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7일 금요일 예수바리기]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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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창 6:14)

방주는 테바이고 테바는 은혜입니다. 테바 곧 방주가 은혜이니 우리의 구원은 당연히 은혜입니다. 우리의 의나 우리의 완전함이나 우리의 순종이나 우리의 열심이나 우리의 신실함이나 우리의 경건이나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거저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만 했으니,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숨을 버리심으로 우리는 은혜 곧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 놀라운 이야기가 오늘 새벽 말씀에 새겨져 있습니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창 6:14).
수백년 된 단단한 아름드리 고페르 나무로 백이십 여년에 걸쳐 만든 방주가 백오십일 동안 비바람을 견디며 물에 떠 있으려면 물이 새지 않도록 그 틈을 꼼꼼히 막아야 했습니다. 그 방수 처리를 위해 역청을 방주의 안팎에 칠하라 말씀하십니다. 방주 안팎에 칠해진 역청은 방주 안으로 단 한 방울의 물도 스며들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노와 돛과 키와 닻이 되신 방주는 역청으로 말미암아 더욱 안전한 것입니다.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는 이 말씀에서 역청을 가리키는 히브리 단어는 ‘코페르’(kopher)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코페르는 성경에서 ‘몸값’ 혹은 ‘속전’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속전을 치르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할 때의 그 속전 말입니다.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kopher)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시 49:7-8). 이것이 그냥 단순한 동음이의어(同音異意語)라고 할지라도, 방주 안팎에 바른 역청은 그냥 역청이 아닙니다. 우리가 탄 방주의 안팎을 하나님은 지금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칠하신 것입니다. 죄가 스며들어 우리를 침노하지 못하도록 방주의 안팎을 어린 양의 피로써 완전히 덮어버리신(kaphar; 덮다, 가리다, 속죄하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하나님이 그 귀한 피로 방주의 안팎을 칠하고 덮으시니, 이보다 큰 은혜가 어디 또 있을까요? 이보다 더 뜨거운 사랑이 어디 또 있을까요? 그 은혜로 오늘도 우릴 부르시니, 우리는 오늘도 예수께로 갑니다. 우리의 구원의 방주 되시며 그 방주의 안팎을 역청으로 칠하여 덮으신 예수, 예수께로 갑니다. 오직 예수께로!!!

* 컨텐츠 제공 : 월간 예수바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