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갈라디아 사람들은 십자가를 직접 목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그들 눈앞에 밝히 보인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2절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묻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여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받아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전적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구원이 임하고 성령이 우리에게도 주어집니다. 즉 그들은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밝히 보았습니다.
어리석도다
그런데 그들은 어리석게도 무언가에 홀린 듯 거짓 교사들의 꾀임에 넘어갑니다(5절). 구원을 받기 위해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의 행위나 헌금이나 더 종교적인 것을 해야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확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럴 때 관심은 하나님에게서 나 자신으로 내려옵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칩니다(3절). 구원의 복으로 시작했다가 다른 복음의 저주로 마치게 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러한 저주들을 눈앞에서 밝히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명의 성취보다 나와 가족이 더 편하거나 드러나는 교회를 찾아다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말씀을 보며 주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자신의 귀에 맞는 설교자들을 인터넷 쇼핑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은혜를 받아 삶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누가 더 설교를 잘 하는지 비교하기에 분주합니다. 이런 목록은 사실 끝이 없습니다.
구약에서 어리석은 자들은 심중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와 동일하게 신약에서도, 그리고 우리도 교회 안에서, 신앙을 하면서 하나님이 없는 듯이 살 때가 많습니다. 그저 율법의 행위, 자신의 행위가 더 밝히 드러나야 자신이 신앙을 제대로 하고 있다며 안심을 합니다. 그것은 다른 복음이고, 복음이 아니고, 거짓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저주를 받습니다.
주님이 이미 십자가 나무에서 저주를 다 받았기에(13절) 우리는 저주를 받을 필요가 전혀 없는데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어리석게 따라가다가 이제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소서. 눈앞에 밝히 드러난 말씀을 듣고 믿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