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4일 월요일 장년 교과] 아레오바고의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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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아레오바고로 이끌었다. 그는 철학과 문화에 정통한 논리 정연한 이였지만 그보다 아테네 거리에서 파악한 내용이 더 유익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바울은 어디에 있든 복음을 전하려고 했다. 그는 아테네에서 바로 그 일을 시도했다.

사도행전 17:18~21을 읽어 보라. 바울의 연설과 질문에 광장의 이교도들은 어떤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하였는가?

“이방 신들을 전하는”(행 17:18) 이로 보였던 바울은 광장에 있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이 분명하다. 아테네 사람들은 법적, 종교적 문제를 다루는 그 도성의 아레오바고로 바울을 데려갔다. 그가 재판에 회부된 것은 아니었고, 다만 아테네 사람들이 바울과 그의 “새로운 교리”(행 17:19)를 함께 들어보려고 한 것이었다. 매우 이상해 보이는 가르침을 전하는 것 같았지만 바울의 언변, 열정 그리고 지성으로 보여준 웅변을 그저 무시할 수 없었다.
사도행전 17:21은 아테네 사람들이 새로운 것에 대해 말하고 듣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누가는 이 구절에서 아테네 사람들이 게으르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인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그들이 숙련된 사상가이자 토론자라는 점을 지적하였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를 배출했고 그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테네는 수세기 동안 지적, 철학적 사상의 중심지로 여겨져 왔다. 이 사상가들 중 일부는 무신론자가 아니었고 오늘날 우리가 무신론이라고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무신론자는 더욱 아니었지만, 그들의 철학 사상의 대부분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예를 들어 에피쿠로스 철학이나 스토아 철학에는 부활하신 메시아 같은 개념이 없었다.
바울은 가말리엘 밑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얻은 그의 지식과 웅변술을 성령께서 아테네에서도 사용하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어서) “그의 청중 가운데 가장 슬기로운 사람들도 그의 정연한 논리를 듣고 놀랐다. 바울은 자신이 그들의 예술 작품, 문학 그리고 종교에 정통함을 나타내었다”(사도행적, 237). 그러나 실제로 성령께서 더 많이 사용하실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아테네 거리에서 받은 교육이었다.

<교훈> 바울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아레오바고로 이끌었다. 그는 철학과 문화에 정통한 논리 정연한 이였지만 그보다 아테네 거리에서 파악한 내용이 더 유익했다.

<묵상> 아테네의 경험 후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고전 2:2)다고 쓴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적용>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기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전하는 기별에서 그리스도는 얼마나 중심이 되고 있습니까?

<영감의 교훈>
결실이 적었던 전도 방법 – “아덴의 철학자들을 만났을 때의 사도 바울의 경험은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중 논리는 논리로, 과학은 과학으로, 철학은 철학으로 대항하였다. 그의 청중들 중 가장 현명한 사람도 놀라서 아무 말을 못했다. 그의 말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노력은 별반 결실이 없었다.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때부터 바울은 활동의 방법을 바꾸었다”(치료 봉사, 214).

<기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높이도록 도와주옵소서. 나도 모르게 다른 것을 앞세우려 했다면 바로 깨우치도록 도와주옵소서. 내 지식과 경험이 주님의 십자가 아래 새롭게 되게 하셔서 합당한 말을 나누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