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죽일지니라”(레 20:10).
속죄일을 통해 죄와 부정의 종결을 알게 된 자들은, 자신의 삶에서 거룩함을 성취합니다. 거룩함을 성취하지 못하면, 종결될 죄와 함께 죽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 죽을 죄인가?
현대 세속사회는 점점 사형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사형제도를 택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잘못된 판단의 가능성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알지 못함으로 누가 범죄자인지를 잘못 판단하여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할 수도 있습니다. 둘째, ‘유한한 인간이 인간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셋째, 어디부터 사형받을 범죄인지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앞의 두 가지는 하나님이 직접 간여하시는 신정 사회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세 번째에 대해서는, 그런 범죄를 제어하지 않으면 공동체가 공멸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참조 사항입니다.
현대 사회의 관점에서 구약의 사형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기에, 교회들도 국가 정부에게 이런 법을 시행하자고 제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점점 심해지는 성적 타락, 강신술 등의 문제가 공동체의 안위에 악한 영향을 주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순종인가 죽음인가?
레위기 20장은 앞서 언급한 죄를 범한 사람에게 “자기 죄를 담당하리라”(17, 20절)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을 위한 속죄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분명히 거룩한 생애를 살 기회가 계속해서 주어졌습니다.
자녀를 몰렉에게 바치지 않아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 순종함으로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무당이나 접신한 자에게 가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을 선지자나 제사장을 통해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을 한 백성은 특히 구름 기둥과 불기둥, 우림과 둠빔, 법궤가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였습니다. 잘못된 성적 관계를 가지지 않아도, 올바른 사랑을 나눌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속죄가 없습니다. 속죄가 없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구원이 없으면 그들은 반드시 죽은 목숨입니다.
그래도 우리 생각에 죽음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하며 거부감이 드는 이 순간, 죽을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죄가 없으면서도 반드시 죽어야만 했던 한 분이 기억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형제도에 대해 고민하다가 인류를 위해 사형당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용서의 주님을 오늘 반드시 뵙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