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에 예배드리든 상관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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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총회 성경연구소의 성경 난해 문제 해석

Interpreting Scripture: Bible Questions and Answers


[대총회 산하에 봉직하고 있는 선발된 학자 49명이 내놓은 성경 난제 94개에 대한 균형 잡힌 해석들]

어느 날에 예배드리든 상관없는가?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롬 14:5).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본문이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아무 날에나 예배드려도 상관없음을 말한다고 이해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일요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일요일에 그분을 예배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로마의 교회:
바울의 다른 편지들과 달리, 로마서는 그가 몸소 세우지 않은 교회에 보내졌다. 바울이 그곳을 방문한 적도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이동”으로 인해 그는 16장의 인사에 나타난 것처럼 그곳의 많은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로마에 가서 그곳 교회로 더불어 교제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롬 1:9∼15). 그가 그곳 교회에 있는 문제점들을 알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이 편지는 그곳에 방문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로마에 있는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로마에서 온 어떤 사람들이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있었고(행 2:10), 따라서 그들이 복음의 기별을 가지고 로마로 돌아가 전했을지도 모른다.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이 거명한 사람 중 누군가 교회를 세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점은 이 교회의 회중이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서로 잘 융화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로마서의 주제는 어떻게 하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은혜의 왕국에서 서로 좋은 관계를 맺고 살 수 있는지와 관련되며, 기타 모든 것은 그 주제를 지원하는 논증들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구원이 필요하며, 모든 사람은 동일한 방법으로 구원받는다.

로마의 교회에 있는 문제의 배경:
로마에 있던 교회 문제의 배경이 무엇이었는지 재구성해 볼 수 있다. AD 49년에 글라우디오 황제가 모든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했다.
이때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고린도로 와서 바울을 만났다(행 18:1, 2).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약간 왜곡된 방식으로 이때의 일을 우리게 전한다.(1)
유대인 공동체는,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다른 이들은 거절한 일로 소동을 겪고 있었다. 글라우디오는 그리스도인 유대인과 비(非)그리스도인 유대인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의 결정은 “모든 유대인들은 나가라!”였다. 그러나 약 6∼7년 후 바울이 로마에 편지를 보냈을 즈음 유대인들이 로마로 다시 돌아왔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이미 로마에 돌아와 있었던 것(롬 16:3)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정보를 가지면 역사적 공백을 메울 수 있다. 교회 창립 구성원은 분명히 유대인들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이 지도자로서 교회 직책을 맡았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엔 이방인 신자들도 있었다.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떠나게 되자 이방인들이 들어와 그 공석을 채웠다. 여기까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다음 유대인들이 돌아왔고, 그들은 비워 두고 떠났던 그 자리를 다시 차지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신들의 역할을 계속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것이 큰 문젯거리였다. 전형적인 교회 갈등의 요소가 여기 있다. 바로 이런 일이 로마의 교회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공동체 내에서는 누군가의 직책을 원해서 우리가 지금 다투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반대편이 이단이라거나 태만하다거나 혹은 행동거지가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난한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로마서를 읽으면 바울이 논의 중인 본문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그런 논증을 이끌어 왔는지를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문제들:
기본적으로, 로마서 14장의 문제는 이렇다. 어떤 신자들은 그리스도인도 유대인에게 속한 것들을 모두 행해야 하는데, 이방인들이 그것들을 행하지 않고 표준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인이 그런 것들로 마음을 괴롭힐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유대인에게 속한 것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중 하나는 음식 문제였다(롬 14:1∼4). 그것은 아마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8장에서 거론한 것과 같은 문제일 것이다. 그는 거기서도 약한 자와 강한 자 및 형제의 길에 걸림돌을 놓지 말아야 하는 것에 관해 말한다.

“성경 및 바울의 가르침에 비춰 유추해 볼 때, 로마서 14:5이 레위기의 의식적 제도의 성일들을 언급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신약에서는 이런 날들을 준수해야 할 의무가 폐지되었다. …주의 날이나 제칠일 안식일을 이와 같은 범주에 두는 것은 주석적인 요구조건의 근거에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증거에 배어있는 원칙들과도 충돌된다”(John Murray, Romans,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f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5], 259).

다른 문제는 특별한 날들에 관한 것이다(롬 14:5, 6). 그러면 바울은 어떤 날들을 말하고 있는가? 주석자들은 상이한 대답들을 제시한다. 어떤 이들은 고대에 일반화된 미신인 길일과 흉일을 구분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이 그러한 미신적인 일을 그렇게 부드럽게 다뤘다고 믿기는 힘들다. 다수의 고대 및 현대 해석자들은 바울이 어떤 날들을 금식일로 지키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리새인들은 대속죄일과 기타 특별한 경우뿐 아니라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도 금식했다. 이 해석도 개연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바울이 금식을 직접적으로 언급했을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바울이 안식일을 언급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당시에 식사 규정과 함께 그것이 유대교의 기본이 되는 중요한 표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식일 준수는 초기 그리스도인 모두가 지지하는 십계명의 명령 중 하나였다. 사실, 구약보다 신약이 십계명에 관한 언급을 더 많이 한다. 예컨대, 바울도 로마서 13:9에서 십계명을 인용하며, 디모데전서 1:8∼10에서는 십계명을 약간 바꿔 풀어 제시한다.

유대교의 특별한 날들:
바울이 유대력에서 제칠일 안식일을 제외한 여러 특별한 날들을 언급하고 있었다는 것이 가장 적합한 해석이다. 이것들에는 모세 법이 규정한 절기뿐 아니라(유월절, 무교절, 오순절, 나팔절, 대속죄일, 장막절; 참조 레 23장), 부림절 같은 모세 이후 시대의 절기나 수전절(하눅카) 같은 성경 시대 이후의 절기도 포함되었다. 또한 음력으로 매월 초하루인 월삭의 준수도 여기 포함될 수 있다. 이중 어떤 날들은 안식일로 준수되었는데, 이 날들에는 노동은 하지 않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제칠일 안식일과는 구분되었다. 그러나 이런 안식일들은 십계명에 지키라고 규정되지 않은 날들이며, 매주 행사가 아니라 연례행사(월삭의 경우는 월례행사임)였다. 따라서 이런 날들의 준수 시간은 어느 정도 사람의 판단에 달려 있었는데, 지도계층의 사람들이 새달이 보이는 증거에 기초하여 언제 음력 달이 시작하는지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만드는 것:

이렇게 결론 내리는 것이 최선일 것 같다.
바울은 십계명에 기초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성경적 도덕성을 지지하면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존재하는 분리의 감정을 줄여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것은 유대교의 기본이 되는 표로 여겨지나 아무런 도덕적인 의의가 없는 유대인의 관습을 더 이상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식사와 관련된 세칙들 및 유대인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뿐 아니라 유대인의 정체성을 한층 강화시켜주는 여러 가지 절기들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와 함께 바울의 주된 요점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관습들을 개인의 선택 사항으로 여긴 이방인들이 소위 믿음이 “연약한” 유대인 형제들보다 좀 더 영적으로 진보되었을지 모르나 그들도 자기들 방식대로 사물을 보지 못하는 형제들의 종교적 감정을 고려해야 했다.
로마서 14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관용에 대한 훌륭한 권고를 하는데,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때때로 양편 모두 옳을 수도 있다.
잘못된 점은 자기와 다른 견해를 양심적으로 지지하는 형제를 판단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리를 취하는 것이다.

Robert Johnston

<미주>

(1) Suetonius, Life of Claudius, Loeb Classical Library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79), 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