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을 돌보는 동안 동물의 삶도 풍요로워지지만 덩달아 돌보는 사람의 마음도 아름다워진다. 반려동물에게 쏟는 정성만으로도 그러한데 부모님을 효성으로 대한다면 얼마나 더 큰 삶의 지평이 우리 앞에 열리겠는가.
반려동물을 집 안에 들이는 가족이 많아졌다. 그와 관련된 우스갯소리가 인터넷에 넘쳐 나는 걸 보면 확실히 반려동물이 또 하나의 가족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에게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가족 상황을 조사할 때 형제가 몇 명인지 적는 칸에 반려동물을 그 숫자에 포함시켜서 적는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 웃어넘길 말은 아니다. 그 말은 반려동물을 이제는 확실한 가족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수준을 넘어서 그 정도가 깊어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렇게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인식하는 세태를 보면서 어떤 사람은 말세라고 혀를 차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생명에 대한 존중이 사회적으로 보편화되었다고도 말한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반려동물에 대한 깊은 경도가 지금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현상 중의 하나라는 점이다.
짐승에서 가족으로
집에 강아지를 기르는 사람들은 그 강아지가 단순하게 ‘짐승’이 아니라 우리 인간과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점을 전제로 대화 속에 끌어들이곤 한다. ‘그 아이’라는 호칭부터 ‘우리 아들/딸’이라는 호칭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강아지를 대하는 말투는 진짜 가족인 것처럼 들린다. 게다가 강아지 앞에서 자기 자신을 지칭할 때는 ‘아빠/엄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점을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다. 강아지는 강아지고 사람은 사람인 법인데 어째서 당신이 아빠냐며 불퉁스러운 말을 던진다. 당신이 아빠라면 당신이 강아지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냐면서 가시 돋친 말을 던지기도 한다. 인간이라는 입장에서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말로 인간과 반려동물을 구분하는 태도는 이미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울 정도로 반려동물을 친근하게 대하는 마음은 널리 퍼져 있다.
인간과 동물을 ‘생명’이라는 관점으로 동등하게 대하는 태도가 우리 현실 속에서 실제로 실현된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잠시 접어 두기로 하자. 그 점은 여전히 논쟁 중에 있고, 어떤 입장을 취하든 작은 지면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난제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 주변에서 반려동물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사람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점 역시 인정해야 한다.
가까운 친척 중에 강아지와 함께 살아가는 어른이 계셨다. 처음 강아지를 데려오자는 말이 나왔을 때에는 가장 강하게 반대하셨던 분이다.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강아지를 집으로 데려온 뒤에도 강아지가 패드 밖으로 오줌만 조금 흘리면 마구 야단을 치셨고, 식사 시간에 털이 날리면 숟가락을 놓기도 하셨다. 물론 그런 태도는 한 달도 안 돼서 바뀌었다. 아무리 야단을 치거나 호되게 꾸짖어도 어른께서 외출했다가 한밤중에 들어오면 현관 앞까지 쫓아나와서 꼬리를 살랑거리며 반겨 주는 강아지를 어찌 미워하기만 할 수 있단 말인가. 호칭도 ‘강아지’에서 ‘우리 애기’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어쩌다 강아지가 발치에 치이면 “할아버지가 우리 애기를 아프게 했구나. 미안해.” 하면서 가족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던 다정함을 보이셨다. 당연히 그러한 태도는 강아지에게서 가족 모두에게로 확대되었고, 이전에 비해 훨씬 더 좋은 모습으로 생활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선택적 존중과 사랑의 문제
강아지와 같은 반려동물을 인간과 똑같은 생명체라는 인식을 가지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그 존중과 사랑이 선택적인 경우라면 큰 문제다. 강아지에게는 지극정성을 다하면서 정작 아이에게는 짜증을 자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고양이에게는 다정하기 그지없으면서도 부모님은 잘 지내시는지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건 그냥 추정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제법 보인다. 그렇다면 이건 도대체 무슨 마음일까? 아이나 부모님이 반려동물보다도 못한 존재라는 뜻일까? 그렇지야 않겠지만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관은 표면적으로 사람과 동물을 차별하지 않는 평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철저하게 인간-자기중심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공자와 그 제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이들은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쳤기 때문에 앞서 논의했던 반려동물에 대한 생명관에서는 한 걸음 비껴 서 있기는 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공자와 그의 제자 자유(子游) 사이에 흥미롭게 대화한 대목이 『논어』에 보인다.
자유가 효(孝)에 대해 여쭙자 공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즘 효도는 잘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개나 말에 대해서도 모두 잘 봉양하는 점이 있지. 만약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면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子游問孝.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不敬, 何以別乎?” <爲政>)
진정한 효란
공자 시대에도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대체로 물질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부모님께서 맛있는 음식을 드시게 하고 좋은 옷을 입게 해 드리고 편안한 집에서 사시도록 해 드리면서 생활 전반의 물질적 돌봄을 하는 것으로 최고의 효도를 다했다고 하는 태도가 사회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 그렇지만 공자는 상대방의 몸을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는 어른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생각해 보면 집에서 기르는 개나 말에게도 최고의 물질적 돌봄을 제공하려고 애를 쓰지 않는가. 물질적인 것으로 효도를 다했다고 한다면 부모님을 돌보는 것과 동물을 돌보는 것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핵심은 바로 돌봄의 행위 안에 그 대상을 공경하는 마음이 들어 있는지의 여부라고 했다. 공자에게 ‘공경’이라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애정을 마음으로부터 이끌어 낸다는 의미일 것이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중과 애정으로 상대방에 대해 최선의 효도를 다한다면 그 사람의 삶이 질적으로 매우 고양되어 행복을 느끼게 될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삶도 훨씬 인간다운 삶, 곧 인(仁)을 실천하는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공자의 효는 부모님에 대한 애정과 존중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효를 실천하는 자식들의 삶도 함께 고양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셈이다.
반려동물을 돌보는 동안 동물의 삶도 풍요로워지지만 덩달아 돌보는 사람의 마음도 아름다워진다. 반려동물에게 쏟는 정성만으로도 그러한데 부모님을 효성으로 대한다면 얼마나 더 큰 삶의 지평이 우리 앞에 열리겠는가. 효도는 자식이 부모에 대해 던지는 애정의 마음이지만 그 효과는 부모와 자식 모두의 삶을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김풍기
강원대학교 국어교육학과 교수
가정과 건강 7월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