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4일 목요일 예수바라기]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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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창 22:3-4)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창 22:6). 슬픈 아버지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가슴을 찢는 슬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합니다. 결코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하나님이 요구하시니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산을 오르는 것입니다. 늙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슬픔이 말씀을 넘어 파도처럼 밀려오니 말씀을 읽는 내내 눈물이 흐릅니다.
모리아산을 오르는 또 다른 슬픈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 아버지도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독자를 불에 태워 번제로 바치라는 요구를 받고 모리아 산을 오르시는 중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에게 사랑하는 독자를 번제로 바치라 요구를 하니, 이 슬픈 아버지는 ‘사랑의 그 요구’를 들으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슬픈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늘 우리 아버지는 슬픈 아버지 아브라함과는 좀 다르십니다. 늙은 아버지 아브라함은 슬픔을 억누르고 말씀에 순종합니다. 원하는 바는 결코 아니지만, 말씀하시니 슬프지만 말씀에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과는 달리 하나님은 아들이 모리아 산에서 상함을 받고 질고를 받는 것을 원하십니다. 모리아산 제단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진실로 하늘 우리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독자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사 53:10)습니다. 사랑하는 독자 곧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마 3:17)를 제물 곧 ‘속건제물’로 드리는 것이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사 53:10)이었던 것입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우릴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도대체 얼마나 크길래 하나님은 사랑의 그 요구를 들으시는 것일까요? 그 사랑이 도대체 얼마나 크길래 사랑하는 독생자를 제물로 내어 주시며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이라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아, 사랑이시여, 하늘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시여…

* 컨텐츠 제공 : 월간 예수바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