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증거가 있지만, 성경은 보고 나서 믿는 관점을 반박한다. 주님은 도마에게 만져보고 믿는 자가 되라 하셨지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더 복되다 하셨다.
요한복음 20:19-31을 읽어 보라. 도마의 이야기에서 믿음과 의심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도마는 어떤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는가?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한 방에 모여 숨어있었다. 하지만 도마는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나중에야 다른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실의 가운데 있었다. 도마가 기대했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예수님은 왜 자신만 빼놓고 모든 사람에게 당신을 보이셨을까 하는 의문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요 20:25)다고 말했다.
도마는 자신이 믿는 조건을 말한 셈이다. 믿음에 대한 이런 태도는 요한복음에 반복해서 등장한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질문했다(요 3:4). 우물가의 여인은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요 4:11) 물었고 떡과 물고기를 먹은 군중은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요 6:30)라고 말했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보고 나서 믿는” 관점을 반대한다. 예수께서 부활 후 도마를 만나셨을 때 그분은 그에게 와서 부활한 몸을 보고 만져보라고 권하셨다. 하지만 이내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요 20:29)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믿음의 기초가 될 만한 충분한 증거도 주시지 않은 채 우리에게 믿으라고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분의 존재, 품성, 말씀의 진실성은 모두 우리의 이성(異性)에 호소하는 증거로 말미암아 세워지며 그 증거는 넉넉하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의심의 가능성을 제거하지 않으셨다. 우리의 믿음은 증거 위에 세울 것이나 실증 위에 세우는 것이 아니다”(정로의 계단, 105).
(이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차고 넘치는 증거를 받았다.
<교훈> 믿음의 증거가 있지만, 성경은 보고 나서 믿는 관점을 반박한다. 주님은 도마에게 만져보고 믿는 자가 되라 하셨지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더 복되다 하셨다.
<묵상> 요한이 보고 나서 믿는 믿음을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믿음에는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적용> 누군가 당신에게 왜 예수님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어떤 믿음의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까?
<영감의 교훈> “도마는 자기 믿음의 조건을 요구하는 데 있어서 매우 분별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관대한 사랑과 이해심으로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셨다. 불신은 언쟁으로는 거의 정복될 수 없다. 그렇게 하면 도리어 자기 자신을 변호하고 새로운 구실과 핑계를 찾는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주로 나타내 주면 한때 원치 않던 많은 사람의 입술에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한 도마의 고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시대의 소망, 808).
<기도> 우리도 도마처럼 조건을 두고 믿음을 거래하고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에게 주시는 십자가의 사랑을 헛되게 만드는 저희의 연약함과 고집을 용서하여 주시며 주님을 더욱 신뢰하고 따르도록 믿음을 더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