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일 일요일 장년 교과] 부자와 나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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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나사로(눅 16:19~31)의 이야기는 중요한 영적 교훈을 주기 위한 비유다.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죽은 자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누가복음 16:19~31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가 사후 세계에 관한 문자적인 묘사가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학자들은 누가복음 16:19~31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이 말씀이 죽은 자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견해는 몇 가지 비성서적 결론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이미 살펴본 여러 성경 구절들과 상충되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첫째, 우리는 하늘과 지옥이 각 곳에 거하는 자들이 서로 대화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눅 16:23~31). 또한, 사후 세계에서 몸은 무덤에 누워있지만, “눈”과 “손가락”과 “혀”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목마름까지 느끼는 의식을 가진 영혼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눅 16: 23, 24).
만일, 이 말씀이 죽은 상태의 인간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하늘은 분명 기쁨과 행복의 장소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 받은 자들이 자신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끝없는 고통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화까지 하게 되기 때문이다(눅 16:23~31).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녀의 쉼 없는 고통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상태에서는 슬픔도 없고 눈물도 없으며 고통도 없을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수 없을 것이다(계 21:4).
이와 같은 모순으로 인해 많은 현대 성경 학자들은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는 단지 비유일 뿐, 이야기의 모든 부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으로 여긴다. 조지 E. 래드(George E. Ladd)는 비록 재림교인은 아니지만 다음의 말을 통해 마치 재림교인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생각을 이용한 비유로서, 죽은 자의 상태를 가르치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다”(G. E. Ladd, “Eschatology,” in The New Bible Dictionary, 388).

<묵상>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31). 이 말씀을 통해 성경의 권위와 그것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이어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잘 갖춰 입은 “부자”와 “헌데투성이”의 나사로라 이름하는 거지 사이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 줌으로서(눅 16:19, 20)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1) 현재의 신분이나 사회적 평가가 미래의 상급의 기준이 아니다. (2) 각 사람의 영원한 운명은 현재의 삶을 통해 결정되는 것으로서 사후에 뒤바뀔 수 없다(눅 16:25, 26).

<교훈>
부자와 나사로(눅 16:19~31)의 이야기는 중요한 영적 교훈을 주기 위한 비유다.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죽은 자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적용>
그대는 현재의 삶이 갖는 중요성을 얼마나 이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오늘의 선택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 – “이 비유는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입장에 서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죽는 날로부터 부활할 때까지 의식(意識)을 갖고 있다는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 속에 많이 섞여 있었다. 구주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잘 아시고 그 중요한 진리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하여 이 비유를 그들의 선입견에 따라 구성하셨다”(실물교훈, 263).

<기도>
저에게 주어진 현재의 삶에 충실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그대로 순종하며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시간 동안 올바른 선택을 하며 영원을 위해 준비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