는 상황을 누가 예견했을까?

일부 바이러스 전문가나 환경 위기론자 외에 이런 사태가 올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공상과학영화 등에서는 가끔 바이러스의 역습으로 인한 디스토피아적 사회를 상상하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혹시 일어난다 해도 인간은 충분히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두 달이 넘는 동안에 전 인류는 3차 세계대전이 아닌 바이러스의 감염 때문에 경제활동을 멈추고, 학교 문을 닫고, 온라인 예배를 들여야만 하는 사상 초유의 상황을 겪고 있다. 현재는 이런 상황이 일시적이라고 여기며 견디고 있지만, 이런 상황이 지속되거나 반복된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 인류는 바이러스의 공포만큼이나 공포의 바이러스를 염려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모두들 코로나 이전 방식의 삶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것에 동의하면서 불안해하고 있다. 그렇다고 염려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전 인류가 한 세기 만에 겪는 코로나 19 팬데믹과의 싸움에서 수세에 몰렸던 인류는 극도의 공포와 절망에서 서서히 벗어나면서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대한 담론을 제기하고 있다.

그 담론의 핵심 키워드는 빌 게이츠, 유발 하라리 등이 제시한 “뉴 노멀”(New normal)이다. 뉴 노멀이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새롭게 부각되는 표준을 말한다. 원래 이 용어는 급변하는 경제적 현실을 반영해서 등장한 경제 용어였지만, 이제는 사회적 용어가 되어 새로운 사회적 기준을 의미하는 키워드로 부각됐다.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때,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뉴 노멀이란 기존의 산업화와 정보화 시대가 만들어 놓은 일체의 사회 문화적 표준을 대신하는 새로운 표준을 따라야 한다는 사회적 명령어가 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을 지배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과 공존하는 생태주의적 의식을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 문화는 단지 개인의 취향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공동체의 안전을 유지하는 수준에서 향유되어야 한다. 교육은 교실과 교사 위주의 일방적 방식에서 시간과 장소에 구애되지 않는 쌍방향 형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세계는 자국의 이익만을 앞세운 국수주의적 사고를 포기하고, 지구촌의 공존과 번영을 위해 연대해야 한다.

다국적 기업은 이윤의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적 기준을 버리고, 인류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적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 그리고 개인은 소유 양식에 의거한 욕망적 주체로서의 삶을 돌이켜 공공선의 실현을 통한 진정한 자유의 주체로 다시 거듭나야 한다. 이 시대의 뉴 노멀이 제시하는 명령은 매우 긴급한 것이다.

그리고 이 긴급한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는 인류 문화의 전 영역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지난 수개월 동안 우리 모두가 겪었던 일상의 혁명적인 변화처럼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는 옛 표준(old normal)을 혁명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대비할 수 없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혁명적 변화를 준비해야 할까? 이 부분을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1. 교회의 역사변증법적 노멀과 뉴 노멀
교회의 역사 속에서 뉴 노멀에 기초한 혁명적 변화는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니다. 교회사의 흐름 속에서 기독교는 이미 여러 차례 혁명적인 변화를 경험해왔다. 현존하는 최고의 복음주의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교회 역사를 세 단계로 설명한다.

그것은 ▲형성(formation) ▲개혁(reformation) ▲변형(transformation)이다.

1세기에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서 예수 공동체가 구성되었고, 이 공동체는 수 세기에 걸쳐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종교로 형성(formation)되어 유럽의 고대와 중세 역사를 지배했다. 그러나 일천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교회의 본질이 왜곡되어 혁명적 변화가 필요했다. 특별히 중세를 벗어나 전근대시대를 연 인문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개혁에 대한 의식이 확장됐다. 이 과정에서 미증유의 종교개혁이 발생했고, 그 개혁(reformation)으로 인해 유럽사회는 이전의 교회 표준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16세기 이후 유럽의 교회는 포스트-개혁 시대의 뉴 노멀을 받아들여 그리스도교의 근대적 모습을 만들어냈다. 포스트-개혁 이후의 뉴 노멀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인간의 인식 체계가 바뀌었고, 그로 인해 사상의 혁명이 일어났다. 인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근대주의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을 기반으로 한 과학적 사고방식을 앞세워 사회적 유토피아를 추구했다.

이러한 뉴 노멀에 대응해 교회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한다는 문화-프로테스탄티즘(자유주의 신학을 이렇게 표현함)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근대주의는 도전을 받았고, 포스트-종교개혁 시대를 이끌었던 개혁주의 신앙의 표준 역시 옛 표준이 되어버렸다.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형성(formation)되었고, 16세기에 개혁(reformation)되었던 교회는 20세기에 변형(transformation)되었다. 교회 역사에서 16세기 이후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용어는 개혁주의(the Reformed Faith)이다. 이 개혁주의 신앙은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 사상에 기초한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은 오직 성경에 기초한 칭의론과 예정론을 강조하면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표준(normal)을 만들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칭의와 화해에 기초한 개인의 구원 및 선교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철저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 개혁주의 신앙은 도전을 받았다. 무엇보다 이 시대에 구조적인 사회악의 개념이 부각되면서 개인의 구원에 머물던 교회의 표준은 옛 표준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교회는 복음주의(Evangelicalism)라는 개념을 앞세워 변화를 추구했다.

이런 시대적 요청에 따라서 변형된 20세기 교회는 개인의 구원을 넘어 사회 구원을 위한 사회참여, 공공신학, 탈세속신학, 생태신학 등을 강조했다. 이런 개념들은 포스트-변형 사회에서 교회의 뉴 노멀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직면해 또 다시 교회의 뉴 노멀을 모색해야만 하는 역사적 전환기에 이르렀다.

2.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교회론적 뉴 노멀(?)
그렇다면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교회의 변화를 추동할 뉴 노멀은 무엇일까? 아직 구체적으로 모색되지 않은 담론이기 때문에 섣불리 제시하기는 매우 어렵다. 지금 많은 석학들이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뉴 노멀을 모색하면서 겪는 어려움과 같은 어려움이 종교사회학적 담론에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따라서 종교적 뉴 노멀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단지 그것에 내포된 쟁점을 전망할 수 있을 뿐이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뉴 노멀은 교회론에 집중될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의 뉴 노멀은 구원론에 집중했고, 20세기의 뉴 노멀은 “그리스도와 문화”에 집중했다. 이처럼 뉴 노멀의 영역은 시대적 담론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그렇다면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뉴 노멀 역시 시대적 담론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현재 교회에 던져진 가장 큰 담론은 교회론, 즉 교회의 정의와 기능과 역할(사명)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교회론적 담론에 기초해서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뉴 노멀을 전망해 보자.
  
우선 교회의 정의에 있어서 뉴 노멀은 무엇이 될 것인가? 기존의 노멀에서 교회는 이론과 현상이 이분법적으로 나눠져 있다.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불러낸 무리, 즉 회중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노멀에서 교회는 단지 회중, 즉 하나님의 공동체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정의를 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교회의 개념에는 교리, 예전(예배), 제도(조직), 직분, 성전(거룩한 장소), 회중 등이 모두 포함된다. 사실상 “Church”라는 단어에는 이런 개념들이 포함된다. 교회론에 이런 개념들이 포함된 것은 초기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톨릭교회가 발전시킨 개념들이다. 중세교회는 교회(ekklesia)를 이데아적 하나님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이런 개념을 포함한 교회(church)로 승화시켰다.

영국의 종교개혁자 중에서 독립파주의자들은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신약에 묘사된 교회(ekklesia)를 교회(church)가 아닌 회중(congregation)으로 번역해, 교회라는 용어의 본질에 더 충실한 개혁을 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가 제도화된 상황에서 회중주의적 교회는 개혁주의 신앙에서도 뿌리를 내리기 쉽지 않았다.

19세기 미국사회에서 회중주의를 추구했던 교회들이 초기에는 매우 큰 규모를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를 지나면서 현저하게 축소된 역사적 사실에서 회중주의적 교회론은 한계가 드러났다. 현재 대부분의 교인들이 교회를 회중으로 이해하면서도 제도적 개념의 church로 받아들이는 이분법적 이해는 이런 역사적 상황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19로 인한 세계적 팬데믹과 더불어 교회론적 담론에서 회중주의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회중주의 내지는 그 유사 담론이 교회론의 뉴 노멀이 된다면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큰 도전이 될 것이며, 우리는 그 도전에 응전하기 위해 매우 치밀한 담론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기능에 있어서도 뉴 노멀을 전망할 수 있다. 기존의 교의적 표준에서 교회는 대표적으로 4가지 기능을 가진다. 그것은 예배와 전도와 교육과 교제이다.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기 위해 함께 모여 경배하는 예배 공동체이다. 아울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는 전도공동체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지키는 제자를 양육하는 교육공동체이며, 구원받은 은총과 축복을 성도들과 함께 나누는 교제공동체이다. 이 네 가지 개념이 교회의 기능을 정리하는 교리적 노멀이었다.

사실 이 기능들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초기교회의 가르침과 전통에서 가져온 종교개혁 시대의 뉴 노멀이었다. 중세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표식과 제도로서의 교회 기능을 강조했기 때문에, 성례전적 기능이 중심이었고, 전도, 교육, 교제의 기능은 작동되지 않았다. 이런 중세의 노멀을 개혁한 뉴 노멀로서의 교회 기능이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의 기능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수개월 동안 교회의 기능이 새로운 표준으로 구현되는 과정에서 그 기능 및 구현 방식에 대한 뉴 노멀이 전망되고 있다. 그것은 교회가 “사회의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기능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과 연관된 것이다. 즉 교회의 사회적 기능이 교회론적 뉴 노멀로 부각되고 있다는 말이다.

교회의 사회적 구원이란 단지 전도, 교제 등과 같은 교회중심적 기능을 넘어서는 것이다. 교회는 사회를 구원해야 한다. 코로나로 고통 받고 있는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 교회는 어떤 기능을 수행해야 할까? 코로나 사태로부터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 예배, 전도, 제자도, 교제 등의 표준에 대한 재정립이 요청되고 있다.

사회를 구원하는 예배는 무엇인가?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 전해야 할 도(진리)는 무엇인가? 사회를 구원할 그리스도의 제자는 어떤 사람인가? 사회를 구원하기 위한 화해와 친교는 어떤 것인가? 현재 우리가 참여했던 방식으로 교회의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요청되고 있는 교회의 새로운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서 교회는 어떻게 변화해야 할 것인지 진지한 담론이 이뤄져야 한다.
  
교회의 역할과 책임에 있어서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뉴 노멀은 무엇일까?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의 백성 혹은 교회는 뚜렷한 역할과 책임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뜻과 구원을 모든 백성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타적 신앙원리로 인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그 위대한 사역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메시아가 왔지만, 그들은 왜곡된 신앙 이해로 그 메시아마저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교회가 재구성되었고, 똑같은 역할과 책임이 부여되었다. 신약의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속성과 그의 구원을 드러내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중세교회와 근대교회는 물론이고, 현재의 교회들도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매우 분명한 교회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이 그 역할에 충실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회 현상만으로 볼 때, 현재 교회들은 대부분 교회 공동체를 위한 성장과 양육에 치중할 뿐 교회를 벗어난 “세계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는 전지구적 문제가 무엇인지를 많은 영역에서 드러내고 있다. 자연의 역습을 야기한 생태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의 붕괴, 개인 취향의 문화적 일탈의 문제, 국수주의적 국가 의식 문제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교회는 어떤 역할과 책임을 가져야 할까?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뉴 노멀은 교회의 역할과 책임을 교회 안으로부터 교회 밖으로 전환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교회가 교회 밖의 문제에서 구체적인 역할과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신이 필요할까? 사실 그 정신은 이미 삼위일체 신학과 성육신 신학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삼위일체 신학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관계적 존재이며, 그 관계적 존재의 대상은 단지 내재적 관계로서의 존재 개념만이 아니라 경륜적 관계로서의 존재 개념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우주적 초월자이시면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며, 나아가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내재하신 거룩한 영이시다. 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교회가 교회 밖의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요구한다.

더욱이 하나님은 단지 세상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성육신하심으로 완전하게 인간이 되신다. 이런 성육신 신학에 따라서 교회는 세상과 분리된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에 속한 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삼위일체적이고 성육신적 교회란 세상의 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공동체를 말한다. 따라서 교회의 역할과 책임은 세계 속에 계신 하나님의 역할과 책임 바로 그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교회가 추구해야 할 뉴 노멀이다.

사실 이 개념은 교회 역사 안에서 이미 충분하게 강조된 표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삼위일체적이고 성육신적 교회의 역할과 책임에 익숙하지 못하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이것이 교회의 역할에 대한 뉴 노멀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교회는 생태 문제, 경제정의 문제, 문화 문제, 세속화 문제, 포스트휴먼 문제, 세계화의 정치 문제 등과 같은 인류 사회의 문제에 대한 구원론적 답변을 제시하기 위해 성육신적 교회의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지를 깊이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 모든 담론을 재림신앙의 맥락에서 또 다시 재해석해야만 한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재림교회 교회론적 뉴 노멀이 무엇이 될 것인지, 그 뉴 노멀 시대에 재림교회의 역할과 책임은 무엇인지 위의 교회론적 맥락에서 재구축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매우 밀도 있는 신학적 담론을 구축하고 적용해야 할 것이다. “데우스 불트” –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