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해 진리로 나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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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보기에는 순탄한 삶처럼 보일지라도 누구에게나 어려운 시절은 있었을 것이고, 지금도 그 어려움을 견디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존심이 필요한 때가 있겠지만 적어도 진리를 위해 나아가는 길에서 우리가 앞세워야 할 자존심은 없을 것이다.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지자 나무들은 일제히 남아 있던 잎들을 떨구었다. 산사나무나 산수유나무의 앙상한 가지는 푸른 늦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열매만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돌아보면 살아 있는 것은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라. 우리가 의식하고 있지 않을 뿐 우리는 늘 죽음과 벗하며 살아가고 있는 셈이 아니던가. 죽음이 있어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경이롭게 지켜볼 수 있을 것이며, 죽음 덕분에 삶을 좀 더 무겁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니 겨울의 초입에서 나무들이 잎을 일제히 떨어뜨리는 것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운명이며 자연의 질서라 하겠다.

오전까지 겨울을 부르는 비가 뿌리더니 오후가 되자 날이 개면서 푸른 하늘이 얼굴을 드러낸다. 얼른 옷을 챙겨 입고 산책을 나선다. 요즘 들어 산책의 즐거움을 제법 깊이 느끼는 중이다. 매일 같은 길을 걸어도 어제 보지 못했던 풀이나 나무들, 혹은 새들이 눈에 띄면 한참을 서서 바라보곤 한다. 매일 걷는 산길을 지나 다시 돌아오는 길,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곳에서 한 무리의 푸른 풀을 만났다. 아마도 금계국의 잎이 아닐까 싶었다. 그 이름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내게 놀라웠던 것은 영하를 넘나드는 날씨 속에서도 저렇게 푸르고 여린 잎들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 여리디여린 것들은 겨울이 코앞에 닥쳤어도 한 줌의 햇빛만 있으면 최선을 다해 자신의 푸른 생명을 하늘로 밀어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작은 생명일지라도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아 내는 모습을 보며, 과연 나는 어떤지 돌아보게 된다.

어린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새삼스럽게 보일 때가 있다. 내가 청춘이었을 때에는 여린 잎들의 분투(奮鬪)가 보이지도 않았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아마도 나 자신이 그들과 마찬가지로 내게 주어진 시절을 열심히 살아가는 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시절이 아름다웠다는 말은 어쩌면 나이 든 사람의 감탄이거나 한탄일 가능성이 높다. 잎을 떨구고 자신의 본체를 드러내는 나무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내 삶과 등치 하려는 태도를 발견하고 흠칫 놀라기도 한다.

자신이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누구나 자부심과 회한이 교차하리라. 내가 선 자리에서 삶을 돌아보며 내면의 평정을 추구하는 순간이 바로 좋은 선생이 탄생하는 지점이다. 20대 중반에 잠깐 고등학교 교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열성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훌륭하게 선생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직도 생각이 여물지 않았던 스물 몇 살짜리 청년이 열여덟 젊은 청춘을 어떻게 가르쳤을까 싶다. 아이가 아이를 가르치는 격이었다고나 할까?

최근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예전에는 내 지식이 선생으로서 살아가기에 부족하지 않다고 느꼈는데 세월이 갈수록 내 공부의 부족함을 알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은 너무도 빨리 변하는데 그 변화를 따라가는 것은 나에게 벅차다.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기기가 나와서 열심히 익혀 놓으면 세상은 어느새 저만치 앞서 달려가고 있다. 젊은 친구들은 변화를 쉽게 따라가는데 나는 예전의 영광에 갇혀서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만 같다. 나라고 해서 내게 주어진 삶을 어찌 열심히 살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기보다는 두려워하는 처지가 된 것은 아닐까?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요즘은 학생들에게 물어서 배운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젊은 친구들에게 배우는 것이 이제는 즐겁다. 나이와 계층에 상관없이 나보다 더 많은 진리와 지식을 알고 있다면 그 앞에 나아가 배우는 것이 지식인의 당연한 도리이다. 공자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자공이 여쭈었다. “공문자는 무엇 때문에 ‘문(文)’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인지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성품이 민첩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이것을 일컬어 ‘문’이라고 하지.”
   子貢問曰, “孔文子何以謂之文也?”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논어」, <공야장公冶長>)

공문자는 위(衛)나라의 대부(大夫)로 이름은 어(圉)이다. 그에게 문(文)이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그 의미에 대해 공자가 자공에게 대답해 준 내용이다. 총명한 사람은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나아가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꺼리기도 한다. 세월의 무게가 쌓일수록 다른 사람 특히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선현(先賢)들의 말씀처럼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모르는데도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자존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물어서 아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말은 쉽지만 때때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덕목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위해 어떤 것도 하겠다는 강한 용기가 필요하다.

무성한 잎으로 봄과 여름을 장식하던 산사나무와 산수유나무도 계절의 변화 속에서 자신만의 세월을 보냈다. 처마 밑에 앉아서 작은 뜰을 바라보노라면 문득 저들의 일생도 나와 같아서 열매를 맺고 가혹한 겨울을 견디기 위해 여름 내내 얼마나 애를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남들이 보기에는 순탄한 삶처럼 보일지라도 누구에게나 어려운 시절은 있었을 것이고, 지금도 그 어려움을 견디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존심이 필요한 때가 있겠지만 적어도 진리를 위해 나아가는 길에서 우리가 앞세워야 할 자존심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묻고, 거기서 내 나름의 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게 바로 공부가 아니겠는가!

김풍기
강원대학교 교수

가정과 건강 11월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