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4일 월요일 예수바라기] 양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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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음식물의 맛을 분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욥 34:3, 4).

비방받아 마땅한 욥?

엘리후는 욥기 33장에서 많은 면에서 욥을 이해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34장에서는 태도를 바꾸어 욥을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가서 배움을 구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는다며 비방합니다. “그대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죄를 지었사오니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나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하였는가”(31-32절).

결국 엘리후에게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무식한 사람이었고 악인에 불과했습니다. 이렇게 양비론 즉 논쟁하던 두 진영이 모두 잘못되었고, 그들보다 자신이 훨씬 낫다고 주장하는 모습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또, 엘리후는 욥을 친근히 대하기는 했지만 그를 진정으로 위로하는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엘리후는 욥의 처지에 공감하며 같이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바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엘리후는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실 때 오래 생각할 것이 없으신 분이기에, 조사할 것 없이 사람을 꺽으시고 바로 다른 사람을 세우신다고 말합니다(23, 24절). 정말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기에 엘리후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시는 일은 당신의 전지성이나 전능성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할 길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연약한 인간이 사랑의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심판을 행하십니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조급히 행하지 않으십니다. 은혜의 시간을 오래 허락하시고 조사 과정을 온 우주에 공개하십니다. 재림교회의 조사심판 개념은 이런 모습을 잘 설명해 줍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을 바로 바로 심판하시는 분으로 받아들임으로 다른 이를 바로 바로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친구를 쉽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친구를 판단하기보다는 친구를 진심으로 위로하는 일을 먼저 합니다.

기도) 위로에 진심인 친구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