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선교 120주년 특집] ‘복음의 시간을 거슬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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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해 자신의 삶을 튼튼히 세운다는 의미로 형주(衡柱)에서 기반(基盤)으로 개명했다.

앞서 언급했던 임형주(林衡柱)는 한국 재림교회 초기 선교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한민족에게 세천사의 기별이 전해진 1904년 당시 35세의 장년이었다.

평안남도 용강군 양곡면 정화리(陽谷面 亭花里) 태생으로 “본시 인물이 거대하게 생겼을 뿐 아니라 말도 잘하고 글도 명문장이었던” 지역 명사의 한 사람이었다. 

1899년 세례를 받은 감리교인이자 용강군 선돌감리교회 설립 지도자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평양 독립협회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과 함께 활동했다.

 

하와이 노동이민자를 모집하는 ‘동서개발회사’의 진남포 지사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중 업무차 1903년 말 인천 제물포를 떠나 1904년 1월 9일 아메리카 마루선 편을 이용해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나이 34세였으며, 9살이었던 장남 대식(大植) 군을 함께 데리고 갔다. 

일부에서는 그가 도산 안창호 등 하와이 교포들의 요청에 따라 이민 동포의 계몽지도자로 하와이에 갔다고 주장한다. 또한 하와이에서 홍승하 전도사 주도로 감리교인 중심의 정치 단체인 신민회가 조직될 때 임형주 역시 9인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행적을 미뤄볼 때, 그는 감리교 전도사업과 이민 교포들의 계몽 활동에 힘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와이 생활은 그리 길지 못했다. 1904년 1월 9일 하와이에 도착했던 그가 그해 5월 초순 조선으로 귀항하는 배의 중간 기착지인 일본 고베에 머물고 있던 정황이 포착된 것이다. 그렇다면 하와이 체류 5개월 만에 귀국행을 결심하지 않으면 안 됐던 사정은 무엇이었을까.

역사학자 오만규 교수는 <한국선교 100년사>에서 그 첫 번째 요인으로 아들 대식(大植) 군의 사망을 꼽는다. 왜냐면 1904년 4월 말 하와이를 떠나 조선으로 귀국할 때 혼자서 귀국선을 탔으며, 임 씨 집안에서도 장남 임대식에 대한 기록이 없고 대신 임춘식(林春植)이 임기반의 장남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큰 뜻을 품고 일제의 압박이 없는 자유의 땅에서 잘 키워 보려 하와이로 데려갔던 겨우 아홉 살의 어린 아들을 이역만리 타지에서 갑자기 잃은 아비의 심적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헤아리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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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120주년 특집 – ‘복음의 시간을 거슬러’ (4)

 

서둘러 귀국해야 했던 배경에는 이런 개인적 처지 외에도 하와이 조선인 이민사회 내부의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었다. 내용은 이렇다.

인천 내리감리교회에서 하와이 이민노동자들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된 홍승하 전도사가 주도해 조직한 신민회는 하와이 이민사회 일부로부터 신민회가 감리교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이유로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이뿐 아니라, 신민회 지도부 자체 안에서도 하와이 노동 이민자들의 이민 경비 납부 문제로 분쟁과 반목이 심해졌다. 불행하게도 임형주는 이 분란에 휩싸이게 됐다. 그의 귀국 결정은 이런 형편에서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오만규 교수는 “그러나 임형주 씨는 귀국 결정으로도 자신에게 닥친 시련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하와이 이민사회 내부에서 신민회를 반대하는 세력이 본국 정부에 신민회 결성 동기가 반정부적이라고 보고했기 때문에 신민회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임형주 씨로서는 귀국 후 안전도 장담할 수 없었다”라고 기록한다. 

실제로 당시 조선정부 내의 수구 세력에 의해 독립협회 관련자와 개혁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이 내려져 있었다. 임형주는 귀국길에 잠시 머문 고베에서 자신이 독립협회 지방 조직 관련자로 지목돼 체포령이 내려져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처럼 그의 귀국길은 가정적인 비극과 사회적 고립 그리고 정치적 공포가 함께 얽힌 매우 복잡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자신의 앞길을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쉽지 않은 참으로 답답하고 우울한 여행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러일전쟁 중이어서 귀국선은 야간에만 운행했다. 부산과 목포를 거쳐 20여 일 만에 인천항에 도착한 그는 곧장 진남포로 향했다. 귀국 후에는 정부의 감시를 피해 황해도와 평안도 등 지인 집을 번갈아 가며 전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놓였다. 그는 고단했던 마음을 시(詩)로 달래고는 했다. 


선교 120주년 특집 – ‘복음의 시간을 거슬러’ (4)

 

독좌유황리(獨坐幽惶裏, 깊은 산중에 홀로 앉았으니) 

운심부지처(雲深不知處, 구름이 깊어서 사방을 분간하지 못하겠구나) 

공산야중정불금(空山夜中整不襟, 텅빈 산 한 밤중에 옷깃여미며 앉았으니) 

일점청등일편심(一點靑燈一片心, 푸른 등불이 한 조각 마음일세) 

본체이종명처험(本體已從明處驗, 본체는 이미 세상에서 겪었네마는) 

진원갱향정중심(眞原更向靜中尋, 진리의 근원은 고요 속에 찾으리라)

이처럼 경제적으로 곤궁하고 사법적으로도 참담한 형편 속에 놓여 있던 그에게 어느 날 문득 일본인 쿠니야 히데 전도사와 조선동포 손흥조로부터 들은 재림교회의 비정치적인 신앙이 떠올랐다. 역사는 이때를 ‘에라! 이 세상 잡념을 일체 베어 버리고 이 몸을 온전히 종교계에 바쳐 보리라’는 감동을 느끼고 재림교회의 새 기별에 대해 성경적으로 깊이 연구했다라고 묘사한다.

 

중국 상해에서 활동했던 남감리교 선교사 알렌(Y. J. Allen, 林樂知)의 루터(M. Luther) 전기 중국어 번역본인 <로득개교기략(路得改敎紀略, 玄采譯, 京城, 隆熙 2년)>를 탐독한 것도 이즈음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큰 감동을 받고, 성서적인 재림교회의 조선 개척에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다졌다. 

그는 루터의 전기에서 ‘서방에 루터가 있는데 어찌 동방엔들 그리스도인 루터가 없을손가!’라는 구절을 읽으며 더욱 감정이 고조됐다. 자신이 재림교회의 복음으로 조선 개신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든 ‘조선의 루터’로서 조선 재림교회의 초석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세상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해 자신의 삶을 튼튼히 세운다는 의미로 이름을 형주(衡柱)에서 기반(基盤)으로 바꿨다.

* 이 기사는 참교육을 회복시키는 건강한 대학 삼육보건대학교 지원으로 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