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3일 월요일 예수바라기] 회개의 방향, 슬픔의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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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삼하 19:4).

무엇을 슬퍼해야 하나?

다윗은 죽은 아들 압살롬을 위해 슬피 울었습니다. 다윗은 무엇이 그렇게 슬펐을까요?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기 때문일까요? 그는 장자 암논이 죽었을 때와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나은 첫아들이 죽었을 때는 이 정도까지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아들들보다 압살롬을 더 사랑했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다윗은 아들의 죽음에서 자신의 잘못을 보았기에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극은 부자지간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온 이스라엘로 확대된 비극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를 휩쓴 이 비극에 대해서도 회개해야만 하였습니다. 이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집의 자녀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랬었다면 아들 압살롬을 위해 슬퍼하는 일과 다윗의 신하들이 위로하는 일 사이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위해서는 조금은 개인적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서는 좀 더 공개적으로 슬퍼하며 회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나라의 회복을 위해서 더 좋았을 것입니다.

요압은 잘했나?

요압은 다윗에게 그만 슬퍼하라고 조언하였습니다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6, 7절). 이 간언은 기록된 요압의 말 중에서 가장 긴 문장일 것입니다. 그는 현실적인 상황에 신속히 대처할 것을 다윗에게 주문하였습니다.

요압은 바로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면 지금까지 당한 어떤 화보다 더 큰 화가 다윗 왕에게 임할 것이라고 협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바로 나서자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는 회개의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한 다윗은 여러 일에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요압은 슬픔의 깊이도, 무엇을 회개해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눈앞의 현실만을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올바른 슬픔과 올바른 회개로 다윗을 이끄는 간언을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기도) 올바로 슬퍼하고 올바로 회개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