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 수요일 장년 교과] 야이로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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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죽음 앞에 슬퍼하는 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시며 죽음을 잠으로 묘사하신 후에 야이로의 딸을 깨우셨다.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 전에 있었던 다른 부활들은 특정 인종이나 사회 계층에 국한되지 않았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다(신 34:10~12). 한편, 사르밧 과부는 심지어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었다(왕상 17:9). 수넴 여인은 그녀가 살던 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왕하 4:8). 나인 성의 과부는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아들 하나뿐이었다(눅 7:12). 이와는 반대로 야이로는 가버나움의 회당장이었다(막 5:22). 문화적 배경이나 사회적 계층과 상관없이,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능력으로 인해 축복을 받았다.

마가복음 5:21~24, 35~43을 읽어 보라.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죽음에 관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야이로의 열두 살 난 딸이 죽음을 눈앞에 둔 채 누워 있었다. 야이로는 예수님을 찾아가 자기 집에 오셔서 죽어가는 딸 위에 그분의 치유하시는 손을 얹으사 살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들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슬픈 소식을 가지고 왔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막 5:35).
그러자 예수님께서 슬피 우는 아버지에게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막 5:36). 사실 그 순간 아이의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개입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뿐이었다.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막 5:39).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왜냐하면, (1) 그들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음을 알고 있었고 (2)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음’을 ‘잠’으로 상징한 위로가 넘치는 은유는 그리스도가 즐겨 사용하였다. 죽음은 잠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위대한 생명의 시여자만이 깨울 수 있는 잠이다. 그분만이 무덤의 열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주석, 9권, 610쪽).

<묵상>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막 5:36)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의미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믿음이 가장 필요한 두려운 순간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이어서)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것을 본 사람들은 “크게 놀라고 놀”랐다(막 5:42). 여태껏 그들에게 죽음은 최종적이며 절대적일 뿐만 아니라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의 두 눈으로 이런 기적을 목격한 것은 정말로 놀랍고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교훈>
예수님께서는 죽음 앞에 슬퍼하는 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시며 죽음을 잠으로 묘사하신 후에 야이로의 딸을 깨우셨다.

<적용>
죽음이 끝이 아니라 잠이라고 이해한다면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소녀를 깨우신 예수님 – “예수께서는 침대 곁에 가까이 가셔서 당신의 손으로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그 소녀의 집에서 흔히 쓰는 말로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의식이 없는 몸에 즉시 가느다란 움직임이 지나갔다. 생명의 맥박은 다시 뛰기 시작하였다. 입술은 미소와 함께 열렸다. 소녀는 마치 잠에서 깬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소녀는 일어났다”(시대의 소망, 343).

<기도>
죽음을 잠으로 묘사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큰 위로가 됩니다. 믿음 안에서 잠든 자들은 분명 그 잠에서 깰 때가 있음을 믿습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떠는 자가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자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