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회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대총회 가운데 하나였던 1888년 미니애폴리 스 대총회는 엘렌 화잇의 오랜 봉사 기간에서 주된 이정표이기도 했다.
1880년까지 재림교회는 40년 동안 안식일,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의 상태, 성소 기별 등과 같은 독특한 교리들을 전파하는 일을 잘 담당해 왔다. 그러나 독 특하게 재림교회적인 것을 드높이는 과정에서 교회는 기타 교단들과 공유하는 그리스도와 구원에 관한 위대한 진리들을 전반적으로 소홀히 여겨왔다. 많은 재 림교인들에게 율법이 그리스도보다 더 중심적인 것이 되었고,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에 대한 강조(율법주의)가 두드러졌다.
이런 배경에서 비교적 젊은 설교자였던 E. J. 왜거너와 A. T. 존스(둘 모두 캘리 포니아 오클랜드에 있던 <싸인즈 오브 더 타임즈>의 편집자였음)는 1884년경부 터 한층 더 그리스도/믿음 중심적인 기별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새로운 강조 는, 그로 인해 안식일의 중요성이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한 조지 I. 버틀러(대총회장) 와 유라이어 스미쓰(대총회의 총무부장이자 <리뷰 앤드 헤럴드> 편집자)의 도전 을 받았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그 상황을 더 감정적으로 몰아갔다. 주 정부의 일요일 법 령이 시행되고 있었고, 1888년 5월에는 미국 상원 앞에 국가적인 일요일 법안이 제시되었다. 간단히 말해, 당시는 예언적으로 흥분된 시기였다. 바로 이런 격앙된 분위에서 왜거너가 갈라디아서의 율법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기 시작했고, 이에 버틀러는 이런 이해가 십계명을 제거하고자 하는 자들의 손에 이용당할까 보다 두려워했다. 또한 존스는 다니엘 7장의 열 뿔을 재해석하기 시작했고, 이에 스미쓰는 그런 해석이 교단의 종말론적 예언 해석을 모두 의혹으로 몰고 갈 것이
라고 생각했다.
교단의 지도자들이 심각하게 생각한 상황이 있었다. 1886년 6월을 시점으로 버틀러는 갈라디아서 이슈에 대하여 엘렌 화잇이 자신의 편을 들게 하려는 목적 으로 편지 쓰기 캠페인을 벌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 요구에 반응하기를 거부했다. 버틀러의 두 번째 움직임이 1886년 12월 대총회 회기 중에 일어났는데, 거기서 그는 열 뿔과 갈라디아서의 율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학 위원회를 구성했다. 버틀러의 최종적 전략은 그 젊은 설교자들을 침묵시키는 데 있었다. 이런 노선에 따라 1886년 회기는 존스와 왜거너를 겨냥한 결정을 통과시키고, 지도적인 목사 들이 새로운 가르침들을 조사하고 승인하기 전에는 아무도 재림교회에서 가르침 을 글로 제시하거나 교회의 학교들에서 가르치지 말라고 규정했다(RH, Dec. 14,
1886).
그러나 엘렌 화잇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존스와 왜거너가 불평등 한 투쟁에서 불공정하게 다뤄지고 있었고, 또한 그들이 교회가 들을 필요가 있는 기별을 갖고 있음을 보았다. 그 결과, 1887-1888년에 그녀는 교단의 지도층과 목 회자들에게 성경의 진리들에 마음을 열어 놓으라고 촉구했다. 이런 운동은 1888 년 8월 8일자 그녀의 회람편지에서 클라이맥스에 달했다. 그녀는 목사들이 “다른 이들의 입술”(예컨대, 유라이어 스미쓰나 조지 버틀러)에서 나온 신학적 견해를 단순히 받아들이기보단 성경을 스스로 연구함으로써 진리를 찾을 필요가 있음 을 확고히 했다. 또한 편지는 목사들이 서로를 대할 때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경고했다(Lt 20, 1888; 1888 Materials 40).
1888년 대총회는 미네소타 주의 미니애폴리스에서 10월 17일-11월 4일에 개최 되었다. 공식적 회의 일정이 있기 전, 10월 10-19일까지 목회자 협의회가 있었다. 목회자들 사이에 분열이 있었고 존스와 왜거너 문제가 토의할 주요 안건이었기 때문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정서적 압박이 너무 커 건강이 좋지 않은 버틀 러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캘리포니아 대표자들(존스, 왜거너, W. C. 화잇과 E. G. 화잇)이 교단의 신학을 바꾸려 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소문에 교회의 지도자들이 신뢰를 표명하면서, 그
런 음모설로 말미암아 회의들 자체와 그 회의들로 몰아간 사건들은 왜곡되었다. 그런 소문을 받아들임으로써 엘렌 화잇이 스미쓰/버틀러 파 가운데 있는 “바리 새인 정신” 또는 “미니애폴리스 정신”이라고 일컬은 것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 결 과, 엘렌 화잇이 염려했던 비(非)그리스도인 정신이 회의들을 망쳐놓았다. 예봉은 존스와 왜거너뿐 아니라, 이들의 그리스도 중심적 기별 및 그들의 전할 권리를 강 하게 지지했던 엘렌 화잇에게도 겨냥되었다. 그녀는 “내 삶의 경험 가운데 그 회 의에서처럼 취급받은 적이 없었다.”라고 적었다(Lt 7, 1888; 1888 Materials 187). 그 회의는 엘렌 화잇의 봉사에서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 위기는 재림교회 신학의 핵심 및 신학적 이슈를 다루는 방식과 관련되었다. 대총회 지도자자들은 교단에 어려움을 주는 신학적 이슈들을 전문가의 의견, 지 위라는 권위, 신조 같은 법령, 재림교회의 전통 같은 수단으로 풀려고 하였다. 그 러나 엘렌 화잇과 개혁적인 소수의 사람들은 매사에 성경적 답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버틀러와 그의 동료들은 이 논쟁에서 인간적 권위를 사용하여 그들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엘렌 화잇의 권위에 의존하여 성경 해석의 이슈를 풀고자 했다. 그 러나 그녀는 그런 접근을 거절하고, 성경 해석의 이슈를 해결해 주는 유일한 권 위인 성경으로 교단을 거듭거듭 돌이키고자 했다. 그녀는 자신의 글들이 갈라디 아서 율법의 이슈를 해결하기를 원치 않았다(참조 G. R. Knight, Angry Saints,
104-109).
엘렌 화잇은 미니애폴리스 대총회를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들을 이용하여, 거 듭거듭 성경의 위상을 높이고자 했다. 그녀는 “성경만이 신앙과 교리의 유일한 규 준이다.”라고 적었다(RH, July 17, 1888).
엘렌 화잇은 권위의 이슈와 관련하여 단지 대총회의 지도부에 항거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율법주의도 반대하고 나섰다. 1888년 회기 동안과 그 후 1890년대 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그리스도와 그분에 대한 구원하는 믿음을 재림교회 신학 의 중심적 위치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88년 10월 24일에 그녀는 대표자들 에게 이렇게 외쳤다. “저는 [재림교회의] 진리를 붙잡고자 했었던 귀한 영혼들이
돌아서 버린 것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예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래서 제가 지금껏 여러분에게 늘 이렇게 호소해 온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원하 고 있다’.”(1888 Materials 153). 또 다시 그녀는 재림교회에서 율법의 위치를 논하 면서 1890년에 재림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율법이 스 스로를 돌보게 하라. 우리는 길보아 산처럼 메말라 버릴 때까지 율법을 위해 일해 왔다.”(1888 Materials 557).
아마도 미니애폴리스 대총회를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들과 관련하여 그녀가 재 림교회의 신학적 이해에 끼친 주된 공헌은 셋째 천사 기별에서 차지하는 믿음으 로 말미암는 의의 자리에 관한 그녀의 입장이었을 것이다. 1888년 말에 그녀는 이 렇게 썼다. “셋째 천사의 기별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의 선포이다. 하나님 의 계명은 선포되어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재림교인들에 의해 동일하 게 중요한 것으로 선포되지 않았는데, 율법과 복음은 손을 맞잡고 가는 것이다.” 그녀는 계속하여 요한계시록 14:12에 나오는 “예수 믿음”을 논하면서, 그것에 대 해 “말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예수 믿음은 “예수가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구주가 되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 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 신 것은 우리가 의를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를 널리, 충분히, 온전히 구원 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곧 예수 믿음이다.” 재림교인들은 믿음으 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는 것이 필요했다(1888 Materials 217).
엘렌 화잇은 1895년의 시각으로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1888년 대총회의 의의 (意義)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이렇게 요약했다. “주님께서는 크신 자비를 베푸셔 서 왜거너와 존스 목사를 통해 그분의 백성들에게 지극히 소중한 기별을 보내셨 다. 이 기별은 높이 들림을 받으신 구주,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한 희생 제물이신 그 분을 세상 앞에 우뚝 세우는 것이었다. 그것은 보증물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제시하였다. 그것은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도록 초청했는 데, 그 의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난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 를 시야에서 잃어버렸다. 그들은 그분의 거룩한 인격, 공로, 인간 가족들을 위해
행하신 변함없는 사랑을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세 상에 전파하도록 명하신 기별이다. 이것은 셋째 천사의 기별이며, 이 기별은 큰소 리로 전파되고, 크나큰 성령의 부어지심이 수반될 것이다. …그분의 은혜의 복음 기별은 교회를 향해 분명하고도 명백한 모습으로 제시되어야 했다. 그렇게 함으 로 세상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율법, 율법만을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가 르치거나 믿지 않는다는 말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어야 한다.”(목사와 복음교역 자에게 보내는 증언, 91-92).
엘렌 화잇은 존스와 왜거너에 의해 전달된 복음 중심의 기별을 깊이 인정했지 만, 그렇다고 그들이 가르친 모든 것, 심지어는 1888년에 가르친 것을 모두 인정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들의 글과 그녀의 글을 비교하여 분석해 보면, 몇 가 지 중요한 신학적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참조 Knight, A User- friendly Guide, 73-77). 그러나 그녀는 그들이 그리스도 및 그분을 믿는 믿음을 통한 구원을 강조한 점에 대해서는 그들을 꾸준히 세워주었다.
1888년 회기의 여파로 재림교회 내의 권력에 변화가 일어났다. 버틀러와 스미 쓰는 그들의 지도력을 상실하고, 스미쓰가 결국 존스에게 <리뷰>지 편집자 자리 를 내주었다. 그러는 동안 존스와 왜거너가 1890년대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가 되었고, 사실상 향후 10년 동안 대총회 회기의 모든 성경 연구 모임을 이끌었다.
또한 1888년 회기는 엘렌 화잇의 봉사에서 전환점을 이뤘다. 1890년 초반에 그 녀는 존스 및 왜거너와 팀을 이루어,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의 기별을 교회에 전 했다. 그녀의 문필 봉사도 그리스도께 더욱 초점을 맞춤에 따라 급진적인 변화 를 겪었다. 1888년 후에 그녀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저작들을 출판했 다: <정로의 계단>(1892년), <산상보훈>(1896년), <시대의 소망>(1898년), <실물교 훈>(1900년), <치료봉사>의 시작하는 장들(1905년). 그녀는 자신의 삶이 다할 때 까지 1888년에 부각된 그리스도를 계속 드높였다.
불행히도, 1950년대와 그 후에 1888년 대총회 회기와 관련된 몇몇 가르침이 일 어났는데, 그것들은 엘렌 화잇이 존스와 왜거너가 가르친 거의 모든 것을 승인했
다는 가정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이런 새로운 견해들은 일반적으로 존스와 왜거 너의 개념들을 자신들의 신학적 원천으로 삼았는데, 심지어는 그들의 개념들이 성경과 엘렌 화잇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닐 때도 그렇게 했다. 엘렌 화잇이 존스와 왜거너의 어떤 점을 지지하는지를 보려면, 1890년대에 심각한 신학적 탈선을 조장한 이 두 사람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 는, 1888년 이후에 기록된 구원과 그리스도에 관한 그녀의 책들 및 <목회자와 복 음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91-94에서 존스와 왜거너의 기여에 대해 그녀가 내 린 요약적 평가를 먼저 보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다.
-Geroge R. Kn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