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일 금요일 예수바라기] 떠남에서 보냄받음으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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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더 깊고 맑고 유현한 세계, 하나님의 명령이 있는 그 땅으로 나아가려는 바람은 번번이 현실의 인력에 무산되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더 깊고 맑고 유현한 세계, 하나님의 명령이 있는 그 땅으로 나아가려는 바람은 번번이 현실의 인력에 무산되곤 하기 때문입니다. 버릴 것을 과감하게 버리는 것, 또한 어렵습니다. 버린다는 것과 동시에 한 가지에 매진한다는 것인데, 이마저도 녹록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를 두고 성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고백록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은 나의 옷자락을 슬쩍 치면서 고요히 ‘당신이 우리를 정말 버리고 떠나가렵니까?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는 당신과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없단 말입니까? 이제부터는 당신이 이런일 저런 일을 영원히 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라고 속삭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현상을 두고 ‘습관의 폭력’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이 글에서처럼 사람은 새것을 추구하면서도 익숙한 것에 집착합니다. 익숙한 것이 주는 안락함과 위안은 떨쳐 버리기 어려운 유혹이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성경은 끊임없이 ‘떠남’을 요구합니다. 아브람은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불확실한 미래에 자기 인생을 맡겨야 했습니다. 야곱은 돌베개를 베던 그 날부터 떠돌이로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요셉도 물 없는 우물에 떨어지고 끝에는 종으로 팔려 가는 비운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신앙을 하지만 이 이야기가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 뒤의 상황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약해진다는 말과 같습니다. 마치 껍질 없이 살아가야 하는 민달팽이와 같은 신세가 되는 것이죠.
낯섦이 주는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익숙한 세계에 매달립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매달리는 삶은 존재가 아니라 소유 중심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안을 대신할 수 있는 물건, 위치 등 다양한 것을 모음으로 불안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 삶의 근본적인 불확실함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원하든, 혹은 원치 않던 누구에게나 한계는 찾아옵니다. 유한함을 깨닫는 것, 질병, 죽음, 허무는 초대받지 않았지만, 손님으로 우릴 찾아옵니다. 그리고 우리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립니다. 우리 삶을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 믿었던 것들이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을 때, 우리 마음과 영혼은 흐르는 모래에 갇힌 것처럼 아래로 내려갑니다.
바로 이것이 떠남으로, 혹은 떠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이 빚어낼 미래입니다. 오늘 우리 삶에 소유한 것은 무엇입니까? 너무나 익숙하고 안정을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존재가 아닌 소유로 살게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 컨텐츠 제공 : 월간 예수바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