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7일 목요일 예수바라기] 우리의 사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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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사랑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말세를 온전히 살아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듣고 보고 만진

사도 요한은 생명의 말씀을 잘 압니다. 친밀하다고 할 정도로 잘 압니다. 그는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를 듣고 자세히 보았고 손으로 만졌고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말합니다(요일 1:1-2).

그런데 요한은 자기에게만 나타났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만 들었고 보았고 만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우리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같이 살았으니 이 말이 이해가 되는데 우리는 언제 요한처럼 예수님을 듣고 보고 만지고 했나요?

여기서 생명의 말씀은 성이 남성입니다. 그런데 동사들 들은 바, 본 바, 만진 바는 모두 중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성은 예수님을 말하고 중성은 말씀과 걸립니다. 다시 말해 생명의 말씀은 예수님과 예수님이 전하고 예수님이 행하신 복음을 함께 포괄합니다. 정리하면,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 만진 것처럼 우리도 복음의 말씀을 통해 사도와 동일하게 보고 듣고 만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대하는 일은 우리가 주님을 대하는 일과 동일한 사건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 사도 요한처럼 동일하게 그분과 친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이유

요한은 2절에서 자신이 듣고 보고 만진 생명의 말씀을 전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3절에서 친밀한 우리가 아직 덜 친밀한 너희에게 전하는 이유는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 사귐의 질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사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에 우리가 함께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귐의 누림을 이제 너희 즉 아직 그 친밀함을 다 모르는 자들에게까지 이르게 하고 싶어서 나타나신 그분을 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교하는 이유는 이러한 사귐을 위함입니다. 이러한 하나됨의 사귐이 없는 선교와 전도는 결과주의, 성과주의이고 거짓된 사귐입니다. 그것은 선교가 아니라 배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과 더불어 친밀한 사귐이 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