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계 22:14)인가, 아니면 “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인가?

1919


대총회 성경연구소의 성경 난해 문제 해석

Interpreting Scripture: Bible Questions and Answers


[대총회 산하에 봉직하고 있는 선발된 학자 49명이 내놓은 성경 난제 94개에 대한 균형 잡힌 해석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계 22:14)인가, 아니면 “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인가?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제임스왕역>에는 ”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수백 년 동안 <제임스왕역>의 독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갈 권세를 갖고 있다고 알아 왔으나, 현대의 역본들은 대부분 “계명을 행하는 자들”을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로 대체시켰다. 이 두 번역 중 어느 것이 옳은가?


사본의 증거:

요한계시록 22:14은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일곱 가지 복 가운데서 마지막 복에 해당한다(참조 1:3; 14:13; 16:15; 19:9; 20:6; 22:7, 14). 이 복은 승리한 성도들에게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축복을 약속한다. 그러나 헬라어 사본들은 본문에서 복 받을 자로 언급된 자들의 특징과 관련하여 두 개의 다른 독법을 지지한다. 이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알려진 사본 곧 AD 4∼5세기에 속하는 시내 사본과 알렉산드리아 사본은 구원받은 성도를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로 말한다. 대부분의 현대 역본들이 이 독법을 채용했다. 반면, 다수의 후대 사본들(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 AD 8세기의 것임)은 “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독법을 따른다. <제임스왕역>은 이 독법을 따랐다. 이 본문에 대한 고대 역본들의 독법도 엇갈린다. 흥미롭게도, 테르툴리아누스(AD 145∼220년)나 키프리아누스(AD 200∼259년) 같은 몇몇 라틴 교부들은 “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을 포함하는 본문을 사용하였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선호됨:

그러므로 사본의 증거가 엇갈린다는 것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본문의 두 가지 독법이 모두 타당하게 보이고 문맥에 어울린다 해도, 사본의 증거는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라는 독법을 지지하는 것이 분명하다. 몇 가지 증거를 통해 그런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첫째,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사본들에는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고, “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독법은 매우 늦은 시기의 사본들에서 입증된다.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프리아누스가 이른 시기에 “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독법을 포함하는 본문을 접했다 해도, 그것이 의미 있지만 절대적으로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라틴 교회에 이른 시기부터 이 본문의 이문(異文) 곧 다른 독법이 돌아다녔음을 시사한다.
둘째, 성경의 내적인 증거도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라는 독법을 지지한다. 요한계시록의 다른 곳에서 요한은 “계명을 행하다(헬라어 포이에오)”라는 말보다는 “계명을 지키다(헬라어 테레오)”(참조 계 12:17; 14:12) 또는 “책의 말씀을 지키다(헬라어 테레오)”(참조 1:3; 3:8, 10; 22:7, 9)라는 말을 언급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2:14에서 “그의 계명을 행하다”라는 독법은 요한계시록의 다른 본문들에 나오는 “계명을 지키다”라는 언급과 조화되지 않고 매우 특이해 보인다.
마지막으로,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라는 독법이 요한계시록의 신학적 문맥에도 더 잘 어울리는 것으로 보인다. 요한계시록 7:14에서 요한은 보좌 앞에 서 있는 승리한 성도들을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로 묘사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두루마기를 빨다”와 “계명을 지키다”라는 개념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그 두루마기를 빨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의 외적인 특성이다(참조 계 12:17; 14:12). 그러나 그들의 구원 및 죄에 대한 그들의 승리에 토대를 제공한 것은 그리스도의 피다(참조 계 1:5; 5:9∼10; 12:11). 요한계시록 7:14과 22:14은, 승리한 하나님의 성도들이 오직 어린 양의 피에 자신들의 두루마기를 빪으로써만 하늘 도성과 생명나무에 나아갈 자격을 얻을 수 있고 말한다.


이문 독법이 생긴 이유: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라는 독법을 따르는 현대의 성경 번역들은 “그의 계명을 행하는”이라는 <제임스왕역>의 독법이 옳다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격감시켰다(심지어 부정했다)는 비난을 자주 받는다. 그래서 어떤 진지한 성경 독자들은 성경 번역자들 가운데 성경의 내용을 변경시키려는 어떤 음모가 있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는 요한계시록 22:14의 두 가지 독법에 본문상의 차이가 있는 것이 음모 때문이 아니라 필사자의 실수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을 분명하게 설명하려면 고대에 성경의 사본들을 필사하는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의 어떤 책의 원본도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원래 성경 각 책들의 사본은 학식 있는 필사자들에 의해서 직접 손으로 만들어졌다. 필사는 종종 매우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이뤄졌다. 더구나, 원래 신약의 사본들에는 장이나 절 구분이 없었다. 본문은 대문자로 기록되었고 단어 사이에 공백도 두지 않았다. 필사자는 필사하려는 사본에 있는 단어나 구절을 본 다음 베껴 쓰거나 낭독하는 자가 함께 필사하는 자들에게 큰 소리로 읽어 주는 것을 따라 쓰기도 했다. 그러므로 필사할 때, 필사자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예컨대, 필사자는 어떤 단어나 구절을 보거나 듣고 그와 비슷한 다른 단어나 구절로 바꿔 쓰곤 했다. 바로 이것이 요한계시록 22:14에 두 가지 이문 독법이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이문 독법을 헬라어로 비교해 보면, 이들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몇 글자이고 소리도 비슷하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헬라어로 호이 플루논테스 타스 스톨라스이고, “그 계명을 행하는 자들”은 호이 포이운테스 타스 엔톨라스이다. 헬라어 본문(대문자로 기록되고 단어 사이에 공백이 없는)을 영어의 대문자로 음역하면 이 두 독법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HOIPLUNONTESTASSTOLAS
HOIPOIOUNTESTASENTOLAS

필사자가 혼자서 보고 썼든, 누군가 읽어주는 것을 듣고 썼든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을 “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로 바꿔 쓰기가 쉬웠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결론:

여기서 제시한 모든 사실에 비추어, 두 가지 이문 독법이 모두 가능하지만 여러 증거는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을 원래의 독법으로 강하게 지지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독법은 필사자의 실수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다른 곳에서 강하게 강조된 사실(계 22:17; 14:12) 곧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이 계명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침식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계시자 요한 자신도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자들이 새 예루살렘에서 자리를 얻지 못할 것임을 분명히 한다(참조 계 22:15). 계명의 중요성에 관한 것을 포함하여 어떤 성경 교리도 하나의 본문에만 기초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논의한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 그분의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것 곧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다.

Ranko Stefanov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