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우리는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나 우리의 ‘돕는 배필’되신 하나님은 변함없이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니 그 사랑의 끝은 대체 어디일까요?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 되었으니 아담과 하와의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을 꼭 닮았습니다. 그런데, 영원할 것만 같던 그 뜨거운 사랑이 슬프게도 변하고 맙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핑계를 댄다는 말입니까? ‘사랑하는 하와 없이는 살 수가 없으니 같이 죽으려고 일부러 먹었나이다’ 그렇게 말하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핑계를 댄다는 말입니까?
실제로 아담은 그런 마음으로 그 열매를 먹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어떻게 될지를 뻔히 알면서도 사랑하는 하와가 건네니 그 열매를 먹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어디로 가고 없고 슬프게도 핑계만 남아 그 아름다운 동산을 울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같이 죽겠다 하던 그 사랑은 어디에 내다버렸는지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하며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에게까지 책임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고작 그깟 나무 열매 하나 먹은 게 그렇게도 큰 죄일까 싶기도 하지만, 아닙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은 어디로 가고 없고 사랑 대신 두려움만, 사랑 대신 핑계만 남아 있으니, 죄라는 것은 정말로 무섭고도 흉악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하나님이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목숨이 아니면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죄를 어찌 가벼이 여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어찌 죄 짓기를 어찌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노래하면서 그 사랑을 빙자하여 죄 짓기를 가벼이 여겨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원수는 그 옛날 에덴에서처럼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열매로 우리를 은밀히 유혹할 것입니다. 그 유혹에 담대히 맞서 싸워야 합니다. 오직 예수의 피를 힘입어 피 흘리기까지 죄와 맞서 싸워야 합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를 의지하면 주님은 우리로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로 승리의 행진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아멘.
* 컨텐츠 제공 : 월간 예수바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