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남은 자손과 그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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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교회는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었지만, 마지막 시대 즉 배도가 만연한 시대에, 한 남은 자손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도록 불러냄을 받았다. 이 남은 자손은 심판의 때가 이르렀음을 알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전하고, 그분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선포한다. 이 선포는 요한계시록14장에 세 천사로 상징되어 있다. 그것은 하늘에서 심판하시는 사업과 동시에 일어나며, 땅 위에서 회개와 개혁 사업을 완수한다. 모든 신자들은 이 전 세계적인 증거 활동에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요청을 받고 있다. -기본 신조, 13.

큰 붉은 용이 기다리며 도사리고 있다. 이미 그는 하늘 천사들의 삼분지 일을 떨어뜨렸다(계 12:4, 7-9), 이제 막 태어나려는 아이를 삼켜버릴 수만 있다면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다.
그 앞에 서 있는 여인은 해를 옷 입고 발 아래는 달이 있고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다. 이 여자가 낳을 이 남자아이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자이다.
그 용은 그 남자아이를 죽이려고 달려 들었지만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반면에, 그 아이는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갔다. 격노한 용은 그 어머니에 대하여 그의 진노를 쏟지만, 그 어머니는 기적적으로 주어진 날개를 받아 하나님께서 특별히 예비하신 먼 곳으로 옳겨지고, 하나님께서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즉 3년 반 혹은 1,260 예언적 날들 동안 그 여인을 양육하신다(계 12:1-6, 13, 14).
성서 예언에서 순결한 여인은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교회를 표상한다.* 음행자 혹은 간음자로 묘사된 여인은 배도한 하나님의 백성을 표상한다(겔 16; 사 57:8; 렘 31:4, 5; 호 1:3; 계 17:1-5).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큰 용은 남자 아이, 즉 오랫동안 고대하던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삼키려고 기다리고있었다. 그의 철천지 원수인 예수와 맞서 싸울 때 사단은 로마 제국을 그의 도구로 사용했다. 어떤 것도, 심지어 십자가에서의 죽음까지도 예수님에게 인류의 구주로서의 당신의 사명을 단념시킬 수 없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사단을 꺾으셨다. 십자가에 못 박힘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고 말씀하셨다. 요한계시록은 하늘의 승리의 찬가를 기술하고 있다.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계 12:10-12).
하늘에서 추방된 사단은 그의 활동에 제한을 받았다. 더 이상 사단은 하늘의 존재들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비난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늘은 즐거워하지만, 지상은 경고를 받아야 하였다.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매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 갔음이라”(계 12:12).
분풀이를 하기 위해 사단은 여인 즉 교회(계 12:13)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극심한 환난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았다. 인구가 희박한 지역인 “광야”는 1,260 예언적 날들 혹은 1,260년 동안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였다(계 12:14-16; 본서 4장 44페이지의 연-일 원칙을 참조).*
이 광야의 경험이 끝난 후,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의 징조에 반응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출현한다. 요한은 이 충성된 무리들의 신원을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계 12:17)로 밝힌다. 마귀는 특별히 이 남은 자손을 증오한다(계 12:17).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 박해가 일어났는가? 언제 남은 무리가 출현하기 시작했는가? 그들의 사명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성경과 역사를 둘 다 연구해야한다.

대 배도
그리스도교의 박해는 맨 처음 이교 로마에 의해서, 그 다음에는 교회 내의 배도에 의하여 일어났다. 이 배도는 전혀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요한과 바울과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것을 예언하셨던 것이다.
당신의 마지막 주요 설교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닥쳐올 기만에 대하여 경고하셨다.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4, 24)고 말씀하셨다. 그분을 따르는 자들은 “큰 환난”의 기간을 경험할 것이지만 살아 남을 것이다(마 24:21, 22). 천연계의 인상적인 징조들이 박해가 끝났음을 알릴 것이며 그리스도의 재 강림이 가까움을 알릴 것이다(마 24:29, 32, 33).
바울도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행 20:29, 30)라고 경고하였다. 이 “이리들”은 교회를 “배도”로 혹은 “떨어져 나가게” 인도할 것이었다.
이 배도는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바울은 말했다. 그것은 너무도 확실했기 때문에, 그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강림이 아직은 임박하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그는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 2:3, 4)고 말하였다.
심지어 바울의 시대 동안에도 이 배도는 제한적이기는 하였지만 이미 활동하고 있었다. 그의 활동 방법은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하는 사단적인 것이었다(살후 2:9, 10). 첫 세기가 끝나기 전, 요한은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다고 진술한다. 참으로, 그는 “적 그리스도의 영”이”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1, 3)고 말했다.
이 배도한 조직체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

“불법의 사람”의 지배권. “첫사랑”(계 2:4)을 떠났을 때, 교회는 그 교리의 순결성, 개인적 행위의 높은 표준 그리고 성령께서 마련하신 보이지 않는 연합의 결속을 상실했다. 예배에서 형식주의가 단순성을 대신했다. 지도자들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인기와 개인의 권세가 점점 더 중시되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지방 교회 내에서 점점 더 세력을 확보하였고, 그리고 나서 이웃교회들에게까지 그들의 권위를 확장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있는 지방 교회의 행정은 한 사람의 임원 즉, 주교(감독)의 장악하에 있는 교회의 권위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모든 교회의 교인들은 개인적으로 그에게 복종해야 하였고 그를 통해서만 구원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 때 이후 지도자들은 교회를 섬기는 대신 다스리는 것만을 생각했고, ‘가장 큰 자’는 더 이상 자신을 ‘모든 사람의 종’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와 같이 점진적으로 개인과 하나님 사이에 끼어든 사제의 성직자 계급 제도의 개념이 발전되었다.”*
개인과 지방 교회의 중요성이 감소되어가면서, 로마의 주교는 기독교의 최고 권세로 부상했다. 황제의 도움을 받아 이 최고의 주교 혹은 교황은* 전 세계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을 능가하는 최고의 권세를 부여받은, 전 세계 교회의 가시적 수령으로 인정을 받았다.
교황권*의 지도 아래서 그리스도 교회는 더한층 깊은 배도에 빠져들었다. 교회 인기의 계속적인 상승이 타락을 가속화시켰다. 회심하지 않은 자들이 교회 내에서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표준들이 낮아졌다. 진정한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하는 수많은 무리들이 명목상으로만 교회에 참여하였고 그들이 믿던 이교의 교리들과 우상들과 예배의 방식들과 의식과 축제들과 상징들을 함께 가지고 들어왔다.
이같은 이교주의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타협은 결국 “불법의 사람”, 즉, 진리와 오류의 혼합체인 거대한 거짓 종교 제도의 형성을 가져왔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예언은 개인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대 배도에 책임이 있는 그 종교제도를 폭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제도 내의많은 신자들은 하나님의 보편적 교회에 속해있는 바 이는 그들이 받은 모든 빛에 따라서 살기 때문이다.

고통 당하는 교회. 영성의 쇠퇴와 더불어 로마교회는 황제의 정부와 더 밀접한 유대를 갖는 한층 더 세속적인 측면을 발전시켰다.
가장 영항력이 큰 교부 중의 하나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는 그의 고전 “하나님의 도성(神市)”에서 전 세계 국가를 다스리는 보편적 교회라는 카톨릭의 이상을 제시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은 중세 교황권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
서기 533년, 유스티니아누스 법전(Justinian Code)에 포함된 한 편지에서 유스티니아누스 Justinian) 황제는 로마의 주교를 모든 교회의 수령으로 선포했다.* 그는 또한 이단자들을 뿌리뽑는 데 있어서 교황의 영향력을 인정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장군 벨리사리우스(Belisarius)가 서기 538년에 로마를 해방시켰을 때 카톨릭교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아리아스 주의를 신봉하던 동고트족(Ostrogoths)의 통제에서 로마 주교를 해방시켰다. 이제 비로소 그 주교는 서기 533년의 유스티니아누스의 포고령이 그에게 부여했던 대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교황청”(Holy See)의 권세를 증가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성경에 예언한 대로 1,260년 간의 박해가 시작되었다(단 7:25; 계 12:6, 14, 13:5-7).
비극적이게도 교회는 국가의 도움을 받아 그의 교령(敎令)과 가르침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강요하려 했다. 많은 사람들이 박해가 두려워 그들의 신념을 포기하였지만 성서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사람들은 혹심한 박해를 겪었다. 그리스도교계는 하나의 전장(戰場)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 투옥되거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처형을 당했다! 1,260년간의 박해 기간 동안 수백만의 충성스러운 신도들이 큰 고통을 겪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충성의 대가를 죽음으로 치렀다.*
흘려진 핏방울 하나 하나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오점을 남겼다. 이 무모한 박해보다 그리스도교 사업에 더 해를 끼친 것은 없다. 교회가 취한 이러한 행위들과, 연옥과 영원한 고통의 교리가 끼친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매우 왜곡된 견해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교도 한데 묶어 배척하도록 만들었다.
개신교 종교 개혁이 있기 오래 전에 카톨릭 교회 내에서 여러 목소리들이 반대자에 대한교회의 무자비한 학살과 그 거만한 주장들과 타락시키는 부패상에 대하여 항의를 제기하였다. 개혁을 거부하는 교회의 태도는 16세기에 개신교 종교 개혁을 탄생시켰다. 그 성공은 로마교회의 권위와 위신에 일대 타격을 가했다. 교황권은 반(反) 종교 개혁을 통해 개신교 종교개혁을 분쇄하려는 피 비린내나는 투쟁을 전개하였지만 사회적, 종교적 자유를 위해 분투하는 세력들과의 싸움에서 점차로 패배하였다.
마침내, 서기 538년으로부터 1,260년이 지난 1,798년에 로마 카톨릭교회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계 13:3 참조).* 교황은 나폴레옹의 군대가 이탈리아에서 거둔 혁혁한 승리로 말미암아 로마교를 “공화국”의 화해할 수 없는 적으로 간주하는 프랑스 혁명 정부의 처분만 바라는 속절없는 신세가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나폴레옹에게 교황을 사로잡도록 지시했다. 나폴레옹의 명령을 받은 베르띠에(Alexander Berthier) 장군은 로마에 입성하여 교황권의 정치적 통치가 끝났음을 선언했다. 베르띠에는 교황을 사로잡아 프랑스로 끌고 갔으며, 그는 유배 중에 사망했다.*
교황권의 전복은 그 점진적 쇠퇴와 연관되어있는 일련의 긴 사건들의 절정이었다. 그 사건은 1,260년의 예언적 기간의 종언을 고했다. 많은 개신교도들은 이 사건을 예언의 성취로 해석했다.*

종교 개혁
유전에 기초된 비성서적 교리들, 반대자에 대한 잔인한 박해, 부패 그리고 많은 성직자들의 영적인 타락 등은 백성들로 하여금 기성 교회 내에서 개혁을 부르짖도록 만든 주요 요인들 중 일부이다.

교리적 문제들. 개신교 종교 개혁을 촉진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 아직도 여전히 개신교와 카톨릭을 분리시키는 비성서적 교리들의 표본들은 다음과 갈다.
1. 지상의 교회의 수령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다. 이 교리는 로마의 주교만이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대리자 혹은 대표자요 교회의 가시적 수령이라고 주장한다. 교회의 지도권에 대한 성서적 견해(본서 11장 참조)와는 달리 이 교리는,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교회의 가시적 수령으로 삼으셨으며 교황은 베드로의 계승자라는 가정에 기초되어 있다.*
2. 교회와 그 수령의 무오설. 로마 교회의 명성과 영항력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교리는 다름 아닌 그 교회의 무오설에 관한 교리이다. 교회는 전혀 잘못한 적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그 교회는 성경상 아무 지지도 받지 못하는 다음과 같은 논증에 이 가르침의 기초를 두고 있다. 즉, 교회는 신적인 것으로서, 그 본래의 속성 중의 하나가 무오성이다. 부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신적인 교회를 통하여 모든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하늘로 인도하도록 의도하셨기 때문에 그 교회는 신앙과 교훈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무오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모든 오류로부터 교회를 보존시켜 주실 것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타락성(본서 7장 참조)을 부인하는 이러한 논리는 교회의 지도자 또한 무오해야 한다는 논리의 귀결을 낳는다.* 따라서, 카톨릭 문헌은 그 지도자가 신적인 대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3.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중보 사업을 가림. 교회의 영항력이 증대하자 신자들의 관심은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행하시는 계속적인 중보 사업, 즉 구약 성소봉사의 계속적인 매일의 제사들의 원형(본서 4장, 23장 참조)으로부터 로마에 그 지도자를 둔 지상의 사제 직분으로 옮겨진 바 되었다. 죄의 용서와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대신에(본서 9장, 10장 참조) 신자들은 그들의 믿음을 교황과 사제와 고위 성직자들에게 두었다. 만인 사제직(모든 신자들의 제사장직분)을 가르치는 신약성서의 가르침과는 모순되게, 성직자들의 면죄의 성사는 이제 구원에 절대 필요한 것으로 신봉되기에 이르렀다.
회개하는 신자들에게 당신의 속죄의 희생의 혜택을 끊임없이 적용하시는 하늘에서의 그리스도의 제사장 봉사는 그 교회가 성만찬을 미사로 대체 했을 때 효과적으로 부정되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기념하고 장차 올 당신의 왕국을 예표하기 위하여 제정하신 예식인 성만찬과는 달리, 미사는 인간 제사장이 피 없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 갈바리에서처럼 다시 드려진 바 되므로, 미사는 신자들과 죽은 자들에게 특별한 은총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성경에 대하여 무지한 채, 인간 사제 직분에 의하여 행해지는 미사밖에 모르는 많은 무리들은 우리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축복을 상실했다. 그같이 하여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는 약속과 초청은 말살되었다.
4. 선행의 공로적 본질. 선행을 함으로 사람은 구원을 얻는 데 절대 필요한 공로를 얻을 수 있고, 믿음은 구원할 수 없다는 널리 퍼진 견해는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배치된다(본서 9, 10장 참조). 카톨릭 교회는, 죄인의 마음에 주입된 은혜의 결과인 선행은 공로가 있으며, 그로 인하여 각 개인은 구원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게 된다고 가르쳤다. 사실상 사람은(성자들의 경우에서처럼) 구원을 얻는 데 필요 되는 것보다 더 많은 선행을 행할 수 있으며, 그같이하여 여분의 공로를 축적할 수 있다. 이 여분의 공로는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 쓸 수 있다. 죄인들은 그들의 마음에 주입된 의를 기초로하여 의롭게 된다고 그들은 주장했기 때문에 선행은 개인의 칭의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공로로 인정되는 선행의 교리는 또한 완전히 순결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천국의 즐거움에 참여하기 전에 연옥에서 그들의 죄에 대하여 정결케 하는 일시적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연옥의 교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들의 기도와 선행으로 살아 있는 신자들은 연옥에 있는 자들의 고통의 기간을 단축시키고 고통의 강도를 경감시켜 줄 수 있었다.
5. 고해 성사와 면죄의 교리. 고해 성사는 그리스도인이 세례(침례) 후 지은 죄의 사유함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성례전이다. 사제의 면죄를 통하여 이러한 죄들이 용서를 받지만, 용서를 받을 수 있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양심을 살피고,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이상 죄를 범치 않겠다고 결심해야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사제에게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사제가 부과하는 어떤 과제 즉 고행을 해야 한다.
그러나 고해 성사는 죄인을 완전히 해방시켜주지는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현세에서 혹은 연옥에서 일시적 형벌을 받아야 한다. 이 형벌을 해결하기 위해 교회는 면죄부를 만들었다. 면죄부는 죄책이 면제된 후 지은 죄 때문에 받게되어 있는 일시적 형벌을 면제시켜 주었다. 산자와 연옥에 있는 자 모두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면죄부는 참회와 지시 받은 선행(흔히는 교회에 돈을 내는 형태로)을 행한다는 조건 하에서 주어 졌다.
면죄를 가능케 만든 것은 순교자들, 성인들, 사도들, 그리고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여분의 공로 때문이다. 그들의 공로는 “공로의 보고”에 저장되었다가 공로가 모자라는 신자들에게 양도될 수 있었다. 베드로의 계승자라고 자처하는 교황이 이 보고의 열쇠를 관장하고 있다가 이 보고로부터 백성들에게 저장된 공로를 나누어줌으로써 일시적 형벌을 면제시켜 줄 수 있었다.*
6. 최종적인 권위가 교회 내에 있다. 여러 세기를 통하여 기성 교회는 많은 이교의 신조들, 성일들, 그리고 상징들을 채택했다. 이러한 가증한 것들을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을 때, 로마 교회는 성서를 해석하는 권한을 독차지했다. 성경이 아닌 교회가 최종적 권위가 되었다(본서 1장 참조). 그 교회는 신성한 진리의 두 근원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첫째는 성서요, 둘째는 교부들의 저술들, 교회 공회들의 교령, 승인된 신경들, 그리고 교회의 의식들로 구성된 카톨릭의 전통(유전)이 그것이다. 교회의 교리가 성서에 의해서는 됫받침되지 않고 유전에 의하여는 됫받침되었을 경우 언제나 유전이 성서보다 우위를 차지하였다. 일반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성서 가운데 계시해 놓으신 교리들을 해석할 권위가 전혀 없었다. 그 권위는 오로지 카톨릭 교회 내에만 있었다.*

새 날의 동이 트다. 14세기에 요한 위클리프는 영국에서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국 내에 교회의 개혁을 촉구했다. 성서의 사본이 몇 권밖에 없었던 그 당시에, 그는 최초로 성경 전서를 영어로 번역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성서만이 무오하다는 그의 가르침은 개신교 종교 개혁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종교 개혁의 새벽 별로서 그리스도 교회를 무지 가운데 묶어두고 있었던 이교주의의 속박으로부터 교회를 해방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개인의 정신을 해방시키고 전 국가들을 종교적 오류의 독수(毒手)로부터 자유케 해줄 운동을 출범시켰다. 위클리프의 저술들은 후쓰, 제롬, 루터, 그리고 많은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감동시켰다.
열정적이고 충동적이며 타협을 모르는 마르틴 루터는 아마도 종교 개혁의 가장 강력한 인물일 것이다.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많이 그는 사람들을 성경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위대한 복음의 진리로 돌이키는 한편 행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맹렬히 비난했다.
신자들은 성서 이외에는 어떤 다른 권위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선포하면서 루터는 백성들의 눈을 위로 즉, 인간의 행위, 사제, 그리고 고행으로부터 그들의 유일의 중보자시요 구주이신 그리스도께로 돌렸다. 그는 인간의 행위로 죄의 죄책을 경감시키거나 그 형벌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하나님께 향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죄인을 구원할 수 있다. 그것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임으로, 그분의 은혜는 값으로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면죄(부)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속주의 홀린 피 때문에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여러 세기 동안 축적된 폐기물들 밑에 묻힌 보화를 캐내는 고고학적 탐사와 같이, 종교 개혁은 오래 잊혀졌던 진리들을 밝혀냈다. 복음의 위대한 원칙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는 재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이루신 속죄의 희생과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그분의 중보적 사제 직분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말미암았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성도 및 유물숭배, 미사, 마리아 숭배, 연옥, 고행, 성수(聖水), 사제의 독신 제도, 묵주, 종교 재판소, 화체설, 종부 성사, 유전에의 의존 등은 배척되었고 포기되었다.
개신교 종교 개혁자들은 교황권을 “불법의 사람”, “불법의 비밀”, 그리고 재림 전에, 요한계시록 12장 6, 14절과 13장 5절에 예언된 바대로 1,260년 동안 하나님의 참 백성들을 핍박하게 될 세력인 다니엘서의 “작은 뿔”로 보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성경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교훈의 유일한 규준이라는 교리는 개신교 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개혁자들은 모든 인간의 유전들은 성서의 더 높은, 최종적 권위에 종속된다고 생각했다. 종교적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 권위-교황, 공의회, 교부들, 왕 혹은 학자들-도 양심을 지배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참으로, 그리스도교 세계는 그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많은 나라에서 종교 자유가 선포되었다.

활기를 잃은 종교 개혁
그리스도 교회의 개혁은 16세기에 끝나지 않아야 했다. 개혁자들은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배도의 기간 중에 잃어버린 모든 빛들을 재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칠흙 같은 암흑 속에서 끌어냈지만 그리스도교는 여전히 그늘 아래 있었다. 그들이 중세 교회의 압제를 끊어버리고 성서를 세상에 배포하고 기본적 복음을 회복했지만 다른 중요한 교리들을 발견하는 데는 실패했다. 물에 잠금에 의한 침례, 의인의 부활 시 그리스도께서 수여하시는 선물로서의 불멸성, 성서의 안식일인 제칠일과 그 밖의 다른 진리들(본서 7, 14, 19, 25장 참조)은 그늘 속에 잃어버린 상태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계승자들은 개혁을 진전시키지 않고 그 개혁을 통해 성취된 것들을 통합시키는데 그쳤다. 그들은 성경 대신에 개혁자들의 말과 견해에 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새 진리들을 발견한 사람이 몇 있긴 하지만 대다수는 초기개혁자들이 믿었던 것 너머로 전진하기를 거부했다. 그 결과 개신교 신앙은 형식주의와 스콜라 철학으로 전락되었고, 제거되어야 했을 오류들이 그대로 신봉되었다. 종교 개혁의 불꽃은 점차로 꺼져갔고, 개신교 교회 자체는 냉담하고 형식적이 되어 다시 개혁이 필요하게 되었다.
종교 개혁 이후 시대는 신학적인 활동으로 법석을 떨었지만 영적인 진보는 거의 없었다. 프레데릭 W. 파라(Ferederic W. Farrar)는, 이 시기에 대하여 “자유는 예속으로, 보편적 원칙은 비천한 요소들로, 진리는 교조주의로, 독립은 유전으로, 종교는 제도로 바뀌어졌다. 성서에 대한 살아 있는 존경심은 영감에 대한 죽은 이론으로 대치되었다. 온화한 정통(正統)은 냉혹한 획일에, 그리고 살아 있는 사상은 논쟁적 변증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고 기록하였다. “종교 개혁이 구 스콜라 철학의 납으로 만든 무거운 왕홀(王笏)을 꺾었”지만 개신교회는 “철장을 가진 신 스콜라 철학을 도입하였다.”* 로버트 M. 그랜트(Robert M. Grant)는 이 신 스콜라 철학을 “여느 중세 신학 구조 못지 않게 경직된 것”*으로 불렀다. 개신교는 “그들이 신봉하고 있는 신앙 고백의 제한으로 자신들을 사실상 결박했다.”*
쟁론이 폭발하였다. “서로의 오류를 발견하는데 그처럼 열중했거나 서로를 그토록 많은 욕설적인 이름으로 불렀던 때는 일찍이 없었다.”* 그와 같이 복음은 말싸움이 되었다. “성경은 더 이상 마음에 말하지 않고 비평적인 지성에 말했다.”* “교의는 정통적이었지만 영성은 소멸되어 버렸다. 신학은 승리했지만 사랑의 불은 꺼져버렸다.”*

남은 자손
1,260년 간의 배도와 환난에도 불구하고 사도교회의 순결을 계속 간직해 왔던 얼마간의 신자들이 있었다. 1,260년 간의 압제가 서기 1,798년에 끝났을 때 용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전멸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 분명해졌다. 이들에 대하여 사단은 그의 파괴적인 노력을 계속하고있다. 요한은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계 12:17) 서 있다고 말했다.

남은 자손은 어떤 사람들인가? 요한은 여인과 그 여인의 자손들에 대한 용의 전쟁을 묘사하면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계 12:17)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 표현은 “남아 있는 자들” 혹은 “남은 무리”를 의미한다. 성경은 남은 무리를, 재앙과 전쟁과 배도 중에서도 하나님께 충성을 유지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작은 무리로 묘사하고 있다. 이 충성스러운 남은 무리는 지상에 있는 당신의 가시적 교회를 선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근경(根莖)이었다(대하 30:6; 스 9:14, 15; 사 10:20-22; 렘 42:2; 겔 6:8, 14:2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선포하고 전 세계에 산재한 당신의 흩어진 백성들을 “성산 예루살렘”, “시온산”으로 인도할 책임을 남은 자손에게 위탁하셨다(사 71:31, 32, 66:20; 계 14:1 참조). 이렇게 하여 함께 모인 무리들에 대하여 성경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계 14:4)들이라고 기술한다.
요한계시록 12장 7절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의 선택된 계보에 있어서 마지막 남은 자손들 즉, 그리스도의 재림 전 마지막 시대에 사는 당신의 충성스런 증인들에 대한 묘사이다. 남은 자손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남은 자손의 특징들. 마지막 때의 남은 자손에 대하여는 오해의 여지가 없다. 요한은 이 무리를 분명한 용어로 묘사한다. 1,260년 간의 박해 후에 출현한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계 12:17)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온 세상에 보내는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인 요한계시록 14장의 세 천사의 기별을 선포할 책임을 지고 있다(계 14:6-12). 이 기별 자체내에 남은 자손에 대한 묘사가 들어 있다. 남은 자손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믿음을 가진 자”(계 14:12)들이다. 이 특성들을 하나하나 더 세밀하게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예수(의) 믿음. 하나님의 남은 백성들의 특징은 예수님이 소유하셨던 것과 유사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성경의 권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나타내셨던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반영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언된 메시야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의 구주로 오신 것을 믿는다. 그들의 신앙은 성경의 모든 진리들, 즉 그리스도께서 믿으시고 가르치신 모든 진리들을 망라한다.
그 밖에, 하나님의 남은 자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영원한 복음을 선포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다고 세상에 경고하고 곧 강림하실 그들의 주님을 맞을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을 준비시킬 것이다. 그들은 인류에 대한 신성한 증거를 완수하기 위하여 전 세계적인 사명에 참여할 것이다(계 14:6, 7, 10:11; 마 24:14).
2. 하나님의 계명. 예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은 남은 무리로 그분의 모본을 따르게 한다. 요한은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고 말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셨기 때문에, 그들 또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것이다(요 15:10).
특별히 그들은 남은 자손임으로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공언과 일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공언은 무가치하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능력을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불변의 도덕률인 십계명 모두를 포함한 하나님의 요구사항을 순종한다(출 20:1-17; 마 5:17-19, 19:17; 빌 4:13).
3. 예수의 증거. 요한은 “예수의 증거”를 “대언의 영(예언의 신)”(계 19:10)으로 정의한다. 남은 자손은 예언의 선물을 통하여 전달된 예수의 증거에 의하여 지도된다.
이 성령의 선물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르기까지”(엡 4:13) 교회사 전체에 걸쳐서 끊임없이 작용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남은 무리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예언적 인도는 남은 무리를 예언적 기별을 선포하는 예언의 백성으로 만든다. 그들은 예언을 이해하고 그것을 가르친다. 남은 무리에게 이르러온 진리의 계시는 그리스도의재림을 위해 세상을 준비시키는 그들의 사명을 성취하는 데 도움을 준다(본서 17장 참조).

마지막 시대의 남은 자손의 출현. 성경은 남은 자손이 큰 박해의 시기 후에 세계 무대에 등장한다고 지적한다(계 12:4-17). 1,260년 기간의 끝(서기 1,798년)에 교황을 사로잡히게 만든 프랑스 혁명의 지축을 뒤흔드는 사건과 땅과 해와 달과 별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함을 증거하는 세 우주적 징조들(본서 27장 참고)은 예언 연구의 일대 부흥을 가져왔다. 예수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널리 퍼진 기대가 생겨났다. 세계 도처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때”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단 12:4).*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에 이루어진 성서 예언의 성취는 재림 소망에 그 중심을 둔 강력한 초교파 운동을 발생시켰다. 각 교회마다에서 임박한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 신자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역사의 절정을 이루는 사건을 고대하며 기도하고 활동했다.
재림 소망은 그 소망을 따르는 자들 가운데 깊은 정신적 연합을 이루어 주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가담하여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하여 세상을 경고하였다. 재림 운동은 하나님의 말씀과 재림 소망에 중심을 둔 참된, 성서적 초교파 운동이었다.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교회의 침체된 개혁 사업을 계속 추진하도록 남은 자손을 부르고 계시다는 확신을 더 굳게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이 소속되어 있었던 각자의 교회들 가운데서 개혁의 참 정신의 부재와 재림에 대한 연구와 재림을 맞기 위한 준비에 흥미가 결여되어 있음을 통감했다. 그들은 성경 연구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로 경험케 하셨던 시련과 실망들은 그들을 하나님의 남은 자손으로 결속시킨 깊이 있는 영적 체험, 정결케 하는 경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에 그토록 큰 기쁨과 능력을 가져다 주었던 개혁 사업을 계속하도록 그들에게 위탁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위탁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그들의 어떤 타고난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통해서만 그들이 성공을 거둘 수 있음을 깨닫고 감사와 겸비한 자세로 그들의 사명을 받아들였다.

남은 자손의 사명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은 남은 자손의 사명의 윤곽을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4장 6-12절의 세 천사의 기별은 복음 진리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회복을 이룩할 남은 자손의 선포 내용을 밝혀준다.* 이 세 기별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전 세계를 휩쓸 엄청난 사단의 기만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이다(계 13:3, 8, 14-16).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호소에 곧이어 그리스도께서 추수하시기 위해 돌아오신다(계 14:14-20).

첫째 천사의 기별.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 14:6, 7).

첫째 천사는 세상에 영원한 복음을 전달하는 하나님의 남은 자손을 상징한다. 이 복음은 옛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선포하였던 것과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좋은 소식이다(히 4:2). 남은 자손이 제시하는 복음은 다른 복음이 아니다. 심판에 비추어 그들은 죄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복음을 재확인한다.
이 기별은 세상에 회개를 촉구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혹은 경외하라), 그분께 “영광”(혹은 존귀)을 돌리라고 호소한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우리는 우리의 언행으로 하나님께 존귀 혹은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요 15:8).
요한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하여 세상을 준비시키는 운동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에 대한 성서적 관심사를 새롭게 강조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전에 없이 그것은 우리 생애에 대한 신성한 청지기 직분에 관한 신약의 호소를 강조할 것이다. “너희의 몸은 성령의 전”이다. 우리는 우리의 체력과 도덕력과 영적 능력에 대하여 독점적인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갈바리에서 당신의 피로 이것들을 사셨다.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 20),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회개하라는 호소에 긴급성을 더해 준다(본서 23장 참조). 요한계시록 14장 7절의 심판이란 단어는 헬라어의 크리시스(krisis)를 번역한 것으로서 심판의 언도(판결, krima)가 아니라 심판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심판의 전 과정을 지칭하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의 백성들에 대한 심문, 생애의 기록들의 조사와 방면 및 유죄 판결, 그리고 영생의 부여 혹은 사형 선고 등을 포함한다(마 16:27; 롬 6:23; 계 22:12 참조). 심판의 때(시간)에 관한 기별은 또한 모든 배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다(단 7:9-11, 26; 계 17:18).
심판의 시간에 관한 기별은 특별히 하늘 성소에서의 당신의 대제사장 봉사의 마지막 단계로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심판 작업에 착수하시는 때를 가리킨다(본서 제23장 참조).
이 기별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창조주를 경배하도록 촉구한다.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짐승과 그의 우상을 경배하라는 명령과 대조되어 있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계 13:3, 8, 15). 즉, 각인은 참된 예배와 거짓예배 사이에서, 하나님의 방식(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혹은 우리의 방식(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로 하나님을 경배하든지 양단 간에 선택을 해야만 할 것이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고 명령함으로(계 14:7; 출 20:11) 이 기별은 넷째 계명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것은 당신의 창조의 기념물 즉 당신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제정하시고 십계명 가운데 재확인하신 여호와의 제칠일 안식일을 존귀케 하는 것을 포함하는 행위인 창조주깨 대한 예배로 백성들을 인도한다(본서 19장 참조). 그러므로 첫째 천사의 기별은 세상에 창조주이시며 성경의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제시하므로 말미암아 참된 예배를 회복시킬 것을 촉구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표징 즉 당신의 대다수 피조물에 의해 소흘히 취급을 받고 있는 표징이다.
하나님께서는 섭리로 창조주 하나님께 주의를 환기시키는 이 기별의 선포가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종의 기원”(1859)의 출판으로 진화론적 철학이 큰 지지를 받고 있을 때 역사의무대에 울려 퍼지도록 하셨다. 첫째 천사의 기별의 전파는 진화론의 파급을 막는 최대의 성채이다.
끝으로, 이것은 “불법의 사람”(살후 2:3)에 의해 짓밟혀 온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존귀성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 예배가 회복되고 신자들이 하나님의 왕국의 원칙을 생애에 실천할 때에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

둘째 천사의 기별.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계 14:8).

바벨론 성은 그 성의 역사의 시초부터 하나님께 대한 반항을 상징했다. 바벨탑은 배도의 기념물이요 반역의 중심지였다(창 11:1-9). 루스벨(사단)은 그 성의 보이지 않는 왕(사 14:4, 12-14)이었고, 그는 바벨론을 인류를 통치하려는 그의 마스터 플랜을 시행할 매개자로 삼기를 원했던 것 같다. 성경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과 사단의 도성 바벨론 사이의 투쟁은 선과 악 사이의 투쟁을 예시(例示)하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 동안, 로마인들이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압제하고 있었을 때 유대 및 그리스도인 문헌들은 로마시를 바벨론으로 언급했다.* 많은 사람들은 베드로가 바벨론을 로마의 가명으로 사용했다고 믿는다(벧전 5:13). 그 배도와 박해 때문에 종교 개혁과 개혁 이후 시대의 대부분의 개신교도들은 로마 교회를 영적 바벨론(계 17장) 즉, 하나님의 원수로 언급했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은 사악한 여인, 음녀들의 어미, 그리고 그의 불순결한 딸들을 가리킨다(계 17:5). 그것은 특별히 요한계시록 13장 15-17절에 기술된 최후의 위기를 가져올 짐승과 그의 우상 사이의 배도한 대 종교 연맹을 지칭하지만 또한 모든 배도한 종교적 조직들과 그 지도자들을 상징한다.
둘째 천사의 기별은 바벨론의 배도와 그 강제하는 권세의 보편적 성격을 세상에 폭로한다. 곧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바벨론의 “포도주”는 그의 이단적 가르침을 대표한다. 바벨론은 그의 거짓 종교적 가르침과 교령을 전 세계적으로 실시키 위하여 국가의 권세들에게 압력을 넣을 것이다.
앞서 언급된 바 “음행”은 바벨론과 국가들 사이 즉 배도한 교회와 국가 권력 사이의 불법적인 관계를 대표한다. 교회는 그의 주님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다. 그렇게 하는 대신 국가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그는 배우자를 버리고 영적 음행을 저지른다(겔 16:15; 약 4:4 참조).
이 불법적인 관계는 비극을 초래한다. 요한은 세상의 거민들이 거짓 가르침에 취했음과 바벨론 자신이 그의 비성서적 교리들을 받아들이고 그의 권위에 복종하기를 거절하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것을 보았다(계 17:2, 6).
바벨론은 첫째 천사의 기별 즉 창조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복음을 거절함으로 무너진다. 첫 몇 세기 동안에 로마 교회가 배도한 것처럼 많은 오늘날의 개신교도들은 종교개혁의 위대한 성서 진리로부터 떠났다. 이 바벨론의 몰락에 관한 예언의 성취는 특히 종교개혁을 한때 강력하게 추진시킨 원동력이었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영원한 기별의 단순성과 순결로부터 대다수 개신교가 이탈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둘째 천사의 기별은 마지막이 가까워 올수록 점점 더 시의성 있는 기별이 될 것이다. 그것은 첫째 천사의 기별을 거절해온 다양한 종교 조직들이 연맹을 결성할 때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바벨론의 몰락에 관한 기별은 요한계시록 18장 2-4절에 반복되었는데, 그 기별은 바벨론의 몰락을 선언하고 바벨론을 구성하는 여러 종교단체들에 아직도 소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바벨론에서 나와 분리되도록 호소한다. 천사는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고 말한다.

셋째 천사의 기별.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밟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9-12).

첫째 천사의 기별은 영원한 기별을 선포하고,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으므로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참 예배를 회복하도록 요구한다. 둘째 천사는 인간이 창안한 모든 예배 형태에 대하여 경고한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천사는 짐승과 그의 우상을 경배하는 것(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복음의 기별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마침내 그렇게 할 것이다)에 대하여 가장 엄숙한 경고를 선포한다.
요한계시록 13장 1-10절에 기술된 짐승은 교회와 국가의 연합체이다. 그 짐승은 여러 세기동안 그리스도교 세계를 지배했으며 바울에 의해 “불법의 사람”(살후 2:2-4)으로, 다니엘에 의해 “작은 뿔”(단 7:8, 20-25, 8:9-12)로 기술되었다. 짐승의 우상은 교회들이 종교 개혁의 참 정신을 상실하고 다른 이들에게 그들의 가르침을 강요하고자 국가와 연합할 때 생겨날 그러한 배도한 종교 집단을 표상한다. 교회와 국가를 연합시킴으로써 그들은 1,260년간 박해를 자행한 배도한 교회였던 짐승의 완전한 우상이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짐승의 우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셋째 천사의 기별은 성서 가운데 가장 엄숙하고 두려운 경고를 선포한다. 그것은 세상의 최후의 위기의 때에 인간의 권위에 굴복하는 사람들은 하나님보다는 짐승과 그의 우상을 경배할 것이라고 밝힌다. 이 최후의 투쟁의 시기동안에 서로 명확하게 구별되는 두 무리가 형성될 것이다. 한 부류는 인간이 고안한 복음을 옹호하고 짐승과 그의 우상을 경배함으로 자신들에게 가장 참혹한 심판을 초래케 할 것이다. 그와는 현저하게 대조되는 다른 부류는 참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킬 것이다(계 14:9, 12). 최후 싸움의 계쟁점은 참된 예배와 거짓 예배, 참된 복음과 거짓 복음에 관한 것이다. 이 계쟁점이 온 세상에 명확히 제시될 때, 하나님이 창조주 되심의 기념물인 성경의 안식일을 거절하고, 일요일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예배일이 아님을 명명백백히 알면서도 그 날(일요일)에 예배하고 그날을 존귀케 하기로 선택하는 자들은 “짐승의 표”를 받게 될 것이다. 이 표는 반역의 표이다. 짐승은, 예배하는 날을 자신이 변경한 것이야말로 그들의 권위가 하나님의 율법 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셋째 천사의 기별은 세상의 관심을 영원한 기별과 참 예배를 회복하라는 하나님의 기별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결과에 돌린다. 그것은 예배에 관한 백성들의 선택의 최후의 결과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선택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어느 것을 선택하든지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들은 용의 진노를 경험할 것이다(계 12:17). 그리고 마침내 죽음의 위협을 받을 것이다(계 13:15). 반면에 짐승과 그의 우상을 경배하기로 선택한 자들은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당할 것이며 마침내 “불 못”에 던짐을 당할 것이다(계 15:16, 20:14, 15).
그러나 두 선택 모두 고통이 수반되지만 그 결과는 판이하다. 창조주를 경배하는 자들은 용의 가공할 진노를 피하여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서게 될 것이다(계 14:1, 7:2, 4). 반면에 짐승과 그의 우상을 경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충만한 진노를 받을 것이며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양 앞에서 죽음을 당할 것이다(계 14:9, 10, 20:14).
각인은 누구를 경배해야 할지 선택을 해야만 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선택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예배 형태에 참여한 것으로 드러날 것이며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사실상 선택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금지하셨지만 짐승과 우상이 명령하는, 인간이 만든 예배 형태에 참여한 것이 입증될 것이다. 후자는 하나님의 계명이 아닌 인간의 계명에 우선권을 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가 없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는 칭의를 추구하면, 창조주요 구속주이며 재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온전히 굴복함을 통하여 오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셋째 천사의 기별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기별이다.
하나님은 모든 교회에 당신의 자녀들을 가지고 계시다. 그러나 그분은 남은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배도로부터 불러내시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하여 그들을 준비시킴으로써 당신의 참 예배를 회복시킬 기별을 선포하신다.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장차 그들에게 가담하게 될 것을 깨닫고 남은 자손은 그들의 엄숙한 사명을 성취하기에 자신들이 아직 부적합하고 연약함을 인식한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그들의 중차대한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스도의 임박한 강림과 그분을 맞기 위해 준비할 필요성에 비추어 하나님의 긴급하고 동정 어린 호소는 우리 각자에게 큰 감명을 준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피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계 18: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