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유대인이 다 구원받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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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총회 성경연구소의 성경 난해 문제 해석

Interpreting Scripture: Bible Questions and Answers


[대총회 산하에 봉직하고 있는 선발된 학자 49명이 내놓은 성경 난제 94개에 대한 균형 잡힌 해석들]

모든 유대인이 다 구원받는가?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롬 11:26).

로마서 9∼11장에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에 관한 문제 및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서 각각 그들이 맡은 역할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스라엘은 메시야로서 예수를 거절하고 이방인들은 그분을 받아들인 것을 대조하면서, 사도는 주목을 끄는 진술을 한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11:26). 액면 그대로 보면, 이 구절은 미래에 언젠가 온 유대 민족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이렇게 믿는 해석자들이 상당히 많다.
이런 사람들은 문자적 이스라엘 민족의 종말론적 회심 및 예수 재림 직전에 다윗 왕국이 회복될 것을 예견한다.
다른 이들은 이 구절에서 “온 이스라엘”이 모든 시대를 통해서 나올 믿는 유대인들의 충만한 수 혹은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남은 자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속하는 또 다른 해석은 “온 이스라엘”이 영적 이스라엘 곧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뤄진 교회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스라엘”에 대한 바울의 정의: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바울의 확언은 로마서 9장에서 시작된 민족적 이스라엘의 역할과 위치에 대한 긴 논의가 끝나갈 무렵에 나오는데, 그는 시작 부분에서 자기의 혈통을 밝히면서 동포 유대인을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9:3)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이와 함께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를 수정하여 민족적 개념에만 기초된 견해와는 다른 정의를 내린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9:6, 7).
다시 말하면, 이미 하나님께서는 육적인 혈통이 아닌 다른 근거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유업을 나눌 것임을 분명히 밝히셨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첫 번째 아들 이스마엘이 유업에서 제외되어 그의 어머니 하갈과 함께 쫓겨난 데서 나타난다(참조 갈 4:21∼31). 그뿐 아니라, 첫째 아들 에서 대신 야곱이 선택받은 것도 구원이 행위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과 자비에 달려있다는 원칙을 확고히 세워 주는 또 하나의 본보기로 주어진다(롬 9:11). 그러므로 구원의 길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다(9:24∼26).

민족적 이스라엘의 문제점:
이스라엘의 역사가 보여 주는 것처럼, 그들이 선지자들을 통해 보낸 하나님의 자비로운 탄원을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거듭하여 심판을 내리셨다. 로마서 9장이 지적하는 대로,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만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9:27∼29).(1) 바울은 민족적 이스라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것 및 율법의 지식과 그것의 철저한 준수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나 이런 것들로 이방인들과 자신들을 구별하여 자기들만 구원받기로 되어 있다고 믿었다(롬 2:17∼20; 9:4; 갈 2:11∼16; 참조 행 15:10, 11). 반면, 이방인들은 아브라함처럼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약속된 구원을 붙잡았다(롬 9:30∼33; 4:16).
이스라엘의 이런 비극적인 넘어짐으로 인해 바울의 마음에 고통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10:1). 그는 이미 율법에 기초해서는 아무도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그래서 구원받을 수) 없음을 밝혔다. 바울은 계속하여 구원에 대한 두 가지 접근방식 곧 율법에 기초한 것과 믿음에 기초한 것(참으로 효과적인 유일한 방법)을 대조한다(10:2∼17). 그런 다음 그는 이스라엘이 이런 방법에 대해 잘 몰랐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고 말한 후, 다윗과 모세와 이사야 등의 성경적 근거(10:18∼21)를 들어 그럴 수 없다고 반박한다. 민족적 이스라엘은 절대로 변명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는가?:
이어지는 논리적 질문은, 그러면 ‘이스라엘이 잃어버림을 당했는가?’ 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거절했는가?’이다. 바울은 분명하게 대답한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11:2). 바울이 이런 보증을 준 이유가 민족적 이스라엘이 모두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님을 말하는 데 있음을 주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9장에서와 마찬가지로 11장에서도 바울은 이런 확신의 근거를 남은 자의 개념에 두고 있다(2∼5절). 남은 자만 구원받을 것이라면 이스라엘이 모두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님이 명백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울이 “온 이스라엘”(헬라어 파사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것(롬 11:26)이라고 확언할 수 있었는가? 이 난제를 푸는 열쇠는 로마서 9:6에서 바울이 “이스라엘”이라는 용어를 두 가지 상이한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1) 민족적 이스라엘(야곱/이스라엘로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 (2)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이스라엘”(아브라함의 육적 후손뿐 아니라 믿는 이방인도 포함함). 이에 덧붙여, 9:6에 나온 이스라엘을 넓은 의미보다는 좁은 의미로 정의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선택받은 자만을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이 일반화된 또 다른 해석이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된 자를 일컫는 말로 정의가 내려져 있다(참조 출 19:5, 6). 또한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민족적 이스라엘보다 더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 갈라디아의 이방인들을 나타내는 이스라엘(4:28)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로서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자(3:29)를 지칭한다(우리는 갈라디아서가 아직 기록되지 않은 것처럼 로마서를 해석할 필요는 없다.).(2)

민족적 이스라엘과 구원:

바울은 어디서도 민족적 이스라엘이 모두 구원받을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로마서의 이 부분에 이르기까지 설명하려 애쓴 것과 두말할 것도 없이 모순될 것이다. 그에 따르면 그 구원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혈통적 후손에 근거돼 있거나 혹은 육적 이스라엘 민족에 속했다고 주장하는 모든 자에게 요구된 모세 법의 준수에 기초되지 않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민족적 이스라엘 전체가 도매금으로 잃어버림을 당할 것이라고 말하는 암시도 로마서 9∼11장에서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어떤 사람은 확실히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 점을 두 가지로 강조한다. 첫째, 바울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이 모두 다 이스라엘에 속한 것은 아니라(헬라어 우 판테스)고 설명하는데(롬 9:6∼7), 이는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에 속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둘째, 그는 이스라엘의 모든 자가 다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에 귀 기울이지는 않았다(10:16)고 말하는데, 이는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복음에 귀 기울였음(바울이 그 예임)을 암시한다. 바울은 자기 동포 중 “얼마”를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11:14)을 표현하면서 그 점을 명시한다.(3) 그가 “얼마”를 구원하려 했다면 그것은 모두가 구원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원 가지”(유대인, 11:21) 중 얼마가 참감람나무(믿는 유대인 중 남은 자들, 11:17; 참조 11:5)에서 잘려나가므로(4) “돌감람나무”(이방인, 11:17)의 가지들이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질 수 있었다(11:19). 바울은 곧바로 덧붙여, 믿지 않은 유대인이라도 “한 번 잃어버림을 당하면 영원히 잃어버림을 당하진” 않는다고 말한다.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11:23). 사실, 바울은 많은 사람이 다시 접붙임 받기를 바라면서, 그들의 “받아들임”에 관해 낙관적으로 말하여 그것을 부활에 비유한다(11:15; 참조 겔 37:1∼14).

“복음 기별의 마지막 선포에 있어서 지금까지 무시되었던 계층의 백성들을 위하여 특별한 사업을 해야 하는 이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자들이 세상 각처에서 발견되는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기를 기대하신다”(사도행적, 381).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잘려나간 원 가지]”에게 마음의 완악함이 일어났다(롬 11:25).(5) 그렇다면 이들이 어디로 들어왔는가? 이스라엘에게로 들어왔다. 바울은 바로 다음 절에서 이 점을 명시한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11:26). 그러므로 바울이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확언한 것이 이방인들이 들어 온 이후를 말하기 때문에 여기서 “온 이스라엘”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함한다. 이 점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바울은 로마서 11:26, 27에서 두 개의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 첫 번째 것인 이사야 59:20, 21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말하면서 그들 중 어떤 이들이 믿지 않는 자들의 제거됨(바울의 은유를 사용하여 말하면, 원 가지 중 얼마가 잘려나감)을 통해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지를 다루는 59장의 절정을 이룬다.(6) 두 번째 구절인 이사야 27:9은 바벨론 포로기 후에 구원이 하나님의 죄 용서로 말미암아 이를 것인데,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그것을 “새 언약”이라 부르셨다(렘 31:31∼34; 참조 59:21). 유대인들이 불순종하고 메시야를 거절함으로,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적 이스라엘도 동일한 자비가 필요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이것은 바울이 앞선 논의의 마지막 부분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죄 아래” 있고 구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것과 같은 논점을 되풀이한 것이다(롬 3:9; 참조 갈 11:25). 바울이 확실히 하고자 한 것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이 완악하도록 내버려 둔 하나님의 깊은 목적은 구원이 로마에 있는 이방인에게도 제공되어 그들이 이방인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었다(롬 11:25).

요약: 바울은 유대인 전체가 구원받을 것이라는 개념을 갖은 적이 없다. 로마서 9∼11장에서 그는 그들 중 “얼마”가 구원받을 것임을 논증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민족적 이스라엘의 “얼마”는 마음이 완악해져서,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할 때만 구원받을 것임을 지적한다(11:23).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구절은 이미 구약의 예언적 기대의 일부였던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구원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이 믿고 영적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와 연합한 것 곧 “접붙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확증하는 기능을 한다.
오늘날 우리의 사명 중 중요한 것은 복음을 가지고 우리의 유대인 친구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포함한다.

Clinton Wahlen

<미주>

(1) 성경에 나온 이 개념에 관해서는 Toward A Theology of the Remnant, An Adventist Ecclesiological Perspective (Silver Spring, MD: Biblical Research Institute, 2009), 23∼42, 61∼84.
(2)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모금에 관해서 고린도교인들에게 권면하면서, 이런 권면을 이미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 전달했다고 말한다(고전 16:1). 그러나 갈라디아서 2:10에 의하면 이 모금을 위한 계획을 아직 세우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갈라디아서는 고린도전서보다 더 일찍 기록되었을 것이다. 로마서를 보면 바울이 이미 가난한 자들을 위해 모은 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이었으므로(롬 15:25∼27), 로마서는 훨씬 후에 기록되었다고 본다.
(3) 바울은 문자적으로 “내 골육의 친척”이라는 특이한 표현(무 텐 사르카)을 사용하여 한편으론 자신의 동포 유대인과의 연대감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론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이스라엘” 개념보다는 민족적 이스라엘을 지칭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4) 이 이미지를 “거룩한 씨”(히브리어 제라 코데쉬, 사 6:13)라 불리는 남은 자 곧 잘려진 나무에 남아 있는 그루터기의 이미지와 비교하라.
(5) 저자 개인의 번역
(6) 이사야 59:20은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이스라엘 가운데 얼마가 구원받을 것임을 말하는 긍정적인 진술, 참조 롬 11:23)를 언급한다. 같은 절에 대한 <70인역>의 번역(바울이 여기서 인용함)은 하나님이 “야곱 중에서 경건치 않은 자”를 제거할 것이라고 말한다(얼마는 이스라엘에서 제거될 것을 말하는 부정적인 진술). 앞 절(사 59:19)에서 “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자들을 언급했는데, 바울은 이 말을 염두에 두고 궁극적으로는 이방인이 여기에 포함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상이 본문에 명시돼 있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