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시 13편 4~6절)
어제에 이어 4절입니다. 4절에서 시인의 눈은 다른 이들을 향합니다. 시인은 그를 절망케 했던 사람들, 하나님이 마치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던 사람들, 즉 악인들이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을 머리에 그려보며 소스라칩니다. 그들이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두렵고, 자기의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기뻐할까 두려운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악인들에게 짓눌려 절망에 빠지는 것은 결국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패배처럼 인식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5절에 이르러 한편으로는 투덜거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소연하던 시인의 어조가 바뀝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합니다.” 여기서 ‘그러나’라는 접속 부사가 참 중요합니다. 현실은 여전히 암담합니다. 상황이 바뀐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시인은 돌연 마음의 흐름을 바꿔버립니다. 그는 시인이 잠시 잊고 있었지만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에 대한 기억이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야말로 희망의 뿌리입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 방탕한 세월을 지내다가 생의 밑바닥에 이르렀던 탕자가 구원받은 순간은 언제입니까? 아버지 집에 대한 기억을 회복했을 때입니다. 본문의 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기억이 회복되자 그는 자기가 의지해야 할 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의지한다는 것은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돌아가신 김흥호 목사님은 ‘믿음’을 ‘밑힘’이라고 설명합니다. 굳이 한자어로 바꾸자면 ‘저력(底力)’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모두가 절망의 탄식을 내뱉을 때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입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보아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회복되자 그의 마음에 새로운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그때에, 나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5b) 시제는 미래형으로 되어 있지만 그 기쁨은 이미 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너그럽게 대하여 주셔서, 내가 주님께 찬송을 드리겠습니다.”(6) 찬송을 드리는 것은 미래에 좋은 일이 있을 때가 아닙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하나님의 부재에 대해 한탄하던 시인의 입술에서 찬양이 배어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접속되는 순간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못 견딜 어려움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에 비끌어매는 끈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제아무리 힘겹다 해도,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 시련과 고통이 있다 해도 하나님과의 접속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도, 새벽이 오면 기쁨이 넘친다”(시 30:5) 했던 히브리 시인의 기도가 현실이 되게 사십시오. 주님은 우리와 더불어 기쁨의 세상을 창조하고 싶어 하십니다. 이러한 초대에 기꺼이 응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 컨텐츠 제공 : 월간 예수바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