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수요일 예수바라기] 가이오와 디오드레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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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1, 2)

삼중 복음?

2절은 소위 삼중 복음이라는 어느 한 유명 교회의 부흥을 이끌었던 구절입니다. 영적 축복, 육적 축복, 건강의 축복이 함께하는 전인적 삼중 복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12사도들은 이런 축복을 누리지 않았습니다. 이 말을 한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가 가장 사모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자신도 아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주님과 함께 고난받는 것이 가장 큰 영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이 소위 삼중 복음 혹은 삼중 축복을 말하는 것인지는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대적으로는 실제적인 서로 사랑을 행하지 않고 개인적인 영적 고양을 목표로 했던 유대 영지주의에 대한 반대의 의미가 가장 정확할 것입니다.

문맥적으로는 사도 요한은 가이오가 진리를 증거하고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요삼 1:3). 그가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 안에서 순종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가이오는 이 진리에 따라 자신이 받은 사랑을 증거 하였고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특히 요한이서에서 말한 미혹하는 자들을 삼가라는 말을 확대해서 아무도 돌보지 않은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잘 분별하여 복음을 전하는 나그네들을 영접하였습니다(5-8절). 그는 사랑받고 사랑하는 존재이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은 양쪽에서 태양을 느끼는 것입니다”(데이비스 비스코트). 2절의 사도 요한의 간구는 요한서신의 일관성 있는 간구 즉 진리 안에서 사랑받고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디오드레베

디오드레베는 이와 반대로 자신이 으뜸이기를 좋아해서 기별을 전하는 형제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형제들을 비방하고 다른 교인들에게도 형제들을 맞이하는 일을 금하였고 그들을 교회에서 내쫓았습니다(9-10절).

우리도 이단을 금한다는 명목으로 혹은 교회를 위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일은 악하며 그렇게 하면 하나님을 뵙지 못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11절). 주님은 우리가 범사에 이웃을 사랑하고 굳건하기를 간구하십니다.

오늘 저와 성도들이 마음으로 사랑할 뿐 아니라 범사에 사랑하고 굳건하기를 주께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