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결혼과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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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제도는 에덴에서 신성하게 제정되었으며, 한 남자와 한 여자사이에 사랑의 교제로 맺어지는 평생 동안의 연합임을 예수님도 확증하셨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결혼 서약은 배우자에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서약하는 것이므로 동일한 신앙을 가진 남녀간에만 결혼이 이루어져야 한다. 상호간의 사랑과 신의와 존경과 책임은 결혼 관계의 바탕이 되며, 그것은 그리스도와 당신의 교회사이의 사랑과 신성함과 친밀함과 영원한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혼에 관하여, 예수께서는 음행 외에 배우자와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비록 어떤 가족 관계가 이상에 못 미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에게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배우자들은 성령의 인도와 교회의 훈육을 통하여 사랑의 연합을 이루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축복하시며 가정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도와 완전한 성숙에 이르기를 바라신다. 부모는 그의 자녀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양육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본과 말로써, 그리스도는 그들로 당신의 몸인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원하시는 분이며, 언제나 자애롭고 관심을 베푸시는 사랑의 훈육자이심을 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가족 간의 유대를 향상시키는 것이 마지막 복음 기별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기본 신조, 23.

가정은 인간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환경이다. 가정 안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들은 소속감과 사랑과 친밀함에 대한 서로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자신들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동질성이 확립되며 개인의 가치에 대한 지각이 계발된다. 가정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참된 그리스도교의 원칙이 실현되며 그 가치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수되는 장소이기도하다.
가정은 크나큰 행복이 깃드는 곳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또한 심한 상처를 입는 곳이 될 수도 있다. 조화된 가정 생활은 하나님의 품성을 계시하면서 진정으로 체득된 그리스도교의 원칙들을 나타낸다. 불행하게도, 이같은 특성들이 나타나고 있는 현대의 가정은 너무도 희귀하다. 대신에 많은 가정들이 이기적인 인간의 생각과 의도들-다툼, 거역, 경쟁, 분노, 부정 및 심지어 잔인성까지 드러낸다. 그러나 이같은 특성들은 하나님의 본래 계획의 일부가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 19:8)고 말씀하셨다.

태초부터
안식일과 결혼 제도는 하나님께서 본래 인류에게 주신 두 가지 선물들이다. 그것들은 시간과 장소와 문화에 관계없이 휴식과 소속의 기쁨을 주기 위하여 계획되었다. 이 두 제도의 수립으로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사업은 완성되었다. 그것들은 창조시에 그분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종적이며 가장 뛰어난 건물들이었다. 안식일을 제정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휴식과 재생의 시간을 주셨으며 당신과 교제하는 시간도 주셨다. 최초의 가정을 세우심에 있어서, 그분께서는 인간을 위하여 기본적인 사회적 구성 단위를 마련하셨으며, 그들에게 소속감을 주시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 원만한 인간으로서 계발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남자와 여자. 창세기1장 26, 27절은 이 세상에 거주하게 될 인간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실을 기술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사람이란 용어는 여기서(히브리어와 영어 모두에서) 총칭적인 의미로 사용되는데, 구약에 500번 이상이나 나온다. 이 용어는 남자와 여자 모두를 포함한다. 성경 본문은 남자의 경우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고 여자는 사람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반대로, 둘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하나님이신 것과 꼭 마찬가지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사람을 구성한다. 그리고 삼위 신성과 마찬가지로, 비록 그들이 하나가 되어야 할지라도, 그들은 기능에 있어서 동일하지 않다. 그들은 본질과 가치에 있어서는 동일하나 인격에 있어서는 동일하지 않다(요 10:30; 고전 11:3과 비교). 그들의 체격은 보완적이며, 기능은 협력적이다.
양성(兩性)은 다 좋은 것이므로(창 1:31)그들의 상이한 역할도 좋은 것이다. 가족과 가정은 성적(性的)으로 다르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무성 생식을 하는 어떤 동물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지 않고도 세상이 인생들로 편만하게 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형태와 특성에 있어서는 동일하나, 각자 자신 속에 상대방에게는 없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를 보완해 주는 두 개체”를 만드셨다.* 남성 혹은 여성만으로 구성된 세계는 완전하지 않을 것이다. 참된 충족은 남성과 여성이 공히 존재하는 사회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서는 동등성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둘 다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처음 태어났으므로 인류의 머리*가 된 아담은, 그의 생애의 첫날에 그와 유사한 다른 사람이 없었으므로 자신의 유일 무이함을 지각하였다. 그러나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창 2:20)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같은 부족을 감지하시고는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배필”로 번역된 히브리어 네겟(ne-ged)은 어떤 사람이나 물건 “앞에, 전면에, 맞은편에, 조화되게”서는 것을 의미하는 전치사와 관련되는 명사이다. 이 경우 아담 앞에 서야했던 사람은 그의 상대자로서 그와 조화되면서 그를 보완해 주어야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에 “갈빗대 하나”를 취하셔서(창 2:21) 그의 반려자를 만드셨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아담은 이 특별한 창조행위가 가져다 준 밀접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즉시 깨달았다. 그는 “마침내, 여기에 내 자신과 본질이 같은-내 뼈에서 취하고 내 살에서 취한 한 사람이 있도다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창 2:23, TEV; 고전 11:8 참조)고 외쳤다.

결혼. 남성과 여성이라는 다양성으로부터 하나님께서는 질서와 통일성을 가져오셨다. 그 최초의 금요일에 그분께서는 최초의 결혼을 집례하시고, 당신의 형상의 전형인 그 두 사람을 결합시켜서 하나로 만드셨다. 그리하여 그 후 줄곧 결혼은 가정과 사회의 기초가 되었다. 성경은 결혼을 분리와 결합을 모두 나타내는 결정적인 행위로 묘사한다.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1. 떠나감. 결혼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전의 근본적인 관계에서 떠나는 것이다. 결혼관계가 부모 자녀간의 관계를 대신해야 한다. 이 같은 의미에서, 사람이 그의 부모와의 관계에서 “떠남”으로 다른 사람과 “연합”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없이는, 결혼을 위한 굳건한 기초가 놓이지 않는다.
2. 연합함. “연합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집착하다, 고정시키다, 결합하다, 꼭 붙잡다”는 뜻의 말에서 유래한다. 명사로서 그것은 심지어 땜질과 납땜(사 41:7)에도 사용될 수 있다. 이같은 결합의 밀접함과 단단함은 결혼유대의 특성을 예증해 준다. 이같은 연합을 깨뜨리고자 하는 시도는 어떤 것이라도 이와 같이 서로 밀접하게 결합된 개인들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이같은 인간의 결합이 밀접한 결합이라는 사실은, 동일한 동사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결합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고있다는 사실로도 강조된다.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히 하고(연합하고)그 이름으로 맹세하라”(신 10:20).
3. 맹약함. 성경에서 이 맹세, 곧 그것에 의해 혼인한 부부가 한데 묶이게 되는 이 약속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가장 엄숙하고도 구속력 있는 협정에 사용되는 용어인 “언약”(covenant)이라는 말로 표현된다(말 2:14; 잠 2:16, 17).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당신의 백성, 곧 교회와 맺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엡 5:21-33). 상대방에 대한 그들의 서약은 하나님의 언약의 특징이 되는 충성과 인내에 기초되어야 한다(시 89:34; 애 3:23).
하나님과 양가의 가족과 친구들과 지역 사회는 그들이 서로 맺는 언약에 대한 증인이다. 그 언약은 하늘에서 비준된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 그리스도인 부부는, 결혼시에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서로에게 충성되기로 언약하였음을 안다.*
4. 한 몸이 됨. 부모를 떠나 배우자와 결합하기로 한 언약은 연합을 가져오는데, 그것은 신비이다. 여기에 충만한 의미에서 하나됨인 있다. 곧 결혼한 남녀는 함께 걷고, 함께 서며, 깊은 친교를 나눈다. 최초에는 이같은 하나됨이 결혼으로 인한 육체적인 연합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것은 상호 관계에서 육체적인 면을 단단히 묶어주는 정신과 감정의 밀접한 연합을 나타낸다.
1) 함께 걸음. 당신과 당신의 백성과의 관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암 3:3)느냐고 물으신다. 그 같은 질문은 한 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적절한 물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변 나라의 백성들과 통혼하지 말도록 가르치셨다. 왜냐하면 “그가 네 아들을 유인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신 7:4; 수 23:11-13 참조)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같은 교훈을 무시하였을 때, 그들은 비참한 결과를당했다(삿 14-16; 왕상 11:1-10; 스 9, 10).
바울은 이 원칙을 명백한 말로 반복하였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4-16, 17, 18 참조).
분명히, 성경은 믿는 자 끼리만 결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원칙은 그보다 더 확대된다. 참된 하나됨은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일치할 것을 요구한다. 종교적인 경험의 차이는 생활 방식에 차이를 가져와 심한 긴장과 결혼생활에 불화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 되기 위해서는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결혼해야 한다고 말한다.*
2) 함께 섬. 한 몫이 되기 위해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완전히 충성해야 한다. 사람이 결혼할 때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배우자에게 수반되는 온갖 것을 다 받아들인다. 결혼하는 사람들은 배우자의 책임을 자진해서 나눠지며 모든 일에 대해서 배우자와 함께 대처할 것을 선언한다. 결혼은 끊어지지 않을 적극적이고 끈기 있는 사랑을 요구한다.
“두 사람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공유한다. 곧 그들의 육체와 물질적 소유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감정과 기쁨과 고통과 희망과 공포와 성공과 실패까지도 공유한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두 사람이 몰과 혼과 영으로 완전히 하나가 되면서도 여전히 다른 두 사람으로 남는 것을 의미한다.”*
3) 친밀성. 한 몸이 되는 것은 성적인 연합을 포함한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창 4:1)했다. 연합하고자 하는 그들의 욕구, 곧 아담과 하와의 때 이후로 모든 남자와 여자가 느껴 온 욕구를 가지고, 모든 결혼한 남녀는 최초의 사랑 이야기를 재연한다. 성적 친교의 행위는 그들에게 가능한 육체적 연합에 있어서 가장 가까운 행위이다. 그것은 또한 한 쌍의 남녀가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친밀함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 부부의 애정은 따뜻함과 기쁨과 즐거움으로 특징지워져야 한다(잠 5:18, 17).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히 13:4). “성경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에서 우러나는 즐거운 성적표현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라고 분명히 말해 준다. 그것은 히브리서의 저자가 강조한 것처럼, 더러운 것이 아니며 죄된 것도, 불결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결혼 생활에 있어서 굉장히 영예로운 장소-남편과 아내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이행하기 위하여 내밀히 만나는 지성소이다. 그것은 신성하고도 심히 유쾌하게 됨을 의미하는 시간이다”*
5. 성서적 의미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은 인간의 모든 부면-육체적·정서석·지적·영적 부면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상호 성장하도록 격려해 주는, 서로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다정하며 친밀한 헌신이다. 결혼 생활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작용한다. 즉 낭만적이고 정열적인 때가 있으며, 매우 감상적인 때가 있고, 기분 좋은 때가 있으며, 사교적이고 소속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참되고 지속적인 부부간의 사랑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신약에 묘사된 아가페 사랑-비이기적인, 순전히 남을 위한 사랑-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죄로 인한 죄의식과 결과들을 받아들이셨을 때, 이같은 사랑의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세상에 있는 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가 그분을 죽음으로 몰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아가페 사랑이었다.
이 사랑을 묘사하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고전 13:4-8)한다.
에드 휘트(Ed Wheat)는 이 성경절에 대하여 주석하기를. “아가페 사랑은 영원한 능력의 근원에 플러그가 꽂혀져 있으므로 다른 모든 종류의 사랑이 실패할 때에도 그것은 계속 작동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이라 할지라도 사랑한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사랑스럽지 않을지라도, 아가페 사랑은 계속해서 꽃필 수 있다. 아가페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만큼 무조건적이다. 그것은 의지의 자의적인 선택에 기초한 정신적인 태도이다”*
6. 개인적인 영적 책임. 비록 결혼한 배우자가서로에게 맹약을 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각자 개인적으로 자신들이 한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고후 5:10). 그같이 책임을 진다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행한 일에 대하여 상대방을 결코 비난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그들은 또한 그들 자신의 영적 성장에 대해서도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도 다른 사람의 영적 성장에 의지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편, 각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다른 사람에게 힘과 격려의 일천으로 작용할 수 있다.

결혼 생활에 미친 인간 타락의 영향
죄가 가져온,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인간의 왜곡된 반영은 그것이 인간 생활의 다른 부면에 미친 것과 꼭 마찬가지로 결혼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때 완전한 사랑과 연합이 지배하던 곳에 이기주의가 끼어들었다. 이기심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되지 않는 모든 자들을 움직이는 주요 동기이다. 복음이 나타내는 굴복과 복종심과 헌신의 모든 원칙들을 반대함으로,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온갖 실패의 공통 분모가 된다.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함으로 저들의 창조 목적을 위반하였다. 그들은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개방된 상태로 살았다. 그러나 범죄한 후로는, 기쁨으로 그분께 나아가는 대신에 그들은 두려움으로 그분을 피했으며 자신들에 관한 사실을 숨기고자 했으며, 그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부인하였다. 그들은 자기행위의 합리화를 통해서도 지을 수 없는 깊은 죄책감에 압도되어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의 눈을 바로 볼 수 없었다. 그 때 이후로, 이같은 회피와 자기 정당화를 앞세운 부인(否認)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꼴짓는 통상적인 유형이 되었다.
그들로 하여금 숨도록 만든 공포심은 하나님에 대한 아담과 하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서로간의 관계도 왜곡시켰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을 때, 그들은 둘 다 상대방을 비난함으로 자신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그들의 비난은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세우신 사랑의 관계에 심각한 균열이 생긴 것을 증거한다.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남자와 여자의 근본적인 동등성을 변화시키지 않은 이같은 원칙이 첫 부부와 이후로 계속될 부부들 모두에게 유익이 되도록 작정하셨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원칙은 왜곡되었다. 그 후로 힘과 속임수와 개성의 말살을 통한 지배가 모든 세대를 통하여 결혼 생활의 특징이 되었다. 자아중심주의는 서로에 대한 관용과 이해의 결여를 낳았다.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타락 이전의 결혼 생활의 특징인 자아를 부정하는 조화인데, 이러한 조화가 타락으로 인하여 파괴되었다. 남편과 아내의 애정은 서로의 행복에 기여해야 한다. 각자는 상대방의 행복을 계발시켜 주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로 결합되어야 하지만, 그들 중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소유인 그의 개성을 상실함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의 이상(理想)에서 벗어남
일부 다처제(또는 일처 다부제). 한 남자(또는 여자)가 여러 명의 배우자를 거느리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최초의 결혼식과 더불어 정하신 하나됨과 연합의 정신과는 반대된다. 일부 다처제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의 포기란 없다. 비록 성경이 복수의 결혼 생활을 부조들 당시의 문화적인 현실로써 묘사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분명히 그러한 결혼이 하나님의 이상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 같은 결혼생활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단위 가족들은 자녀들을 감정의 무기로 이용하여 가족 내의 다른 식구들을 상해함으로써 세력 다툼과 쓰라린 원한과 이간에 연루되었다(창 16장 참조, 29:16-30:24과 비교).
일부 일처제 결혼은 부부에게 그들 간의 친밀함과 결합을 강화시켜 주는 소속감을 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계가 특별한 것이며 그들 외에는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하는 일에 참견할 수 없음을 안다. 일부 일처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당신의 교회와,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분명하게 반영한다.*

음행과 간음. 현대의 사조와 행습은 두 배우자가 죽을 때까지 성적으로 서로에게 충실하리라는 지속적인 서약을 가볍게 여기도록 만든다. 그러나 성경은 혼인 외에 이루어지는 여하한 성적 관계든 다 죄로 간주한다. 일곱째 계명은 여전히 유효하며 변하지 않았다. “간음하지 말지니라”(출 20:14). 여기서는 자격자나 무자격자나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이 계명은 결혼 관계를 방심함 없이 지켜주는 원칙이다.
음행과 간음에 대한 성경상 견해의 완전한 의미는 그같은 행위에 대해서 “승락하는 어른들”이 나타내는 오늘날의 관용과는 전적으로 반대된다. 신약과 구약의 많은 성경절들은 그같은 행위들을 정죄한다(레 20:10-12; 잠 6:24-32, 7:6-27; 고전 6:9, 13, 18; 갈 5:19; 엡 5:3; 살전 4:3 등).
그같은 간통은 파급 효과가 크고 매우 지속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들은 합법적인 배우자를 속이며,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재정적으로,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그에게 해를 줄 수도 있다. 그들은 다른 가족들에게 해를 입히며, 자녀들이 있을 경우 특별히 그들에게 상처를 준다. 이러한 사통은 성병을 전염시키며 사생아를 낳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또한 그러한 사건들 위에 드리워지는 거짓과 부정직의 구름은 신뢰심을 회복시킬 수 없을 만큼 파괴시킨다. 이 같은 형태의 부도덕에 대한 성경의 경고는 그만두고라도, 피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일련의 불행한 결과들은 그같은 일에 빠지는 일에 대하여 충분한 경고가 되어야 한다.

불순한 생각. 죄란 단순히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사고 방식에까지 깊숙이 스며드는 마음의 문제이다. 만일 샘이 오염될 것 같으면, 강물은 쉽게 깨끗해지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마음에 들어 있는 것이 사람의 행동을 유발시킨다는 것을 아셨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마 15:19)기 때문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그분께서는 불성실한 행위의 근원은 생각과 감정임을 밝히셨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상상력의 도착을 통하여 돈을 벌려는 한 산업이 발달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생산되는 선정적인 영화와 책들은 그리스도인 생활과는 도무지 부합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불법적인 관계들을 조장할 뿐 아니라 남녀를 단순한 성적 대상물로 저하시키며, 그리하여 성의 참된 의미를 곡해시키고 하나님의 형상을 흐려버린다. 그리스도인들은 순결한 생각을 하고 순수한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는데. 이는 그들이 영원한 세대를 통하여 순결한 사회에서 살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친 상간. 어떤 부모들은 저희 자녀들에 대한 건전한 애정의 표현을 구분 짓는 경계선을 넘어가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그들과 너무 친밀하게 된다. 종종 정상적인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무시되고 자녀 중 하나가 배우자의 역할을 하도록 선택될 때 이와 같은 결과가 나타난다. 이같이 경계를 침범해서 더럽히는 일은 형제 자매들과 다른 가족들 사이에도 일어날 수 있다.
구약에서 근친 상간은 금지되었으며(레 18:6-29; 신 27:20-23) 신약에서는 정죄되었다(고전 5:1-5). 이같은 유의 성적 남용은 자녀의 성적 발달을 손상시키며 훗날의 결혼 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수치와 죄의식의 부당한 짐을 지우게 된다. 부모들이 그러한 경계선을 침범하게 될 때, 과들은 자녀의 신뢰심의 계발-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매우 중대한-에 손상을 입힌다.

이혼. 예수께서 하신 다음의 진술은 이혼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요약한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 막 10:7-9). 결혼은 하나님께서 신성하게 하셨기 때문에 거룩하다. 궁극적으로 남편과 아내를 연합시켜 주는 것은 단순한 인간의 말이나 성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와 같이 그들의 연합에 날인하신 분은 그분이시다. 그러므로 이혼과 재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이해는 성경상 근거 위에 기초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진술은 이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이해를 단단히 규정짓는 기본적인 성경상 원칙들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 되도록 의도하셨다. 바리새인들이 결혼 생활의 불화가 이혼의 충분한 사유가 되는지를 그분께 문의했을 때, 그분께서는 에덴의 모범적인 결혼은, 영구적인 연합임을 확증하셨다. 그들이 이혼에 관한 모세의 법에 대하여 더 구체적인 대답을 재촉했을 때, 그분께서는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하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 19:8)고 대답하셨다. 그분께서는 계속해서 이흔의 유일한 합법적 사유는 음행뿐이라고 규정하셨다(마 5:32, 19:9).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그분의 대답은, 예수께서는 성실성에 대해 그들보다도 훨씬 더 깊은 이해력을 가지고 계셨음을 분명히 한다. 그분께서는 말씀하신 바와 구약과 신약에서 결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원칙으로부터, 하나님께서는 결혼하는 사람들이 영구한 연합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도록 계획하신다는 사실을 확증할 수 있다.
한쪽 배우자가 불성실하다고 해서 결혼이 반드시 이혼으로 끝나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십자가의 방법은 쓴 뿌리를 없애 버림으로 깊은 회개와 용서를 촉구하는 것이다. 간음을 했을 경우에라도 용서와 하나님의 화해시키는 능력을 통하여, 상처를 받은 배우자는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본래 의도하셨던 목적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간음이 다른 어떤 죄보다도 그대들의 결혼 생활에 더 파괴적인 요소가 될 필요는 없다… 그대들이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고 또 그대들의 부정적인 태도를 버릴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더 기꺼이 그대들을 고쳐주실 것이며 서로에 대한 그대들의 사랑을 새롭게 해주실 것이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은 사랑의 영구한 연합이 한쪽 배우자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지만, 때로는 배우자나 아이들에 대한 육체적인 학대와 같은 행위 때문에 합법적인 별거가 필요되기도 한다. 어떤 민사 재판권에서는 그와 같은 별거가 이혼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는데, 이 같은 환경 하에서는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결혼 서약에 대한 불성실’이 게재되지 않은 그와 같은 별거나 이혼의 경우, 그 기간 동안에 상대방이 재혼했거나 간음이나 간통을 했거나 또는 죽어서 세상을 떠나지 않는 한, 그 어느 쪽에도 재혼할 수 있는 성경상 권리가 부여되지 않는다.”*
결혼은 신성한 제도이기 때문에, 교회는 이혼을 방지하며, 혹 이혼이 발생하였을 경우에는 가능한 한 빨리 그 상처를 치유해야 할 특별하고도 엄숙한 책임이 있다.

동성애. 하나님께서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르지만 상호 보완이 되도록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창조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그들의 성적 감정이 이성(理性)에게로 향하게 하셨다. 사람의 특징을 이루는, 차이나게 하면서도 연결시키는 힘은 완전한 관계를 이루기 위하여 두 성을 서로에게 끌어당기는 매력을 통해서 나타난다.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죄가 이같은 기본적인 성적 경향에까지 영향을 미쳐 성도착이라는 현상까지 일으킨다. 그럴 경우, 이성에 이끌리는 자연적인 성적 경향은 도착(倒錯)되어 기본적인 성적 경향이 동성의 사람에게로 이끌리는 현상을 나타낸다.
성경은 동성애 행위를 부정적인 말로써 강력하게 비난한다(창 19:4-10; 유 7, 8; 레 18:22, 20:13; 롬 1:26-28; 딤전 1:8-10 참조). 이 같은 행위는 남녀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심각하게 왜곡시킨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롬 3:23)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무질서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을 구속적(救贖的)인 태도로 취급할 것이다. 그들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에게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태도를 나타낼 것이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 동성애의 경향을 지닌 자들 뿐만 아니라 불안과 수치와 죄의식을 일으키는 행동이나 관계에 빠져든 모든 사람들은 잘 훈련되고 경험 있는 그리스도인 카운셀러와의 상담이 필요하다. 그 어떤 행동도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은혜가 미치지 못하는 범위에 있지는 않다.*

가정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세상을 다스릴 지배권을 주셨다(창 1:26, 2:15). 그들은 첫 가정과 첫 교회를 이루었으며, 사회의 효시가 되었다. 그와 같이 사회는 결혼과 가정을 기초로 건설되었다. 그들은 땅에 거하는 유일한 인간 거주자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고 그들에게 명령 하셨다.
세계의 인구 통계가 가리키는 바로는 더 이상 사람으로 채워지고 정복되어야 할,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은 없다. 그러나 자녀를 낳아서 세상에 내보내고자 하는 결혼한 그리스도인 부부들은 주님의 양육 방법과 훈계로 저희 자녀들을 길러야 할 의무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 결혼한 부부는 그 일에 착수하기 전에 가정을 위한 하나님의 이상을 숙고해야 한다.

부모
1. 아버지. 성경은 남편과 아버지에게 가정의 머리와 제사장이 되는 책임을 부여하였다(골 3:18-21; 벧전 3:1-8). 그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이 된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3-28).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남편과 아내를 인도하심에 따라 “양자는 서로 양보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양심의 문제가 아닌 바에는 ‘남편에게 판단의 우선권을 부여한다.'”* 동시에 그는 아내의 개성을 최고로 존중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종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부드러운 통치자의 정신을 나타내셨듯이 남편도 희생적으로 가정을 인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지혜와 사랑의 통치이다. 남편들이 자기 아내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다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대하여 사용하시는 것과 똑같은 부드러움을 가지고 권위를 행사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께서 남편을 지배하실 때, 아내의 복종은 오직 안식과 유익만을 가져올 것이다. 왜냐하면 남편은 아내에게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복종을 요구하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유익한 결과를 낳게 될 것만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남편 된 자들로 하여금 아내의 복종이 얼마나 완전해야 하는지를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할 수 있으며, 순결하고 세련되며, 그의 가정의 주가 되기에 적합하게 될 수 있는지를 발견하도록 그리스도의 말씀을 연구하게 하라.”*
아브라함처럼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아버지는 하루가 시작될 때, 가족들을 주위에 모으고 그들을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맡길 것이다. 저녁에는 가족들로 하여금 그분께서 베풀어주신 축복들에 대하여 그분께 찬양하고 감사하도록 인도할 것이다. 이와 같은 가족 예배는 붙들어매는 끈이 되며 가정에서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는 시간이 될 것이다.*
현명한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자녀는 아버지로부터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 하나님에 대한 사랑, 기도의 중요성, 타인에 대한 사랑, 일하는 방법, 겸손, 자연과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물에 대한 사랑과 같은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아버지가 집에 없다면, 자녀는 이 같은 특권과 기쁨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2. 어머니. 어머니가 되는 일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역하게 되는 가장 가까운 일이다. “보좌에 앉은 임금의 직무가 어머니의 직무보다 더 높지 않다. 어머니는 가정의 여왕이다. 어머니는 자녀들의 품성을 꼴지어서 더욱 고상하고 죽지 않을 생명에 합당하게 하는 능력을 가졌다. 천사도 이보다 높은 사명을 구할 수 없으니 대개 어머니는 이 일을 함으로 하나님께 봉사하는 까닭이다… 어머니로 하여금 자기의 직무의 가치를 인식하여 세상의 표준을 따르려는 유혹을 대항할 수 있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게 하라. 그의 직무는 현세와 영원한 나라를 위한 것이다.”*
가족내의 누군가가 자녀의 품성에 대하여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자녀를 훈련하는 일은 아무렇게나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대신 맡길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자녀에 대하여 그의 부모와 똑같은 심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머니를 창조하시되, 자신의 몸 안에 아이를 배고 젖을 빨리며 아이를 양육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심각한 재정적 부담을 안고 있거나 홀로 된 경우를 제외하고,* 만일 어머니가 자녀의 양육을 맡게 될 것 같으면, 그는 진종일 자녀와 함께 머무를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어머니는 영원을 위해 품성을 꼴짓는 일에서 창조주와 함께 일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상호 관계의 필요에 따라 어떤 사람은 가정을 천직으로 간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머니와 아내가 되는 것을 천직이요 매우 보람된 과업으로 여기는 일이 20세기에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희귀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일은 노력의 낭비인가?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일인가? 볼품 없는 노예인가? 아니다 그것은 조류(潮流)를 되돌이키며 종족(種族)을 이어주고 역사에 영향을 미치며 끊임없이 확산되는 파문이 되어 감지되고 칭송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가장 보람찬 일이다.”*
구약 시대에는 사람의 이름이 그 이름의 주인공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되었다. 하와는 타락한 이후에 그의 이름을 받았다(창 3:20). 그는 모든 인간의 어머니가 되어야 하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히브리어로 하와(chawwah)]은 “삶”[히브리어로 하이(chay)]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놀랄 만큼 영예로운 지위를 나타낸다.
출산이 아담이나 하와 둘 중에 누구 혼자서 누릴 수 있는 배타적인 권리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양육하는 일도 그러하였다. 자녀를 양육하는 일도 그 책임을 공유해야 하였다. 그러므로 자녀를 낳는 일에서뿐만 아니라 그들을 양육하는 일은 지금도 부모 둘 다의 책임이다. 부모 양편은 각각 일정한 책임이 있으며 그 책임은 주님께 하듯이 실천되어야 한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

자녀
1. 우선적인 일. 주님과 그들의 배우자에게 한 서약 외에는 저들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자녀들에 대해서보다도 부모가 더 크게 책임을 져야 할 일은 없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진보와 안락보다는 저희 자녀들의 유익을 앞세워야 한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세상에 나오고자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인생에서 가능한 한 가장 좋은 출발을 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부모의 감화력이 자녀의 영적·정신적·육체적 건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녀의 복리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일이 출산 전부터라도 시작되어야 한다.*
2. 사랑.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이어야 한다. 비록 부모의 사랑이 완전히 보답되지는 못할지라도, 자녀들은 일생을 통해 훌륭한 자화상과 건강한 정서를 갖겠끔 부로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사랑을 획득해야 하거나 자신이 거부되고 중요치 않게 취급된다고 느끼는 자녀들은 깊이 스며들어 습관이 되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통하여 부모의 사랑을 얼어내려고 애쓸 것이다”*
부모의 사랑 가운데 염려없이 자라는 자녀들은 구김살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아갈 것이다. 그들은 받는 법뿐만 아니라 주는 법과 자신 외에도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자녀들은 자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3. 봉헌.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기능한 한 생애의 초기에 저희 자녀들을 하나님께 바쳐야한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은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주님께 바친(눅 2:22-37)것과 매우 흡사하게 회중 앞에서 기도로써 저희 자녀를 하나님께 드리는 간단한 예식으로써 그와 같이 봉헌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자녀는 확장된 영적 가족의 일원으로서 생애를 시작한다. 회중들은 어린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으로서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하는 일에 참여한다.
부모는 또한 이같은 예식을 통해 자녀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형성되도록 주님의 방법대로 자녀를 교육시키고자 스스로 헌신한다.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부모는 어린 자녀가 생애의 초기부터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도록 저희 자녀들을 안식일학교와 교회에 정규적으로 데려올 것이다. 그런 다음, 자녀가 학령기에 달하면 부모와 교회는 주님에 대한 자녀의 사랑을 더욱 심화시켜 줄 그리스도인 교육을 그가 받을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4. 부단성. 부모들이 가르치는 영적 교훈은 자녀의 생애의 모든 국면과 관계가 있는 계속적인 과정이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7-9, 11:18).
자녀는 가정의 전체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다. 부모는 가정 예배만으로는 영성을 전달할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계속적으로 신뢰하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즉 그것은 그들의 생활 방식과 의복과 심지어는 가정의 장식을 통해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을 자애로운 부모로 인식하는 것은 자녀의 그리스도인 성장에 중요하다.
5. 순종을 배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이 같은 훈육에는 무엇이 수반되는가? 훈육에는 처벌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들이 포함된다. 처벌은 대개 지난 일을 취급하지만, 훈육은 미래 지향적이다. 혼육은 어린 자녀가 훈련과 지도와 모본을 통해 어른이 되는 견습을 받는 제자가 되는 과정이다. 그것은 충성, 진실, 공평, 일관성, 인내, 질서, 자비, 관대함 및 직업과 같은 중요한 원칙들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자녀들이 일찍부터 저희 부모들을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될 때 일생 동안 권위 때문에 그들에게 문제가 발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유의 순종을 배우느냐가 중요하다. 참된 순종은 단순히 그것이 요구되기 때문이 아니라 내부에서 우러나서 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순종의 비결은 새로남에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다만 의무감으로만-하나님께서 지키기를 요구하시니까-지키는 자는 결코 순종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사실상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참된 순종은 마음속의 원칙을 따라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의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데서 생긴다. 모든 의의 진수는 우리 구주에 대한 충의(忠義)이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의를 행하게 할 것이니 이는 그것이 옳은 일이고, 또한 옳은 일을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이기 때문이다.”*
6. 사회화와 언어 개발. 자녀는 가정에서 그것에 수반되는 모든 책임과 특권과 더불어 인간의 일원으로서 사회화된다. 사회화는 자녀들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회 속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본적인 기술을 배우는 과정이다. 의사소통의 온갖 뉘앙스를 지닌 언어는 자녀가 배우는 첫 번째 기능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그것이 하나님의 품성을 나타내도록 조심스럽게 조정되어야 한다. 자녀는 가족 가운데서 즐거운 나머지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애정의 표현과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을 자주 들어야 한다.
7. 성의 확인. 자녀들이 사회 속에서 남성이나 여성으로서 활동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전체 가족 제도의 골간이 되는 남성과 여성의 건전한 교제를 통해서이다. 어른들은 올바르고 적절한 정보를 통해 성(性)의 계발에 따르는 아름다움을 자녀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 자녀들을 성의 남용으로부터 보호하는 일 또한 그들의 책임이다.
8. 가치관을 배움. 사회성을 계발시키는 가정의 기본적인 기능은 가족들이 추구하는 가치관에 동화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가족의 가치관과 종교적 개념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들이 어떤 종교적 원칙들을 고수하도록 주장할 수 있으나, 그들이 자녀 앞에 예시하는 가치관들은 그 같은 원칙들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부모들의 일관성은 중요하다.

교회 가족.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결혼은 배타적이다. 그러나 가족은 그렇지 않다. 고도의 이동 사회에서는 대가족-조부모와 형제 자매와 사촌들이 모두 가까이 살고 있는-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교회 가족은 친척들과 떨어져 있거나 친척들이 없는 사람들이 가치와 소속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또한 홀로 된 부모들은 이곳에서 저희 자녀들을 사랑과 부드러운 애정으로 양육할 수 있는 안락한 장소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정에서 결핍될 수 있는 적절한 역할을 제공할 수 있다.
회중 가운데 있는 나이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움으로, 자녀들은 존경심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나이 든 사람들은 사랑하고 귀여워할 수 있는 어린 자녀를 갖는 만족감을 맛볼 수 있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 71:18). 하나님께서는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요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 16:31),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사 46:4)고 말씀하심으로써 나이든 사람들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신다.
독신자들은 교회에서 사랑과 존중히 여김을 받고 또한 그들의 사랑과 활력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특별한 장소를 발견할 수 있다. 교회의 봉사를 통하여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깨닫게 된다.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렘 31:3).
도움이 필요 되는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더러움이 없는 경건”의 한 부분이다(약 1:27; 출 22:22; 신 24:17, 26:12; 잠 23:10; 사 1:17). 교회 가족은 가족이 없는 자들에게 안식처와 피난처와 소속감을 주는 장소를 마련해 줄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갖고 있다. 교회 가족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그리스도교 자체의 표가 될 수 있는 특별한 연합(요 17:20-23)으로 각 교인들을 포용할 수 있다.

돌이킴
가정은 교회와 사회의 핵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가정은 그 자체가 주님을 위해 가족들을 구원하고 붙드는 도구가 될 것이다. 구약의 바로 마지막 말씀은 주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 4:5, 6). 오늘날 많은 세력들이 가족들을 가정으로부터 끌어내려고 꾀하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재연합과 재단결과 돌이킴과 회복을 호소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의 호소에 응하는 가정들은 참 그리스도교를 드러낼 힘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가정들로 구성된 교회는 성장할 것이며, 그들의 젊은이들은 떠나가지 않을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모습을 세상에 분명하게 드러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