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 금요일 예수바라기]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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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창 25:1)

‘그두라’가 누구인지 고민을 하는 건 그두라 탓은 아닙니다. 순전히 아브라함 탓입니다. 백세일 때도 이미 제 몸이 죽은 것 같음을 알아 ‘아들을 낳으리라’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 속으로 웃었던 그가 백마흔 살이 넘어 새 장가를 들더니 아들을 여섯씩이나 낳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전후 사정이 그러하니, 그두라가 아무래도 아내 사라와 사별 후 얻은 후처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후처가 아니라면 누구일까요? 혹시…. 소실일까요? 하갈 같은 첩 말입니다.
상상이 안되는 일이긴 하다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말씀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어….”(창 25:5-6). 그두라를 통해 얻은 여섯 아들을 ‘서자들’(창 25:6)이라 합니다. 서자는 ‘첩의 자식’(the son of the concubines)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이 말씀에 따르자면, 그두라는 아브라함의 첩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비단 여기 창세기 뿐만이 아닙니다. 역대상에서는 그두라를 가리켜 아예 대놓고 ‘아브라함의 소실’(대상 1:32)이라 합니다.
“아브라함의 소실 그두라가 낳은 자손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요… 이들은 모두 그두라의 자손들이라”(대상 1:32-33).
그두라가 ‘아브라함의 소실’이라면 아내 사라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동안에 버젓이 첩을 들인 셈입니다. 하갈처럼 사라가 권했는지 그것은 모르나, 아들을 여섯씩이나 낳은 걸 보면 그두라를 첩으로 들인 건 하갈을 첩으로 들이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의 일일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을 믿지 못해 하갈을 첩으로 들여 이스마엘을 낳아 놓고 얼마나 지났다고 그 짓을 또 한 게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여섯씩이나 아들을 낳습니다. 백세가 넘어서는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으나, 그 이전의 아브라함은 이처럼 낯부끄럽기 짝이 없는 위인이었던 것입니다. 여종 하갈도 그렇고 그랄 땅에서의 일도 그렇고 그두라도 그렇고.
그런데, 우리라고 그 아브라함과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달랐으면 좋겠는데, 다를 게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앞에서 숨겨져 있던 우리의 그 부끄러운 민낯이 대낮처럼 선명하게 드러나니 정말로 다를 게 하나 없습니다. 비가 눈물처럼 내리는 이 새벽, 그 부끄러운 민낯에 차마 얼굴을 들 수조차 없습니다. 탄식이 비 되어 새벽을 적실 뿐. 아, 하나님이시여. 이 소자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불쌍히 여기사 이 소자를 고쳐 주시옵소서!!!

* 컨텐츠 제공 : 월간 예수바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