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8일 화요일 장년 교과]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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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성령을 욕되게 하는 죄에 대해서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가르쳤다.

히브리서 6:4~6의 경고는 히브리서 10:26~29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경고와 매우 유사하다. 바울은 예수님 외에는 죄를 용서할 다른 어떤 방법도 없음을 반복해서 말한다.(히 10:1~14).

히브리서 10:26~29을 읽어 보라. 저자는 용서함이 없는 죄에 대하여 어떤 세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는가?

바울이 진리에 관한 지식을 얻은 후에 지은 모든 죄에 대하여 속죄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대언자로(요일 2:1) 세우셨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죄의 용서를 경험한다(요일 1:9).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는 죄는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히 10:29). 이 세 가지 표현의 의미를 다시 확인해 보도록 하자.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다(히 10:29)는 것은 예수님의 법을 거절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독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시고 그분의 원수들을 그분의 “발등상”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게 한다(히 1:13, 참조, 히 1:5~12, 14). 예수님을 짓밟는다는 것은 배교자가 예수님을 원수로 여겼음을 암시한다. 히브리서가 설명하는 문맥에서 볼 때(히 1:13), 배교자의 삶 속에서 예수님은 보좌에서 끌어내림을 당하시고 대신 자신이 그 보좌에 앉아 예수님을 발등상으로 삼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루시퍼가 하늘에서 하고자 했던 것이었으며(사 14:12~14), 미래에 “불법의 사람”이 행하려고 하는 일이다(살후 2:3, 4).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라는 말은 예수님의 희생을 거절하는 것을 나타낸다(히 9:15~22). 이 말은 예수님의 피에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없다고 여긴다는 의미다.

<묵상>
오늘의 주제 성구(히 10:26~29)를 다시 한번 묵상하면서 혹시 내가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어서)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다는 것은 매우 강력한 표현이다. 헬라어로 욕되게 하다(enybrisas)라는 단어는 무례함 또는 거만함, 오만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은혜의 성령”이라고 묘사되어 있는 성령님과 현저한 대조를 보인다. 이것은 배교자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에 모욕으로 반응했음을 의미한다.
배교자는 어떻게 해서도 정당화되거나 옹호받을 수 없는 위치에 서 있다. 그는 예수님과 그분의 희생, 그리고 성령님을 거절한 자이다.

<교훈>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성령을 욕되게 하는 죄에 대해서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가르쳤다.

<적용>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관해 먼저 빛을 받은 자들로서 그런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진심으로 도울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마지막 방편이 끝남 –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나타내심으로 죄인들을 책망하시고 죄를 깨닫게 하신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마침내 거절당하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 영혼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실 수 없으시다. 하나님의 긍휼의 마지막 방편이 끝난 것이다. 범죄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지고 죄는 그 자체를 치유할 방법이 없다. 그 이상 더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남아 있지 않다”(부조와 선지자, 405).

<기도>
오늘 교과에서 언급된 죄들을 저의 삶 속에서 짓지는 않았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저를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을 귀하게 여기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