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 금요일 예수바라기] 시편 119편 137~144절, (18연, 차데) 열정이 향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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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대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정이 나를 삼켰나이다”(시 119:139).

의로운 세상은 가능한가?

이 연의 주제는 “차데”라는 글자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의”라는 단어가 이 철자로 시작합니다. 첫 절(137절)과 마지막 절(144절)이 “의롭다”라는 단어로 시작하며, 138절과 142절(두 번)에서도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 연은 “의”라는 말과 개념으로 가득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자신들의 정의를 위해 피를 흘리지만, 정작 가장 많이 피를 흘리는 사람들은 무고하고 힘없는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하나님의 말씀도 의로운데 세상에 의가 없는 것은, 세상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139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의를 실현 시킬 만한 힘은 없어도, 의가 없는 세상에 대해 “거룩한 분노”를 느끼듯, 시인은 주의 말씀을 잊어버린 자들에게 자신을 삼켜버릴 만한 열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말씀을 사랑하고(140절), 멸시를 당해도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며(141절), 환난과 우환을 당해도 주의 말씀을 즐거움으로 삼는 것뿐이었습니다(143절).

어떻게 가능할까?

그렇지만 시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142절)라고 고백하고,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144절)라고 간구합니다. 그는 주님께서 영원한 의를 친히 이루실 무엇인가를 고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은 바로 십자가에서 영원한 의가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예수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셨습니다. 시인은 아직 십자가의 원리를 온전히는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하나님의 의가 옳으며 언젠가는 그것이 온전히 이루어질 것을 알았기 때문에, 주의 의는 영원한 의이며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롭다고(142, 144절)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원수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의를 성취하실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자신을 삼킬 거룩한 열정이었습니다.

기도) 거룩한 열정으로 주의 의를 사람들에게 보이는 자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