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 월요일 예수바라기] 전도서 7장 고민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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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끝에서 되돌아보기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함께 허락하셨을까요? 솔로몬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장래 일을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14절). 우리 앞에 좋은 일이 일어날지 안 좋은 일이 일어날지 미리 알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은 피조물인 우리의 영역 밖의 일이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 두셨습니다.

오히려, 전도자는 죽는 날, 초상집, 슬픔, 근심이 출생하는 날, 잔칫집, 웃음, 혼인집보다 더 낫다고 말하며 우리의 관심을 삶의 끝, 죽음으로 끌고 가고 싶어 합니다(1~4절). 죽음이라는 명제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면 우리는 심각해집니다. 자신의 이름, 곧 자기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어떤 이름으로 기억될지 고민하게 됩니다.

지나치게는 말고?

전도자는 자신이 의미 없이 허무한 삶을 사는 동안 두 가지를 보았는데,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것을 보았고 악인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살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15절). 당황스러운 마음에 그는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16절))라며, 이렇게 해야 “스스로 패망”하지 않을 수 있고, “기한 전에 죽”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16, 17절).

그런데 이렇게 어중간하고 적당한 태도를 취하면 정말로 패망과 죽음을 피할 수 있습니까? 해 아래 세상에서 우리는 이러한 적당한 태도가 실상은 적절한 대안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이런 상황 자체에서 벗어날 길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이 우리의 시선을 해 아래 이 세상에서 하늘로 전환 시킬 수 있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만이 이 세상의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경외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좋은 이름을 영원히 가지게 할 수 있습니다(1절).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을 천 명 중에서 한 사람도 찾을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28, 29절). 그러므로 이 순간 우리는 우리의 삶의 끝인 죽음을 정직히 대면하는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 죽음을 고찰함으로 주님 경외함을 배우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