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8일 월요일 예수바라기] 이런 기도를 해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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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시 88:12).

소망이 하나도 없는 기도

이 시편은 1절과 2절만 그나마 괜찮고 나머지는 계속 극심한 고통과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일반적으로 슬픔과 절망으로 시작하는 비탄시들도 마칠 때는 소망과 기쁨을 노래하는데, 이 시편은 끝까지 아무런 반전 없이 탄식이 이어집니다. 이 시편에는 분명한 신뢰의 표현도 없고 찬양과 감사는 더욱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시인은 12절에서 하나님께 자기 영혼에는 복이 아니라 재난이 가득하고 자기 생명은 죽음에 가깝다고 말합니다(3절). 그의 현재 모습은 죽은 자와 다름 없는 상태에 갇혀서 벗어날 수가 없어 보입니다(3~8절).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눈이 쇠할 정도로 우는 것뿐입니다(9절). 그는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두 손을 들고 기도하는데, 그 기도문은 네 번에 걸쳐 절망을 표현하는 반어적 수사를 반복합니다(10~12절). 그중에서도 제 마음을 뒤흔드는 단어는 “잊음의 땅”이었습니다. 이 말은 제게 세상이 다 저를 잊어주기를 바라면서도 정말로 하나님까지 저를 잊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우울감을 극도로 올려 주는 말이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극도의 우울 속에서 기도로 밤을 새웠고 아침에 되었습니다(13절). 그는 버림받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기도를 끝내지 못한 채 어릴 적부터 당한 고난을 곱씹으며 당혹감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그의 주변에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가 아무도 없었습니다(15~18절). 이렇게 이 시편이 끝나버렸습니다. 믿음의 다짐도, 소망의 표현도 없이 그냥 이렇게 기도가 멈추었습니다. 마치, 밑바닥이 안 보이는 골짜기를 허망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 끝없이 펼쳐진 어두운 광야를 먹먹하니 혼자 걷는 느낌이기도 합니다.

이런 기도가 실린 이유?

저는 이 시에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울부짖었던 절규의 편린을 조금이나마 맛보았습니다. 악인들이 당할, “영원한 단절”이라는 둘째 사망의 한 단면을 일견했었습니다.

시편 88편은 온통 암흑이고 절망뿐이지만 시인은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시편은 우리에게 어떤 어둠 속에서라도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런 절망 속의 외침도 주님께서는 기도로 받아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기도) 어떤 절망과 고통의 어둠 속에서도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