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익 교수(삼육대 신학과 / 전 삼육대 총장)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코로나바이러스의 급속한 전염성과 치사율,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된 전 세계적인 경제 침체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선언된 팬더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은 공포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한국의 재림성도 가운데서도 전염병의 피해를 입는 가정이 있다는 소식과 경제적으로 개인 사업에 큰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큰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미국의 특정 주에서만 4월 중순에 40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다는 소식에 이제 이 문제는 전 세계의 재림성도들의 문제로 확산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교회에 모여 예배도 드리지 못하게 된 상황 속에 한국 재림교회는 신속하고 다양한 대처를 함으로 많은 성도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예감하게 만들고 있다. 비록 현장 예배는 중단했으나 온라인 예배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재림교회와 성도들의 존재감도 변함없어 보인다. 아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승강기 구석에 비치된 손청결제에 청학재림교회 스티커가 붙어있어 반가웠다. 위기의 시대에 교회가 이웃을 기억하고 있다는 너무도 분명한 기별이었다. 상당기간 사람들을 만날 수 없음에도 여러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해 재림성도들 사이에 퍼 나르는 정보가 달라졌다.
놀랍게도 근년에 들어 상당수의 재림성도들이 정치적인 보수-진보의 프레임으로 나뉘어 상대방을 공격하는 정보를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어떤 재림성도 가정에서는 이 문제로 다툼이 일어나 부모 자녀 간에 대화가 단절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작은 교회에서 조차 이 문제로 성도 간에 불편한 감정을 고조되게 만들어 서로 대화하기가 껄끄럽다는 소식도 심심찮게 들려왔었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이후 양상이 사뭇 달라졌다. 건강한 삶을 통해 몸의 저항성을 향상시키는 방법과 소독제나 면마스크를 만들어 나누고, 저소득층을 위한 반찬봉사 활동 등이 여전함을 알리는 내용이 많아졌다. 또한 종말과 재림에 관한 설교나 재림의 징조 분석에 관한 강연과 주장, 혹은 정보 등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유포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우리의 정체성을 일깨워준 것이다.
예수께서 속히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승천하신 이후 거의 2000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늘 시대의 징조에 민감했다. 큰 자연 재난이나 사회적 경제적인 혼란, 전쟁 등이 일어나면 종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곤 했다. 전 세계적인 영향을 미치는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를 바라보면서 재림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이 주신 징조를 주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모든 재림성도가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시대의 징조에 대해 깊이 묵상하면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의 소망과 재림교회의 사명을 새롭게 새기는 기회로 삼는다면 전화위복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한 명의 재림성도로서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떠오르는 몇 가지 단상들을 나누고자 한다. 이 글은 논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눔이고 고백이다. 우리 모두 스스로 “그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여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고, 재림교회의 선교적인 정체성을 강화하는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
1.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살펴본 과거의 잘못된 징조 해석의 교훈
■ ‘시대의 징조’를 읽는 사람들
시조사가 발행하는 월간지 <시조>(時兆)는 그 이름을 1874년 6월 4일 제임스 화잇이 창간한 ‘영문 시조’(Signs of Times)에서 따왔다. 이 잡지는 재림교회 설립 초기부터 재림기별을 담아 지금까지 출간하고 있는 선교잡지다. <시조>는 ‘시대의 징조’란 의미로 마태복음 16장 3절에서 예수님이 사용한 단어이다. 예수께서는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時兆, signs of the times]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분별한다”는 말은 “해석한다”는 의미도 들어있다.
재림교회는 재림운동 초기부터 성경의 예언을 깊이 있게 연구하면서 당대의 시대의 징조를 민감하게 살폈다. 여러 시의성 있는 사건들을 예언의 성취로 받아들여 재림의 긴박성의 증거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시대의 징조를 읽는 사람들이었다. 징조를 찾는 일에 과도할 만큼 관심이 높아서 너무 사소하거나 도무지 사용할 수 없는 것을 재림의 징조로 적용한 것이 급속하게 성도들 사이에 퍼져나가 당황스럽고 우려할만한 일이 생길 때도 종종 있었다.
필자가 중학교에 다닐 때 여학생 기숙사에서 등교를 거부하는 학생들이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캐나다 어떤 주에서 일요일휴업 법령이 통과해서 이제 곧 종말이 오니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신실한 선배들을 통해 기숙사 안에 퍼져나간 것이다. 이런 식의 관심과 반응은 한국 재림교회의 신실한 성인 그룹 사이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그러나 가톨릭을 포함한 모든 기독교의 예언 해석사를 살펴보면 매 시대마다 시대의 징조를 극단적이고 단정적으로 잘못 적용하여 기존 교인 뿐 아니라 일반 시민의 공포심을 자극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례가 종종 있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임박한 종말에 대한 선정적인 해석은 단기간의 부흥을 일으키기는 했으나, 대부분이 오류로 드러나면서 장기적으로 교회와 신자 가정에 큰 후유증을 남겼다. 재림교회도 동일한 현상이 자주 일어났다. 시대의 징조를 읽는 일은 매우 중요하지만 해석과 적용에 매우 조심해야 할 과제임을 보여준다. 왜 이런 일들이 교회사에서 계속 반복될까? 그 이유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반복한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반복한다”는 말은 하버드대학교 교수였던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가 1905년 그의 책 『상식을 가진 이성』에서 한 명언이다. 역사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세상 정치이든, 교회 행정이든, 더 나아가 선교 정책이든 간에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예방 학습효과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선교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가 선교 역사와 더불어 선교 현장에서 실수한 사례분석이다. 종말론을 다룰 때도 예언 해석사에서 반복되는 해석 오류를 우리 시대에는 반복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신실한 예언 연구자 가운데 현재 일어나는 일을 긴박한 종말을 지지하는 시대의 징조로 인용하여 기별을 전할 때, 과거 예언 해석사에서 반복되는 실수를 따라가는 경우가 있음을 보게 된다.
특정 논리를 옹호하기 위해 인용하는 상당수의 내용이 출처 확인이 어려운 내용이거나, 전문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빈약한 수준의 것이 많다. 종말과 연관하여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에 도움이 된다면 거의 무조건적으로 가리지 않고 차용한다는 느낌을 주는 책들도 많다.
최악의 경우는 대중의 주목을 끌기위한 목적으로 선정적인 내용을 위주로 출간하는 일간지나 주간, 월간지의 기사를 인용하는 것이다. 사실 언론 기사의 많은 내용들은 보도 자료를 그대로 베끼거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충분한 탐사보도 없이 기사로 내보내는 경우가 많다. 종종 학술지를 인용하는 기사도 전문분야에서 보면 학술논문의 신뢰도에 있어 큰 차이가 나는 논문집이 많다. 인용지수가 많은 논문은 논문게재하기 위해 상당히 높은 경쟁을 거쳐야하지만, 게재비만 내면 다 실어주는 학술지도 존재한다. 객관적인 시선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료 출처의 신뢰성을 검증해야 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도무지 학문적인 논문에는 인용할 수 없는 자격 없는 저자의 낮은 수준의 저서나 도무지 확실한 출처나 근거를 제시할 수 없는 내용들이 검증없이 그대로 인용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는 점이다. 과거 예언 해석사를 살펴보면 이와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최근에도 중요 언론에 발표되어 사실 같아 보이는 매우 타당해 보이는 증거들이 오류로 밝혀지는 일이 자주 있지 않은가?
종말론적인 예언 해석과 징조로서 특정 자료를 인용할 때 이런 실수를 가능한 한 예방하기 위해 과거 역사 속의 두 가지 종말관련 예언 해석의 오류 사례를 살펴보려고 한다.
(1) 서기 1000년 설의 오류
서기 1000년이 가까이 오자 기독교 세계는 종말에 대한 두려움으로 요동쳤다. 1000년이 차면 세상 역사가 마쳐진다는 신학의 기원은 5세기경 히포(Hippo)의 유명한 감독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에서 표명한 천년기 이론이다. 그에 의하면 천년기는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가 천년 동안 교회를 통해 실현된 이후에 그분의 재림으로 끝나는 기간이다. 리챠드 레빈슨은 당시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서기 1000년이 다가오면서 일반 대중들은 세상 종말에 대한 공포가 사회적 확신으로 확산되어 대대적인 신앙개혁 분위기가 열병처럼 번져갔다. 1000이라는 숫자는 마치 악몽처럼 유럽을 압도했다. 비관주의의 물결이 백성들을 사로잡았으며, 사회적 대변혁이 이제 막 세계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 마을마다 한 식구가 되어 교회를 수리했고, 그렇지 않을 경우 들판에 세워놓은 십자가 주위에 모였으며, 거기서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렸다.”(Richard Lewinsohn, Science, Prophecy and Prediction, 78).
문제는 서기 1000년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가자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갔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종말신앙의 토양을 제공했던 기독교에 대한 일반 대중의 신뢰는 크게 실추되었다. 서기 2000년이 다가왔을 때도 세속사회는 물론이고 기독교계, 우리 재림교회 안에서 천년기 사상과 연관한 종말론적인 해석이 다시 유행했었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2) 아마겟돈과 연관된 ‘터키 해석’의 오류
재림교회가 1860년 공식적으로 조직된 이후로 초기 재림교인들이 자주 언급한 시대적인 징조들은 암흑일(1780년 5월 19일), 많은 유성이 떨어진 낙성일(1833년 11월 13일), 그리고 리스본 지진(1755년 11월 1일)이었다.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가 높은 시기였기에 모두가 시의성과 개연성이 있는 종말의 징조를 찾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너무 세세한 징조들이 긴박한 종말의 전조로 남용되어 인용되는 일이 잦아졌다. 복음전도자들 사이에서 세계의 급박한 정세, 특별히 신문의 헤드라인에 나타나는 새로운 세계적 위기를 알리는 유럽의 전쟁 소식은 재림의 전조로 자주 인용되는 단골 메뉴였다.
모든 전쟁은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기록으로 나타나는 모든 자연재해는 목록으로 작성됐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발전한 현대 교통의 발달(특히 증기 기관을 장착한 교통수단의 발달)과 과학은 다니엘 12장 4절의 “지식의 증가와 빠른 왕래”의 증거로 소개됐다. 물론 기독교 역사에서 각 시대마다 시대의 징조로 등장한 도덕 수준의 하락도 빠지지 않았다.
특별히 종말론의 중요 주제인 아마겟돈과 연관해 적그리스도의 정체에 대해 관심이 높았다. 현대의 재림신자들은 의아스럽게 생각하겠지만, 당시 위세를 떨리던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 터키가 여섯째 천사 사건 때 “동방에서 오는 왕”(요한계시록 16장 12절)이고, 다니엘 11장의 마지막 왕이라는 주장이 교회의 핵심 지도자 중 한명에 의해 주창되었다. 사실 영감의 기자인 화잇 여사는 아마겟돈 사건은 팔레스틴에서 일어날 군사적인 싸움이 아니라 재림 전과 재림 시에 있을 선과 악의 대쟁투로 언급했지만, 아직 젊은 기별자의 기별에 교회가 온전히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탁월한 초기 성경연구자였던 우라이야 스미스는 1867년부터 다니엘 11장의 마지막 세력이 교황권이라는 인식에서 터키로 해석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는 유럽에서 밀려난 터키가 예루살렘에 수도를 정할 것이고, 러시아와 터키의 전쟁(1876-1878) 이후 오토만 제국이 붕괴하게 될 것이고, 그 이후에 바로 재림이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주장을 시작한 시점에 주목하기를 바란다. 그가 이런 주장을 시작한 해에 당대의 대국 러시아와 오스만 터키의 전쟁이 시작됐다. 성경을 보다가 당시에 모든 신문의 1면에 너무나 압도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사건에 빠져버린 것이다.
1878년 여름 야영회의 강사였던 우라이야 스미스가 계속 동일한 주장을 하자 제임스 화잇은 개인적 대화로 설득하려다가 안 되자 공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화잇 여사가 아직 어린 교회의 두 지도자가 청중 앞에서 갈등하는 모습은 덕이 되지 못하고, 이 기별이 재림교회 기별의 핵심 기별은 아니라며 자중하기를 권하였다. 상당히 자기주장이 강했던 제임스 화잇이지만, 권면을 듣고 자제함으로 초기 교단의 두 대표적 지도자의 공적 논쟁은 피해갈 수 있었다.
이후 1914년까지 터키 이론은 재림교회 안에서 주류 해석으로 군림했다. 1914년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에서 터키가 독일편에 참전하자 연합군은 1915년에 수도인 이스탄불을 함락시키기 위한 대대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이런 와중에 터키가 수도를 옮길 수 있다는 기사가 언론에 의해 유포되자, 북미교회는 대대적으로 이를 종말 징조의 성취라는 해석이 담긴 전도 책자를 출간하여 배포하기 시작했다.
사실 당시 예루살렘은 중세 이래로 터키 지배하에 있었다. 우라이야 스미스가 예루살렘이 터키의 수도가 되는 것이 아마겟돈의 시작이라는 주장을 따랐던 북미의 지도자들은 매일 신문 1면의 대표 제목으로 나타나는 당시 국제 정세가 그런 일이 일어날 개연성을 크게 만드는 종말적 징조라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1915년 북미지역 재림교회의 순수 성장율이 10%로 증가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조간신문에 난 1면 기사를 다니엘서의 예언 성취로 사용한 공중전도회 강사들 때문이었다. 1917년에는 1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도시 71개 중 절반 이상에서 대형 전도집회가 열렸다. 1915년-1917년 사이에는 북미의 재림교인 수가 무려 43%나 폭증했다.
하지만 1917년 12월 영국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터키가 물러감으로 이른바 ‘터키 예언’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 예언이 실패했다는 것이 드러나자 1917년 후반 이후로 수침자가 급감하고, 배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면관계상 다 다루지는 못하지만 이후에도 2차 세계대전이 계속되면서 북방왕과 연관해 러시아와 일본의 역할을 주목하는 예언 해석이 새롭게 나타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당대의 정치, 경제, 종교적 사건들을 인용해 시기를 정하거나 임박한 일요일휴업령과 환란의 시기를 예측하는 일이 계속됐다. 특별히 1844년이나 희년이나 창조주일의 하루를 천년으로 해석하는 사상과 연관된 해석, 미국 대통령 선출과 가톨릭 교황의 발언과 연관된 해석 등이 자주 나타났다. 물론 한국 재림교회에도 이런 이설들은 영향을 미쳤다. 문제는 이런 일의 후유증은 늘 선교열정을 죽이고, 교회성장의 저하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 재림의 징조는 우리를 미래 예언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재림교회 역사상 20회 이상 시기를 정하려는 시도가 발생했으나, 말씀에 기초하지 않고, 불확실한 신문기사나 소문과 추측, 그리고 편협하고 주관적이고 극단적인 성경 해석과 적용 등으로 신실한 성도들에게 상처와 실망을 안겨주고 사라져갔다.
많은 경우 열렬했던 추종자들의 상당수가 교회를 떠나갔고, 그런 긴박한 종말 기별을 믿고 자녀들에게 학업을 중단시키거나 극단적인 고립을 선택 했던 신실한 성도들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부모의 잘못된 신앙 때문에 희생당했다는 분노를 가지고 신앙을 저버리는 일이 반복되어 일어났다. 이 모든 것은 성경과 특별히 예언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넘어서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재림교회 신학자 도널드 E. 만셀은 다음과 같이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예언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선지자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언된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므로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재림의 징조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하지만 공포심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잘못된 예측을 남발하면 후유증이 커진다. 특히 재림교인 2-3세대가 교회를 떠나는 큰 이유 중 하나도 극단적인 종말론을 적용한 부모를 통해 신앙에 대해 회의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모의 신앙생활이 행복해 보이지도 않고 옳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역사 속의 실책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재림의 징조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다뤄야 하는지를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올바른 성경해석학의 기초 위에 예언해석과 징조를 분별하는 일이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과거와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가장 큰 실수는 시기를 정하는 것이다.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한다”(마태복음 24장 13절)하셨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찾아 종말 백성은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무조건 시기를 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치명적인 오류이다. 또한 특정 징조에 대한 과신으로 너무나 단정적으로 상당히 빠른 시점에 특정 종말 사건이 있을 것이고 그 이후에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다.
만셀 박사의 권고를 꼭 기억하기를 바란다. 예언의 목적은 우리를 예언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예언은 예언된 징조들의 성취를 신중하게 살펴봄으로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믿음을 확증하게 해주고, 우리의 선교적 사명에 대한 확신을 갖고 그 사명성취에 집중하게 해주는 “어둠을 밝히는 빛”이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