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총회 성경연구소의 성경 난해 문제 해석 Interpreting Scripture: Bible Questions and Answers [대총회 산하에 봉직하고 있는 선발된 학자 49명이 내놓은 성경 난제 94개에 대한 균형 잡힌 해석들] |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 모양이 어떠하냐 그가 가로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삼상 28:13, 14).
사무엘상 28장에 나오는 기사는 사무엘이 죽은 후에 나타나 말했고, 따라서 모든 인간도 사후에 의식이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영혼불멸설을 지지하는 자들에 의해 사용된다. 역사적으로 사무엘상 28장은 주로 두 가지 견해로 해석되어 왔다.
1. 선지자 사무엘이 진짜 나타남
이 견해는 외경 시락(Sirach)의 책(46:16-20, BC 180년경)에 처음으로 나온다. 어떤 이들은 사무엘이 육체가 없는 영혼으로 나타났다고 보지만,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AD 354-430년) 같은 사람들은 부활 후 예수님의 모습이나 예수님이 변형하실 때 나타난 모세처럼 실제 육신을 가진 소생된 사람으로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진짜 나타났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가 육신이 없는 영혼에 불과했다거나 모든 사람은 사후에 육신이 없는 영혼으로 남게 된다고 믿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무엘이 진짜 나타났다는 주장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야기된다. 무당의 행위 같은 것으로 과연 하나님의 신실한 선지자의 안식을 방해할 수 있는가? 특히 하나님께서 이미 공인된 방법으로 사울을 지도하지 않겠다고 하셨는데도(삼상 28:6) 그분께서 성경이 정죄하는 수단(신 18:10; 레 20:6)인 무당을 통해 예언적 기별을 보내시겠는가? 어떤 이들은 이 무당을 “영적인 지도와 통찰을 제공하는” 여성 봉사의 좋은 본보기로 생각하지만, 그러한 해석은 오늘날 무당을 통해 신성한 지혜를 구하는 위험한 선례가 될 수 있다(참조 딤전 4:1, 2; 살후 2:8-11).
2. 귀신이 사무엘로 변장함
테루툴리아누스(Tertullian, AD 155-220년) 같은 교부들은 귀신 혹은 사단이 사울을 속이기 위해 변신하여 나타났다고 가르쳤다. 이 견해가 본문의 문맥에 가장 잘 맞는다.
성경에 나타난 것과 같이, 사울은 귀신에 힘에 지배당하고 있었다(삼상 16:14-16, 23; 18:10; 19:9). 사무엘은 “사술의 죄” 곧 마술(히브리어 케셈, 삼상 15:23)에 대해 사울에게 경고했으나, 그는 무당에게 “신접한 술법”을 하라(히브리어 카삼, 삼상 28:8)고 요청했다. 일반적으로 카삼이라는 단어는 이방의 복술자와 연관하여 사용된다(민 27:7; 수 13:22; 삼상 6:2).
엔돌에서 있었던 이교적 행습들: 엔돌은 이스라엘의 거주지가 아니라 가나안인들의 거주지였던 것 같으며(수 17:11-13), 근자의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가나안 종교는 엔돌의 무당이 사울에게 행했던 것과 매우 유사한 의식(儀式)을 사용한 조상숭배와 결부되었음이 드러났다. 한 우가릿어 토판은 최근에 죽은 왕을 포함한 죽은 조상들을 주술로 불러내 당시 살아있는 왕을 축복하도록 하였다. 이 조상들 곧 “우가릿의 신격화된 죽은 왕들”이 저승에서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믿었고, 따라서 그들은 엘로힘이라 불렸는데, 그것은 사울이 만난 무당이 땅에서 올라온다고 말한 “신”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것과 꼭 같은 말이다(삼상 28:13).
그런데 많은 주석자들은 무당이 히브리어로 엘로힘을 복수 용법(상응하는 분사도 복수임; “그들이 올라온다”)으로 사용했음을 간과했다. 이런 복수 구문은 다신론자들이 어떤 식으로 말하는지(참조 삼상 4:8; 17:43), 그리고 다양한 신들을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보여 준다. 사울은 무당이 말한 대로 복수를 언급하지 않고, 사무엘에게만 초점을 맞춘다(“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그래서 무당도 사울을 따라 단수를 사용한다(“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단수 분사를 사용함[28:14]). 그녀는 사울이 그녀의 동료 복술자들을 제거했기 때문에(28:3) 두려워하며 그에게 무슨 말을 듣기 원하는지 묻는다. 무당이 불러 올린 망령은 여호와의 이름을 일곱 번이나 사용한다. 하지만 “주여, 주여”라고 말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다신론자들은 혼합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다(참조 출 32:4, 5).
그 무당은 사울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많은 주석자들에게 친절하다는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사무엘서의 기자는 그녀가 식사를 위해 짐승을 “잡은” 것(히브리어 타바흐; 참조 삼상 25:11)이 아니라, “제사를 위해 잡았다”(히브리어 자바흐; 참조 28:24)고 묘사한다. 말하자면, 그녀는 “제의적 도살”을 거행했다. 과거 이스라엘의 배도 사건에도 죽은 자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이 포함돼 있었다. 그들이 “먹고 그들의 신들(엘로힘)에게 절하므로”(민 25:103; 시 106:28) 비참한 결과가 이르러 왔다. 그러므로 그녀의 외식적인 친절이 사실상 사울로 이교적 숭배에 빠지도록 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사울이 처음엔 먹길 원치 않았을지도 모른다(28:23).
사울에 대한 징벌이 덧붙여짐: 사무엘로 나타난 이 존재가 이미 처리된 옛 죄들에 대한 징벌을 부가시킨다. 권한이 없는데도 사울이 드린 제사(삼상 13:10-14), 전리품을 취한 것(15:13-35) 등의 죄는 그에게서 왕권을 박탈함으로써 이미 징벌을 선고 받았지만, 지금 이 “사무엘”은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사울을 블레셋의 손에 붙일 것이며, 내일 그와 그의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을 것(28:19)이라는 징벌을 덧붙였다. 새로운 죄는 언급돼지도 않는데, 그렇다면 왜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징벌만 더하시는가? 그 기별은 사울에게 죄책감과 두려움의 짐을 지우고 일말의 희망과 회개의 가능성을 말살해 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 날 사울은 자살했다(31:4, 5). 그 기별이 하나님의 품성과 어울리는가? 하나님의 질책이 아무리 혹독하다 해도 거기에는 회개를 통한 은혜와 희망의 복음이 내포돼 있는 것이다.
이 “사무엘”이 진짜 사무엘의 말을 인용했을 수도 있으나, 사울의 “사술의 죄”는 전혀 꾸짖지 않았다(삼상 15:23; 참조 28:8). 그런데 결국 그것은 사울에게 치명적인 죄로 밝혀졌다(대상 10:13, 14).
정확하지 않은 예언: 무당의 예언에는 부정확한 점이 포함돼 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에게 잡힌 것이 아니라 자살하였다. 그리고 그의 시신이 그들의 손에 넘어갔으나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에 의해 수습되었다(삼상 31:12, 13). 또한 다음날 사울의 모든 아들이 죽진 않았다. 몇 장 더 넘어가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나타난다(삼하 2:8-10). 이와 반대로, 진짜 사무엘은 여호와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했다(삼상 3:19-21).
게다가, 이 “사무엘”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삼상 28:19). 그렇다면 어디에서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인가? 과연 사후의 삶에 대한 어떤 견해가 불경한 왕과 경건한 선지자를 한 곳에 둔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늘과 지옥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도 아니고, 무덤과 하늘 및 지옥에 대한 신약의 일관된 가르침도 아니다. 무당은 모든 영혼이 가는 스올 곧 저승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성경적 세계관이 아니다.
사울과 무당이 본 자는 진짜 사무엘이 아니었음: 어떤 이들은 “그가 사무엘인 줄 알”았다(삼상 28:14)고 본문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울은 얼굴을 땅바닥에 대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며, 따라서 무당이 하는 말만 듣고 그대로 믿었다는 것이다. “알고”(히브리어 야다)라는 말은 잘못일 수도 있는 인식이나 믿음을 가리키는 데도 사용될 수 있다. 예컨대, 사무엘상 4:6에서 “신”이 이스라엘 진영으로 들어갔다고 블레셋인들이 “깨달았”으나 사실 그것은 “법궤”였다.
그렇다면 무당이 사무엘을 보았다고 진술했는데 그것은 누구를 말하는가? 틀림없이 그녀는 사무엘이 보인다고 말했으나 그가 진짜 거기에 있었음을 입증하진 않았다. 사무엘상의 화자(話者)는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시각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죽었음을 보았”다고 보도하지만(31:7), 사실 그의 아들이 다 죽은 것은 아니었다. 화자는 매우 주의 깊게 몇 명이 죽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한다(31:6). 이와 비슷하게, 화자는 무당의 시각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한 것을 보도하는 것처럼 보인다(28:15, 16). 이야기에서 어떤 인물의 시각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은 “현상(現象)의 언어”와 관련된 일반적인 기법이다. 같은 기법이 블레셋인의 다곤신을 인격체처럼 묘사하는 데도 사용된다.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5:4). 물론 다곤은 생명이 없는 돌 우상이었지만 화자는 블레셋인들의 시각에 맞게 묘사한다. 무당과 사울이 인식한 것에 대한 화자의 묘사는 미묘한 서스펜스 기법으로, 본문을 통한 여러 “경고등”은 독자로 하여금 되돌아가서 사울이 어떻게 해서 마침내 파산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더 주의 깊이 읽도록 할 때까지 그 기만의 힘을 느끼도록 한다.
결론: 성경에 의하면, 창조주만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릴 수 있고(요 11:25),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신접한 자에게 해당하는 사형 선고(레 20:27) 아래 있던 엔돌의 무당의 호소에 응답하시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사무엘상 28장의 장면은 무당이 저승 세계에서 신을 올리겠다고 약속한 가나안인들의 교령회(交靈會)를 극적으로 묘사하는데, 사실 귀신이 사무엘로 변신하여 나타나 사울을 속이고 죄책감으로 절망하게 하여 여호와 및 자신의 생명까지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사항들을 주의깊이 고려해야 한다.
Grenville J. R. K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