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6일 목요일 장년 기도력] 화염 속의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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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6~8)

1415년 7월의 남독일 제국의 중심 도시였던 콘스탄츠를 방문했다고 상상해 보자. 여러분은 콘스탄츠 공의회(1414~18)를 보기 위해 발 디딜 틈 없이 모인 인파와 맞닥뜨릴 것이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저마다 베드로의 정통 후계자라고 주장하던 교황 그레고리오 12세, 베네딕토 13세, 요한 23세 사이의 문제를 정리하고 교회 통치와 도덕적인 삶을 개혁하고 이설을 뿌리 뽑기 위해 개최됐다.
1415년 7월 6일 토요일 이른 아침, 프라하 대학의 유명 교수 얀 후스가 콘스탄츠 성당에서 의회 앞에 섰다. 그는 교회에서 파문됐고 범죄자 취급을 받는 사람이었다. 주교 6명이 그에게 모욕감을 주는 의식을 시작했다. 먼저 그들은 후스의 제의를 벗기고 머리를 밀고 악마의 그림과 함께 ‘이교의 창시자’라고 새겨진 모자를 그의 머리에 씌웠다. 그리고 그의 영혼을 악마에게 맡겼다. 후스는 호송대에 둘러싸인 채 콘스탄츠 거리를 걸으며 자신의 책이 광장에서 불타는 모습을 보았다.
처형장에 선 개혁자의 팔은 등 뒤로 결박됐고 목은 사슬로 말뚝에 묶였다. 그의 몸 주위로 장작과 지푸라기가 수북이 쌓였다. 주장을 철회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고 그들이 제안했다. 그러나 “내가 전한 복음을 굳게 믿으며 기쁨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후스는 말했다. 불꽃이 타올랐고 후스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며 두 번 찬양을 불렀다. 불길은 바람을 타고 후스의 얼굴을 덮었고 정적이 흘렀다. 그는 기도와 찬송 가운데 죽음을 맞이했다. 후스의 죽음은 보헤미아 전역을 뒤흔들었고 후스파와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이어졌다.
얀 후스는 구주를 배반하기보다 죽음을 택한 순교자의 정신을 보여 주었다. 그는 “의의 면류관”(딤후 4:8)을 받을 것이다. 우리도 그와 같은 정신을 품고 있는가?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손만식/어은숙 선교사 부부(필리핀)
원주민 교회인 오유난 교회와 미션 학교가 계속 유지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