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인간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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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개성과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를 부여받았다. 비록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각 사람은 육체, 정신, 혼의 불가분적인 통일체로서 생명과 호흡, 그리고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 우리의 시조가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그들은 그분께 대한 자신의 의존성을 부인했으며, 하나님 아래에 있는 그들의 고귀한 지위에서 타락했다. 그들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은 훼손되었고 그들은 사망에 예속되었다. 그들의 후손은 이런 타락한 본성과 그 결과를 물려받았다. 그들은 연약성과 악에 기울어지기 쉬운 경향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 통회할 때 그들 안에 조물주의 형상을 회복시키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로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간에 사랑하며 자신의 환경을 돌보도록 소명되었다. -기본 신조, 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의 최고 걸작품을 만드실때 말씀으로 존재케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하는 대신에 그분은 자애스럽게 몸을 굽히시고 흙으로이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을 만드셨다.
지상에서 가장 창조적인 조각가일지라도 이처럼 고귀한 존재를 깍아 만들어내지 못했다. 미켈란젤로와 같은 이는 외모를 빼어나게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움도 지닐뿐 아니라 작동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고안된 해부학과 생리학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완전한 조형물이 머리카락, 눈썹, 제자리에 자리 잡은 손톱 등을 갖춘 채 완성되어 놓여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을 다 끝마치신 것이 아니었다. 이 인간은 생명 없이 누워 있어서는 아니되었다. 그는 살아나서 생각하고 창조하고 영광 중에 자라나야 했다.
창조주께서 이 멋진 형태 위에 허리를 굽히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1:26 참조). 인간에게 반려자가 필요함을 아시고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셨다.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는 아담의 갈비뼈 중 하나를 취하셔서 그것으로 여자를 만드셨다(창 2:18, 21, 22).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다음에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오늘날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동산의 가정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다. 그 곳에는 나무, 덩굴 식물, 꽃, 언덕과 계곡이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친히 꾸며놓으신 것이었다. 두 그루의 특별한 나무 곧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그곳에 있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이외의 모든 나무에서 자유로이 따서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창 2:8, 9, 17).
이렇게 해서 창조 주일의 절정을 장식하는 사건이 완결되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인간의 기원
비록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은 하등동물로부터 기원했으며 수십억 년이 소요된 자연적 과정들의 산물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러한 사상은 성경의 기록과 조화되지 않는다. 인간은 타락의 과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본질에 관한 성경적 견해의 핵심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 인류의 기원은 하나님의 회의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26)라고 말씀하셨다. 복수 “우리”라는 말은 삼위 일체 하나님-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이다(본서 2장을 보라). 그리고 한가지 목적으로 하나님은 첫 인간을 창조하기 시작하셨다(창 1:27).

흙으로 창조됨.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형성하셨다(창 2:7). 곧 이미 존재하는 물질을 사용하신 것이다. 그러나 해양 동물이나 지상의 동물들 중 그 어떤 다른 것의 형체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모든 기관을 형성하시고 그것들을 제자리에 놓으신 다음에 그분께서는 “생기”(생명의 호흡)를 불어 넣으셔서 산 사람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됨. 하나님은 “그 종류대로”(창 1:21, 24, 25) 동물-어류, 조류, 파충류, 곤충류, 포유류 등등-을 만드셨다. 각종(種)은 나름대로의 전형적인 형태가 있으며, 자기 종을 번식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계의 어떤 형상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라고 말씀하셨다. 인간과 동물계 사이에는 확실한 불연속성이있다. 인간의 기원을 묘사하는 누가의 족보는 이러한 차이점을 단순하나 심오하게 이런 말로 표현한다.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눅 3:38).

인간의 드높은 지위. 인간의 창조는 모든 창조 활동의 절정이었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 지구성과 모든 동물들의 생명을 맡기겼다. 벌코프(L. Berkhof)는 아담에 대해 이렇게 진술한다. “자신과 자신의 온 영토가 전능하신 창조자시요 우주의 주이신 분께 찬양을 돌리도록 자신의 통치 아래있는 모든 천연계와 피조물들을 자기 뜻과 목적에 맞추도록 하는 것은 그의 의무요 특권이었다. 창 1:28; 시 8:4-9.”*

인류의 통일성. 창세기의 족보들은 아담과 하와 이후의 연속적인 세대들이 모두 이 첫 부모에게서 내려온 것임을 보여준다. 인간으로서 우리 모두는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유전적, 혈통적 통일성을 이루게 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한 조상에게서 모든 인류를 내시어 온 땅 위에서 살게 하시고”(행 17:26, 공동 번역)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담의 범죄가 모든 이에게 죄와 사망을 가져왔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이에게 구원이 준비되었다는 성경의 주장속에서 우리 인류의 유기적 통일성에 관한 암시까지도 볼 수 있다(롬 5:12, 19; 고전 15:21, 22).

인간 본질의 통일성
인간은 어떤 특성을 지닌 부분들로 구성되어있는가? 몸, 혼, 영과 같은 여러 가지 독립적인 구성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가?

생기.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하나님은 흙의 요소들을 살아 있는 존재로 바꾸실 때, 아담의 생명 없는 육체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이 생기는 생명을 주는 “전능자의 기운”(욥 33:4, 공동 번역-“전능하신 분의 입김”), 즉 생명의 불꽃(the spark of life)이다. 우리는 이것을 전류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우리가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올리게 되면, 전류는 여러 가지 전기 부품에 흘러가면서 회색의 화면을 색깔 있고 움직이는 화면으로 바꾸어 준다. 전기는 아무것도 없던 곳에 소리와 움직임을 가져오는 것이다.

인간-생령. 생기는 무슨 일을 했는가? 하나님께서 흙의 요소들로부터 인간을 만드실 때, 심장, 폐, 신장, 간장, 비장, 뇌 등등 모든 기관들이 존재했다. 그때에 하나님은 이 생명없는 물질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그러자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성경의 등식은 다음과 같다. 흙(땅의 요소)+생기=생령 혹은 살아 있는 존재. 땅의 요소와 생기가 결합하여 살아 있는 존재 혹은 생령이 생겼다.
이 ‘생기’는 사람에게만 주어지지는 않았다. 모든 살아 있는 창조물들은 이것을 가지고 있다. 그 예로, 성경은 노아 방주에 들어간 동물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 모두에게 생기가 있었다고 한다(창 7:15, 22).
“생령” 혹은 “살아 있는 존재”로 번역된 창세기 2장 7절의 히브리 용어는 네페쉬 하야(nephesh chayah)이다. 이 표현은 전적으로 인간만을 칭하지 않는다. 이것은 수중 동물, 파충류, 짐승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사용되었다(창 1:20, 24, 2:19).
“존재” 혹은 영혼으로 번역된 네페쉬는 “숨쉬다”를 뜻하는 나파쉬(naphash)로부터 나왔다. 이에 해당하는 신약 헬라어는 프쉬케(psuche)이다. “호흡이 가장 현저한 생명의 증거인만큼 네페쉬는 기본적으로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 개체를 지칭한다.”* 창조 이야기에서 동물에 사용되었을 경우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살아 있는 피조물로서 그것들을 기술하고 있다.
성경이 인간이 살아 있는 혼(생령)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점은 주목해 볼만큼 중요한 것이다. 창조 이야기 중에서는 창조 때 인간의 육체에 연합하게 된 구별된 실체로서의 혼(soul)을 인간이 받았다고 전혀 암시하고 있지 않다.

불가 분리의 통일체. 인간의 본성에 관해 제대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창조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중요성은 아무리 크게 평가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성경은 인간의 유기적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을 전체로서 묘사한다. 그렇다면 혼과 영은 인간의 본성에 어떻게 관계되는 것일까?
1. 혼(soul)에 대한 성경적 의미. 이미 언급한 것처럼 구약의 ‘혼’은 히브리어 네페쉬를 번역한 것이다. 창세기 2장 7절에서 이것은 생기가 흙의 요소로 형성된 물리적 육체 속에 들어간 다음의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표현한다. “마찬가지로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새 혼이 존재케 되는 것이다. 각 ‘혼’은 다른 유사한 단위와는 독특하게 구별되고 구분되는 생명의 새 단위이다. 각각의 살아 있는 존재 속에서 독특한 실체를 이루게 하는 이러한 개체의 특성은 히브리어 네페쉬라는 말로 강조된 사상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을 때 네페쉬는 개인의 한 부분이 아니다. 이것은 그 사람을 일컫는다. 사실 많은 경우에 ‘사람'(창 14:21; 민 5:6; 신 10:22; 시 3:2 참조), 혹은 ‘자신'(레 11:43; 왕상 19:4; 사 46:2등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반면에 ‘내 혼’, ‘네 혼’, ‘그의 혼’ 등과 같은 말들은 일반적으로 인칭 대명사 ‘나’, ‘나를’, ‘너’, ‘그’ 등을 나타내는 관용어이다(창 12:13; 레 11:43, 44, 19:8; 수 23:11; 시 3:2; 렘 37:9등). 구약에 총 755회 사용되었는데 그 중 100회 이상을 흠정역(KJV)성경은 ‘생명'(life)으로 번역하였다(창 9:4, 5; 삼상 19:5; 욥 2:4, 6; 시 31:13등),
때때로 네페쉬는 소망, 식욕, 정욕 등을 언급하는 데 사용되며(신 23:24; 잠 23:2; 전 6:7 참조), 이따금 ‘식욕’으로 번역되고 있다(잠 23:2; 전 6:7). 이것은 애정이 자리잡은 곳(창 34:3; 아 1:7등)을 언급할 수 있으며, 때때로 이것은 인간의 의지적인 부분을 대표하기도 하는데, 신명기 23장 24절, 시편 105편 22절, 예레미야 34장 16절에 ‘마음’으로 번역되어 있다. 민수기 31장 19절에서 네페쉬는 죽임을 당했으며, 사사기 16장 30절(‘나를’로 번역되어 있음)에서는 죽기도 한다. 민수기 5장 2절(‘죽은 자’)과 9장 6절(‘시체’)에서는 이것이 시체를 언급하고 있다(레 19:28; 민 9:7, 10 참조).
신약에서 사용된 프쉬케란 헬라어도 구약의 네페쉬와 유사한 용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생명뿐 아니라 동물의 생명에도 사용된다(계 16:3). 흠정역에서 이것은 40회에 걸쳐 단순하게 ‘생명’ 혹은 ‘목숨'(마 2:20, 6:25, 16:25 등을 보라)으로 번역되고 있다. 어떤 경우에 이것은 단순하게 ‘백성'(행 7:14, 27:37; 롬 13:1; 벧전 3:20등을 보라)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인칭 대명사와 동등하게 사용되기도 한다(마 12:18; 고후 12:15 등 참조). 때때로 이것은 감정(막 14:34; 눅 2:35), 마음(행 14:2; 빌 1:27), 혹은 심장(엡 6:6)을 언급한다.*
프쉬케는 불멸이 아니라 죽을 수 있다(계 16:3). 이것은 파멸될 수도 있다(마 10:28).
성경적 증거를 통해서 네페쉬와 프쉬케는 어떤 경우에는 전인(全人)을 가리키고, 또 어떤 경우에는 애정, 감정, 식욕. 느낌과 같은 인간의 특정 국면을 언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용법들은 인간이 두 개의 구별되는 별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전혀 보여주고 있지 않다. 육체와 혼은 함께 존재하며, 함께 이들은 나눌 수 없는 통일체를 형성한다. 혼은 육체를 떨어져서 결코 의식을 갖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혼이 의식 있는 실체로서 육체가 죽은 후에도 생존한다고 암시하는 성경절이 전혀 없다.
2. 영(spirit)의 성경적 의미. 혼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네페쉬가 개인, 혹은 개성을 나타내고 있는 반면에, 영으로 번역된 구약의 히브리어 루아흐(ruach)는 개인의 존재에 필수적인 힘을 주는 생명의 불꽃을 언급한다. 이것은 인간이 살아 있도록 하는 신적 에너지, 혹은 생명의 소인(素因)을 의미한다.
“루아흐는 구약에 37회 사용되었으며 거의 대부분 ‘영’, ‘바람’, 혹은 ‘호흡'(창 8:1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것은 활력(삿 15:19), 용기(수 2:11), 성질 혹은 분노(삿 8:3), 성향(사 54:6), 도덕적 특성(겔 11:19), 감정이 자리잡은 곳(삼상 1:15)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호흡이라는 의미에서 인간의 루아흐는 동물의 루아흐와 동일하다(전 3:19). 인간의 루아흐는 사망 때 육체를 떠나서(시 146:4) 하나님께로 되돌아간다(전 12:7; 욥 34:14 참조). 루아흐는 이사야 63장 10절처럼 자주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 구약에서 루아흐는 인간과 관련해서는 물리적인 몸을 떠나 감각적 존재가 가능한 지성적 실체로서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루아흐와 대등한 신약 용어는 프뉴마(pneu-ma)인데, 이 말은 ‘불다’, 혹은 ‘호흡하다’라는 의미의 프네오(pneo)에서 파생했다. 루아흐와 마찬가지로 이 단어 속에는, 육체를 떠나 의식적 존재가 가능한 어떤 실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또한 신약의 용법은 인간과 관련해서 그러한 개념을 전혀 내포하고 있지 않다. 로마서 8장 15절, 고린도전서 4장 21절, 디모데후서 1장 7절, 요한일서 4장 6절과 같은 구절들 속에서 프뉴마는 ‘상태’, ‘태도’, 혹은 ‘감정적 상태’ 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갈라디아서 6장 1절, 로마서 12장 11절 등의 구절속에서처럼 개성의 다양한 측면에 사용되고 있다. 루아흐처럼 프뉴마는 사망시에 여호와께로 돌아간다(눅 23:46; 행 7:59). 루아흐와 마찬가지로 프뉴마는 하나님의 성령에 대해서도 사용되고 있다(고전 2:11, 14; 엡 4:30; 히 2:4: 벧전 1:12; 벧후 1:21 등).”*
3. 육체, 혼, 영의 통일체. 육체, 혼, 영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러한 관계는 인간의 통일성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1) 이중적 통일체. 비록 성경은 인간의 본질을 통일체로 보지만 이것은 신체, 혼, 영 사이의 관계를 정확하게 정의하고 있지 않다. 때때로 영과 혼이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수태한 후에 마리아가 기쁨을 표현한 말 가운데 나타나 있는 대구법을 살펴보자. “내 영혼(soul)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spirit)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눅 1:46, 47).
한번의 경우에 인간은 예수님에 의하여 몸과 혼으로 구분되어 언급되었다(마 10:28). 그리고 또 다른 경우에는 바울에 의해 몸과 영으로 언급되었다(고전 7:34). 전자의 경우에 혼은 인간의 고등 기능, 생각컨대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통로인 정신을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후자의 경우에는 영이 이 고등 기능을 언급하고 있다. 두 경우에 모두 육체는 개인의 신체적 측면뿐 아니라 정서적 측면도 포함하고 있다.
2) 삼중적 통일체. 이중적 통일체로 인간의 일반적 특성을 보는 것에 대해 하나의 예외가 있다. 육체와 영의 이중적 통일체로 이야기한 바울은 삼중적 통일체로도 언급하였다. 그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이 구절은 인간의 이러한 국면 중 그 어떤 국면도 성화의 과정에서 제외되기를 바울이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이 경우에 영은 “인간에게 부여된 고차원의지성적 본질로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은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이것과 교통하실 수 있다(롬 8:16을 보라). 개인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은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마음이 새롭게 됨으로써이다(롬 12:1, 2을 보라).
영과 구분해서… ‘혼’은 본능, 감정, 욕구 등을 통해 표출되는 인간의 본질 중 한 부분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본질의 이 부분은 역시 성화될 수 있다. 성령의 작용을 통하여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게 되고, 성화된이성이 저급한 본성을 주관하게 될 때, 하나님과 반대되었던 충동들은 그분의 뜻에 굴복하게 된다.”*
몸은 그것이 고상한 본성이나 저급한 본성 중 어떤 것에 지배를 받든지 그것은 살, 피, 뼈와 같은 신체 조직이다.
바울이 첫번째로 영을, 다음에 혼을, 최종적으로 육체를 언급한 순서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영이 성화될 때 지성은 신적 지배 하에 있게 된다. 성화된 지성은 또 다시 혼, 곧 욕구, 느낌, 감정에 대하여 성화시키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성화가 그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육체를 손상시키지 않을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 그의 육체적 건강은 증진될 것이다. 따라서 육체는 기독교인들이 자기의 주님이요 구주이신 분을 섬길 수 있는 성화된 도구가 될것이다. 바울이 성화를 호소한 것은 분명히 인간 본성의 통일성에 관한 개념 속에 뿌리를 둔 것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효과적으로 준비하는 데는 전인(全人) -영과 혼과 몸-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계시한다.
3) 불가 분리이며, 공감적인 통일체. 각 사람은 불가분의 통일체임이 분명하다. 육, 혼, 영은 밀접하게 협력하여 작용하며, 개인의 영적, 정신적, 육체적 기능들 사이에 있는 강력한 공감적 관계를 나타내 보인다. 한 분야의 결함은 다른 두 분야에 피해를 준다. 병들고 불결하고 혼란된 정신이나 마음은 개인의 정서 건강과 신체 건강에 손을 끼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연약하고 병들고 고통당하는 신체 조직은 일반적으로 개인의 정서 및 영적 건강을 손상시킨다. 기능 상호간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각 개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능들을 최적의 상태에 두도록 할 신성한 의무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창조주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일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창조의 제육일에 창조된 생령은 “하나님의 형상”(창 1:27)으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을 내포하는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됨. 인간의 도덕적·영적 차원이 하나님의 도덕적·영적 본성에 관한 어떤 것을 나타낸다고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육체, 정신, 혼의 불가 분리적 통일체로 되어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적 모습도 어떤 면으로든지 하나님의 형상을 반사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 아니신가? 어떻게 영적 존재가 특정 모습이나 형태와 관련지어질 수 있는가?
천사들에 관해 잠깐 살펴보면, 그들도 하나님처럼 영적인 존재들이다(히 1:7, 14). 그러나 그들은 항상 인간의 형체로 나타난다(창 18:1-19:22; 단 9:21; 눅 1:11-38; 행 12:5-10). 영적 존재가 형태와 모습을 갖춘 “영적 신체”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고전 15:44 참조).
성경은 어떤 인물들이 하나님의 신체의 일부를 본 것에 관해 말한다. 모세, 아론, 나답, 아비후, 그리고 칠십인 장로들은 그분의 딸을 보았다(출 24:9-11). 비록 그분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시기를 거절했지만, 당신의 손으로 모세를 덮으신 다음에 지나가시면서 그에게 당신의 등을 보여 주셨다(출 33:20-23). 하나님은 보좌 위에 앉아 계신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로서 심판정의 이상 속에서 다니엘에게 나타나셨다(단 7:9, 10).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이 인격체이시며 개인적 형체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런 말씀은 결코 놀랄 만한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히 2:7, 난외주 참조) 창조되었다. 이것은 그가 지적, 영적 은사를 부여받았음이 분명하다는 암시이다. 비록 아담이 체험, 통찰력, 품성 계발쪽 분야에 있어서 부족함이 있었지만 그는 “정직하게”(전 7:29) 창조되었다. 이것은 도덕적 고결성에 대한 언급이다.*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으로 인간은 거룩할 뿐 아니라 의로웠으며(엡 4:24 참조), 하나님이 “실히 좋다”(창 1:31)라고 선언하신 창조의 한 부분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은 도덕적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창조주께 대하여 사랑과 충성심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그는 하나님처럼 선택력, 곧 도덕적 규범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유롭게 사랑하고 순종하거나, 혹은 불신하고 불순종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그릇된 선택을 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감수하셨다. 왜냐하면 오직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서만 인간이 하나님의 본성 자체인 사랑의 원칙(요일 4:8)을 충분하게 나타내 보일 수 있는 품성을 계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운명은 하나님의 형상의 최고 표현, 곧 온 영과 혼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었다(마 22:36-40).

타인과의 관계를 위하여 창조됨. 하나님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 2:18)라고 말씀하시고 하와를 만드셨다. 사랑의 관계 속에 성삼위께서 연합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정이나 결혼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교제를 위해 창조되었다(창 2:18). 이러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타인을 위해 살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은 관계 지향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이 측면을 계발하는 것은 하나님 왕국의 조화와 번영에 있어서 절대로 필요한 부분이다.

환경의 청지기가 되도록 창조됨.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의 신적 형상과 하등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단숨에 언급하신다. 인간이 열등한 피조계에 대해 갖는 위치는 하나님의 대리인 신분이다. 동물계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많은 동물들은 인간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다.
다윗은 인간의 주권을 언급하면서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시 8:6)다고 말한다. 인간의 드높은 지위는 인간이 누리고 있었던 영광과 명예를 시사한다(시 8:5-8). 그에게는 세계를 자비스럽게 다스려야 할 의무가 있었는데, 이것은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의 통치를 생각나게 하거나 반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적 힘에 지배당하는 환경의 희생자가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우리가 처해 있는 처지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로 사용하여 환경을 형성함으로써 능동적인 기여를 해야 할 사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러한 통찰을 통해, 파괴로 가득 찬 세계 속에서 인간 관계를 향상시킬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또한 지구의 천연 자원을 이기적으로 소비하는 일과 삶의 질을 크게 떨어뜨리는 무분별한 대기 및 수질 오염 등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다. 인간 본연의 자세에 관한 성경상 견해를 채택하는 일이야말로 번영하는 미래를 보장하는 유일의 길이다.

하나님을 모방하도록 창조됨. 인간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처럼 되도록 만들어 졌기에 하나님과 같이 행동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신이 아닌 인간이기는 하나, 우리는 가능한 한 우리의 영역 안에서 우리의 조물주를 반사해야 한다. 넷째계명은 이러한 의무를 제시한다. 우리는 주일 중 첫 엿새 동안 일하고 제칠일에 쉬셨던 우리 조물주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출 20:8-11).

조건적 불멸성을 띠고 창조됨. 창조시에 우리의 첫 부모에게는 순종을 조건으로 차지하는 것이긴 했지만 불멸성이 주어셨다. 생명나무에 접근함으로 그들은 영원히 갈 수 있었다. 자신의 불멸의 상태를 위태롭게 하는 유일의 길은, 그들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금하신 명령을 범하는 것이었다. 불순종은 사망에 이르게한다(창 2:17, 3:22 참조).

타락
비록 완전하게,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완전한 환경 가운데 살았지만 아담과 하와는 범죄자가 되었다. 어떻게 그토록 급진적이고 두려운 변화가 초래되었을까?

죄의 기원. 하나님이 완전한 세상을 만드셨다면 어떻게 죄가 발생될 수 있었을까?
1. 하나님과 죄의 기원. 창조주 하나님이 죄의 장본인이신가? 성경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은 거룩하시며(사 6:3), 그분에게는 불의가 전혀 없으시다고 지적한다.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 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신 32:4). 성경은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욥 34:10)라고 진술한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그분은 죄를 미워하신다(시 5:4, 11:5). 하나님의 원래 창조는 “심히 좋았”(창 1:31)다. 그분은 결코 죄의 장본인이 아니라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히 5:9)이시다.
2. 죄의 창시자. 하나님이 오직 프로그램대로만 행동할 수 있는 로보트로 우주를 창조하셨다면 죄를 막으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당신의 사랑에 자유로이 반응할 수 있는 존재를 만드셔야 했다. 이러한 반응은 오로지 선택력을 가진 존재에게서나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창조물에게 이런 유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것은 피조된 어떤 존재들이 그분께로부터 돌아설지도 모르는 위험을 하나님이 부담하셔야만 한다는 의미였다. 불행스럽게도 천사들의 세계에서 최고의 지위를 가진 루스벨이 교만하게 되었다(겔 28:17; 딤전 3:6 참고). 하나님 정부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위에 불만족하여(유 6 참고) 그는 하나님의 위치를 탐내기 시작하였다(사 14:12-14). 우주를 장악하려는 시도로서 이 타락한 천사는 동료 천사들 사이에 불만족의 씨앗을 뿌렸고 많은 천사들의 동조를 얻게 되었다. 그 결과로 빚어진 하늘의 싸움은 현재 대적 사단으로 불리는 루스벨과 그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추방됨으로 끝이 났다(계 12:4, 7-9; 본서 8장을 보라).
3. 인간 세계에서의 죄의 기원. 사단은 하늘에서 쫓겨났음에도 반역을 단념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정부를 대항하여 다른 이들을 유혹하여 자기의 반란에 가담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그의 관심은 새로 창조된 인류에게 쏠렸다. 그가 어떻게 아담과 하와를 반란 가운데로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그들은 완전한 세상에 살았으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그들의 창조주께서 공급해 주셨다.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행복의 근원이신 분께 불만족을 느끼고 불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 첫번째 죄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첫 인간을 공격할 때 사단은 그들의 경계심을 풀어버리기로 결정했다. 하와가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 곁에 가까이 오자 뱀을 가장하여 그녀에게 접근한 사단은, 하나님께서 나무 실과를 먹는 것을 금지하신 것에 관해 질문을 던졌다. 하와가, 나무 실과를 먹게 되면 죽으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을 시인하자 사단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사항에 대하여 도전하며 말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 그는 하나님이 놀라운 새로운 체험, 곧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막으신다고 암시함으로써 호기심을 일으켰다(창 3:4, 5). 즉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이 뿌리를 내렸다. 하와는 그 과실이 제공할 것이라는 위대한 가능성에 매혹되었다. 유혹은 그녀의 성결한 마음을 여지없이 때려부수었다. 갑자기 그녀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고 상상하기에 이르렀다. 자기 위치에 불만족하게 된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라는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다.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자신의 판단력을 신뢰함으로써 하와는 하나님께 대한 의뢰심을 끊어버리고 그녀의 높은 위치에서 떨어져 죄 가운데 빠져버렸다. 그러므로 인류의 타락은 그 가장 주요한 특징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붕괴였다. 이러한 불신은 불순종으로 이끌었고, 그 결과로 관계가 깨어지게 되었으며, 결국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분리가 생겼다.

죄의 영향. 죄의 즉각적이고 장기적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가? 또한 죄를 제거하고 인간 본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1. 즉각적인 결과들. 죄의 첫번째 결과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도 영향을 끼친 인간 본성의 변화였다. 새로운 흥겨운 경험, 눈을 번쩍 뜨게 하는 경험은 아담과 하와에게 수치감만을 가져다주었을 뿐이다(창 3:7). 사단이 약속한 것처럼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기는커녕 그들은 두려워하게 되었고 숨고자 시도하게 되었다(창 3:8-10).
하나님이 그들의 죄에 대하여 아담과 하와에게 질문하셨을 때 자신의 과오를 시인하는 대신에 그들은 잘못을 전가하려고 노력하였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7)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하와,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하나님이 자기의 죄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죄 때문에 자기 아내와 자기 창조주에 대해 그가 유지하고 있던 관계가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하와도 뱀을 비난하였다(창 3:13).
그 결과로 이르러온 치명적인 결과들은 그들의 범죄의 심각성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사단의 매개물인 뱀을 저주하여 배로 기어다닐 것을 명하셨고, 이것은 타락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 될 것이었다(창 3:14). 하나님은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 또한 아담은 하나님 대신에 자기 아내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아 그는 고생하며 힘겹게 일해야 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7-19).
당신의 율법의 불변성과 어떠한 범죄도 기필코 사망에 이르게 될 것임을 재확인하시면서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그분은 범죄자들을 에덴의 본향으로부터 추방하시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단절하심으로써 당신의 판정을 실행하셨다(창 3:23, 24). 또한 그들에게 영생의 관원이 되는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것을 금지하셨다. 이렇게 해서 아담과 하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창 3:22)
2. 죄의 성질. 특별히 최초의 타락에 관한 설명을 포함해서, 수많은 성경절들은 죄란 도덕적 악이라는 것, 곧 자유로운 도덕적 행위자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범한 결과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창 3:1-6, 롬 1:18-22).
1) 죄의 정의. 죄에 관한 성경적 정의는 “불법”(요일 3:4),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는 것(약 4:17),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롬 14:23)하는 모든 것 등을 포함한다. 죄에 대한 포괄적인 정의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명령하신 것을 행하는 데 등한히 한 것이나 혹은 그분께서 특별히 감지하신 것을 행하는 것 등,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말한다.
죄는 결코 중립을 모른다. 그리스도는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마 12:30)라고 판결하신다. 그분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다(요 16:9). 죄는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한 반역이기 때문에 그 성질상 절대적인 것이다. 크나 작으나 어떤 죄든지 “유죄” 판결을 받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약 2:10)고 만다.
2) 죄는 행위뿐 아니라 생각까지도 포함한다. 자주 죄는 구체적이고도 가시적인 범법 행위에 국한해서만 거론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어떤 이를 향하여 분내는 사람은 십계명의 여섯째 계명, 즉 “살인하지 말지니라”(출 20:13)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음욕적인 욕구는 “간음하지 말지니라”(출 20:14)는 명령을 범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죄는 분명한 불순종 행위뿐 아니라 생각과 욕구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3)죄와 죄책. 죄는 죄책을 가져온다. 성경적 관점에서 죄책은 죄를 지은 사람이 형벌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내포한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에 온 세상은 “하나님의 정죄 “(롬 3:19, 난외주) 아래 놓여 있다.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경우에 죄책감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 기능들을 고갈시킨다. 또한 해결하지 못할 경우에 궁극적으로는 사망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기 때문이다.
죄책감에 대한 해독제는 용서로서(마 6:12), 그 결과로 청결한 양심과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용서를 회개하는 죄인에게 허락하기를 갈망하신다. 죄짐을 지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류를 향해 그리스도께서는 자비스럽게 초청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4) 죄를 지배하는 본부. 죄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은 성경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마음이며, 우리는 이것을 정신으로 알고 있다. 마음으로부터 “생명의 근원”(잠 4:23)이 나온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라고 밝히셨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 15:19). 전 인격-지성, 의지, 애정, 감정, 신체-이 영향을 받는 것은 마음에 의해서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렘 17:9)이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은 부패하고 타락하고 철저하게 죄되다고 기술할 수 있다.
3. 인류에게 죄가 끼친 영향. 어떤 사람들은 금단의 과실을 먹은 것에 대하여 사형 선고가 내린 것은 너무 가혹하다고 느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죄의 심각성은 오직 아담의 죄가 인류에게 끼친 영향에 비추어서만 제대로 헤아릴 수 있다.
아담과 하와의 첫아들은 살인을 저질렀다. 그들의 후손들은 일부 다처로 신성한 결혼 제도를 범하였으며, 오래지 않아 온 땅은 사악함과 폭력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창 4:8, 23, 6:1-5, 11-13). 회개와 개혁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호소는 주의를 끌지 못했고, 단지 8명의 사람만이 회개치 않은 자들을 멸망시킨 대홍수에서 구출을 받았다. 홍수 후의 인간 역사는, 불과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죄로 가득 찬 인간 본성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에 대해 보여주는 서글픈 기록이다.
1) 인간의 죄의 보편성. 역사는 아담의 후손들이 그의 죄된 본성을 나누어 갖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다윗은 기도드릴 때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시 14:3 참조)라고 말했다.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왕상 8:46). 또한 솔로몬은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잠 20:9),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 7:27)고 말하였다. 신약 성경도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2) 죄성은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고전 15:22)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말한다.
인간 마음의 부패는 전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빛 가운데서 욥은 외쳤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 14:4). 다윗은 말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또한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7, 8)고 기술하고 있다. 그는 회심 이전에는 신자들도 다른 나머지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3)였다고 지적했다.
비록 어린아이로서 우리가 모방을 통하여 죄된 행실을 습득한다고 할지라도, 위의 구절들은 우리가 우리의 근본적인 죄성을 타고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인간의 죄의 보편성은 본질상 우리가 선이 아닌 악으로 기울어진다는 점에서 명백하다.
3) 죄된 태도의 제거. 자신의 생애와 사회에서 죄를 제거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얼마나 성공을 거두고 있는가?
자기 자신의 힘을 통해서 의로운 생애를 성취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애초부터 실패하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죄를 범하는 모든 사람을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다.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우리는 이 노예 상태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고 약속하셨다. 그분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의를 열매 맺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요 15:4, 5).
사도 바울조차도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의로운 생애를 사는 데 실패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의 완전한 표준을 알았지만 그것을 성취할 수 없었다. 자신의 노력을 설명하면서 그는 말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함이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닌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 그 다음에 그는 자기 생애에 죄가 끼친 영향을 지적하였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자신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완전한 표준을 찬양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5, 19, 20, 22-24).
바울은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시인하였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는 육체를 따라 사는 삶을 떨쳐버리고 성령을 따라 그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롬 7:25, 8:1).
성령 안에서의 이러한 새 삶은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은사이다. 신적 은총을 통하여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승리를 누리게 된다(엡 2:1, 3, 8-10). 영적인 거듭남은 이토록 삶을 변화시키기 때문에(요 1:13, 3:5)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로운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러나 새로운 삶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요일 2:1).
4. 진화와 인간의 타락. 창조이래 사단은 인간의 기원과 인간의 타락에 관한 성경상의 설명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킴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혼란 속에 집어넣었다. 생명체는 우연히 발생했으며 오랜 진화 과정을 거쳐 인간이 하등생명체로부터 출현하게 되었다는 가설에 근거한 진화론은 인간의 “자연 발생적” 견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적자 생존의 과정을 통하여 인간은 현재 상태까지 진화했다. 자신의 가능성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기에 인간은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다.
유신론적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기독교인의 수효가 늘어가고 있는데, 이 이론은 하나님이 창세기의 창조를 이루실 때 진화의 과정을 사용하셨다고 주장한다. 유신론적 진화론을 수용하는 이들은 창세기 첫 장들 속에 있는 말씀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화, 혹은 신화로 여긴다.
1) 인간과 진화에 관한 성경의 입장. 창조론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진화론이 기독교 신앙에 끼치는 영향에 관해 우려하고 있다. 제임스 오르(James Orr)는 기록하였다. “오늘날 기독교는 그 교리들에 대한 단편적인 공격에 직면해 있는 것이 아니라, 솜씨 있게 구축되고 옹호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 판본적 사상은 기독교 제도의 뿌리에 타격을 입히는, 적극적으로 고안된, 성경과 정반대되는 세계관의 공격에 직면해 있다.”*
성경은 창세기를 우화적으로, 혹은 신화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거절한다. 성경 기자들은 창세기 1-11장을 문자적인 역사로 해석하고 있다. 아담, 하와, 뱀, 그리고 사단은 대쟁투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들이다(욥 31:33; 전 7:29; 마 19:4, 5; 요 8:44; 롬 5:12, 18, 19; 고후 11:3; 딤전 2:14; 계 12:9을 보라).
2) 갈바리와 진화론. 어떠한 유형이나 모습으로부터든지 진화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의 근본적 기초에 어긋난다. 레오나르드 베르두인(Leonard Verduin)이 주장한 것처럼 “‘타락’의 이야기를 대신하여 향상의 이야기가 등장한 것이다.”* 기독교와 진화론은 정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다. 우리의 시조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죄에 빠졌든가, 그렇지 않든가 둘 중 하나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인이 될 이유가 무엇인가?
갈바리는 진화론에 대해 가장 신랄하게 의문을 제기한다. 만일 타락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는 우리 대신에 죽으시는 하나님을 필요로 할 수 있겠는가? 일반적인 죽음이 아닌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간이 아무 문제가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선포한다. 인간 멋대로 하도록 방임된다면 우리는 온 인류가 멸절되기까지 타락하기를 계속할 것이다.
우리의 소망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께 달려있다. 그분의 죽으심만이 더욱 훌륭하고 결코 다함이 없는 충만한 생명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갈바리는, 우리가 해방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대속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선언한다.
3) 성육신과 진화론. 창조론과 진화론에 관한 문제는 성육신의 관점에서 인간의 창조를 바라볼 때에 가장 훌륭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 속에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이끌어들이실 때 하나님은 창조적으로 역사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러한 절대적인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면 그분께서 첫 아담을 형성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심에 관해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4) 인간은 자립할 만큼 성숙했는가? 진화론자들은 지난 수세기 동안에 이룩한 과학적 발전은 인간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전적으로 결정권을 가진 증거라고 자주 지적하고 있다. 과학을 통해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며, 충분한 시간만 부여받는다면 인간은 세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술의 메시야적 역할은 증강되고 있는 회의주의에 직면해 있다. 왜냐하면 기술 문명때문에 지구는 멸절의 위기에까지 도달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된 마음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모든 과학적 발전은 세상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었을뿐이다.
급격하게 허무주의와 좌절의 철학들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의 “소망은 인간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솟아난다”는 명언이 오늘날은 공허하게 울리는 판이다. 욥은 실재를 더욱 잘 파악했다. 나의 시간은 날마다 “희망 없이 그저 지나가 버리는구나”(욥 7:6, LB). 인간의 세계는 내리닫고 있다. 누군가가 인간 역사의 외부로부터 와서, 적극 개입하여 새로운 실재를 가져와야만 한다.

소망의 빛. 인간의 타락은 얼마나 컸는가? 십자가에서 인간은 그들의 창조주를 죽였다. 궁극적 부모 살해자가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소망없이 버려두지 않으셨다.
다윗은 창조 속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깊이 생각하였다. 처음에 우주의 광대함에 깊은 인상을 받고 그는 인간이 보잘것 없다고 생각하였다. 다음에 그는 인간의 참된 위치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 인간이 현재 하나님과 더불어 가지고 있는 관계를 말하면서 그는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시 8:5, 6; 히 2:7참조)라고 피력하였다.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은 남아 있다. 비록 손상되기는 했어도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다. 비록 타락하고 부패하고 죄되다고 해도, 인간은 아직도 지구에서 하나님의 대표자이다. 그의 본성은 신성보다 못하지만 아직 그는 지상의 피조물들을 돌보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존엄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인식하게되자 감사와 찬송으로 화답하였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 8:9).

은혜의 언약
범죄를 통해서 첫 부부는 죄인이 되었다. 더 이상 사단을 저항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들에게 자유케 될 길이 있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저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가? 어떤 소망이 있었는가?

타락 때에 주신 언약. 하나님께서 타락한 부부의 죄에 대해 형벌을 내리시기 전에 그분은 그들에게 은혜의 언약을 제시하심으로 소망을 주셨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하나님의 기별은 용기를 주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록 사단이 인간을 자기의 악한 마력으로 장악하였지만 궁극적으로 그는 패배할 것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졌던 것이다. 맨처음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를 통하여 죄에 대한 보루를 약속하셨다. 그분은 뱀과 여자, 사단의 추종자와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증오심을 조성하실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사단과 인간의 관계는 깨어지고 하나님과의 갱신된 관계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세기를 거듭하면서 하나님의 교회와 사단 사이의 전쟁은 계속될 것이었다. 그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절정에 달할 것이었는데, 그분은 예언된 여인의 후손의 화신(化身)이셨다. 갈바리에서 사단은 패배하였다. 비록 여인의 후손이 상함을 받았지만 죄의 장본인은 패배하였다.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는 사단과의 싸움에서 그들에게 성공을 거두게 하는 죄에 대한 증오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믿음을 통하여 그들은 갈바리에서 이루신 구주의 승리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창조 이전에 세워진 언약. 은혜의 언약은 타락 후에 개발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창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 당신들 사이에 인류가 죄에 빠질 경우를 위해 그들을 구출할 것을 언약하셨다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딤후 1:9 참조)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을 언급하면서 베드로는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벧전 1:20)다고 말했다.
언약은 흔들릴 수 없는 기초 위에 근거하였으니 곧 하나님 자신의 약속과 맹세에 근거한 것이다(히 6:18).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의 보증이 되신다(히 7:22). 보증인은 타인이 채무를 불이행할 경우에 그 빚과 의무를 대신 지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보증인으로서의 봉사는 인간이 타락하여 죄 속에 빠질 경우에 그분께서 그들이 당해야 할 형벌을 부담하시겠다는 의미였다. 그분은 그들의 구속에 필요한 값을 지불하실 것이었다. 그분은 그들의 죄를 대속하실 것이었다. 그분은 범해진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킬 것이었다. 어떤 인간이나 천사도 이런 의무를 떠맡을 수 없었다. 오직 창조주이신 그리스도, 인류를 대표하는 머리되신 그분만이 그 의무를 짊어지실 수 있었다(롬 5:12-21; 고전 15:22).
하나님의 아들은 언약의 보증이실 뿐 아니라 중보자, 혹은 실행자이시기도 하시다. 성육신한 인자로서의 당신의 사명에 대한 묘사는 그분의 역할이 지닌 이러한 측면을 계시한다. 그분은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 39, 5:30, 43 참조)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요 6:40)이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당신의 사명을 끝내시면서 그분은 아버지의 명령의 실행에 관해 증거하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언약 속에서 인간의 보증이 되기로 하신 당신의 서약을 성취하셨다. “다 이루었다”(요 19:30)는 그분의 외침은 그분의 사명이 성취되었음을 나타내었다. 그분은 범해진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죄 값을 자신의 생명으로 치르셨으며, 회개하는 인류에게 구원을 보장하셨다. 그 순간에 그리스도의 보혈은 은혜의 언약을 비준하였다. 그분의 속죄하는 보혈을 믿음으로 회개하는 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입양이 되고, 따라서 영생의 후사가 된다.
이 은혜의 언약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증거한다. 창조 이전에 세워진 언약이 타락 후에 계시되었다. 그 때에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동반자가 되었다.

언약의 갱신. 불행스럽게도 인간은 홍수 전후를 막론하고 이 엄청난 은혜의 언약을 거절했다(창 6:1-8, 11:1-9). 하나님이 다시 언약을 제공하셨을 때 그분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다. 다시 그분은 구속의 약속을 확인하셨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8, 12:3, 18:18 참조).
성경은 특별히 언약의 조건들에 대한 아브라함의 신실성을 강조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으며, 그분께서는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창 15:6)었다. 아브라함이 언약의 축복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의 순종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언약이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를 지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창 17:1, 26:5).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에게 “믿는 모든 자의 조상”(롬 4:11)이라는 칭호를 줄 만 하였다. 그는 순종 속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모본이다(롬 4:2, 3; 약 2:23, 24). 은혜의 언약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들에게 자동적으로 그 축복을 부여하지 않는다. 오직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갈 3:7). 지상의 모든 사람은 조건을 충족시킴으로 언약된 구원의 약속들을 체험할 수 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시내산 언약(첫 언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의 언약을 갱신한 것이었다(히 9:1).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것을 행함으로 말미암는 언약으로 왜곡시켰다(갈 4:22-31).

새 언약. 후기의 성경절들은 “새롭고 더 나은 언약”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언약이 변경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1) 이스라엘의 불성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제도로 왜곡되었다. (2)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생애, 죽음, 부활, 중보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새롭게 계시된 것과 관련되어 있다(히 8:6-13 참조), (3) 이것은 십자가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의 보혈로 비준된 것이 되었다(단 9:27; 눅 22:20; 롬 15:8; 히 9:11, 12).*
이 언약을 받아들인 이들에게 제공되는 것은 엄청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이것은 그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제공한다. 이것은 성령께서 마음에 십계명을 기록하는 일을 하시도록 하면, 회개하는 죄인들을 그들의 조물주의 형상으로 회복되도록 한다(렘 31:33). 새 언약, 중생의 체험은 그리스도의 의를 가져다 주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체험을 갖게 한다. 이것이 제공하는 심령의 새롭게 됨을 통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 23) 등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로 변화된다.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은총의 능력을 통하여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을 날마다 즐길 수 있게 된다(요 8:29). 타락한 인간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의 언약 속으로 들어오라는 그분의 초청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왕국의 후사가 됨을 보증하는 이런 관계를 체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