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회에 이어 청년세대와 기성세대가 각자 다른 사고방식을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며, 화합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먼저 담아 기도하며 작성했습니다.
서반석 목사(ACT영남 지도목사 / 성지교회 담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감염증이 우리의 일상을 무너뜨린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이 기간 동안 사회와 일상은 거의 멈추다시피 했다. 사람들은 희망과 좌절의 과정을 여러 번 반복했다. 이제는 희망적인 전망보다 절망적인 기사가 더 많은 것을 보면서 육신과 정신, 영적 상태까지 지쳐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부정적인 현실에서 가장 큰 걱정은 미래세대에 대한 불안이 아닐까 싶다. 부모는 자녀들이 학업에서 온전하게 교육을 받지 못하는 거 아닌가 걱정한다. 그렇기에 예전보다 더 많은 시간과 재원을 투자해 아이가 학습에서 뒤지지 않도록 애쓴다.
친교와 체험을 중심으로 활동적인 시절을 보내는 학생과 청년들은 부모의 염려와 통제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적절한 분출구가 없는 청년들의 관심은 세상에서 주는 오락과 쾌락이라는 잘못된 분출구에 집중하고 만다.
요즘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듣는 가장 가슴 아픈 말은 “교회를 간지 하도 오래돼서”라는 말이다. 물론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그래도 무조건 교회에 가야 한다고 강요할 순 없다. 하지만 “교회에 간지 하도 오래 됐다”는 말이 부정적으로 마쳐지면 곤란하다. 코로나19로 교회와 담을 쌓는 시간이 길어지면 안 된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지고, 세상 문화와 더 친숙해지면 교회의 미래세대에게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게 있다. 이들 세대는 코로나19 발생 이전부터 교회보다 사회 문화에 더 관심이 많았던 세대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희망보다 절망적인 소식을 더 자주 접하는 시기, 재림교회는 미래세대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 분노의 대상이 명확하지 않은 시대
지난해 ‘분노조절장애’와 관련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보도에 따르면 최근 5년 사이 우리 사회에서 ‘분노조절장애’ 환자가 30%나 급증했다는 것이다. 팬데믹 이후 불안한 마음과 활동의 최소화로 우울감을 느끼는 ‘코로나 블루’는 이제 흔한 용어가 됐다. 증상이 더 극단적으로 바뀌어 우울감을 넘어 분노의 감정을 느끼고 철저히 고립되어 외로움을 느끼다가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는 ‘코로나 레드’와 ‘코로나 블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심리적 피로와 정서적 문제를 대변한다.
이러한 심리적 불안을 일상에서 그릇되게 표출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고 폭력을 행사하거나, 반대로 마스크를 쓰라고 조언하다 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혹시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 코로나 확진자가 아닐까?’라는 불안감이 은연 중 계속된다. 생계가 위협받고 자영업자들이 무너지는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안타까운 상황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필자는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고민해 보았다.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분노’가 가득한 사회에서 어디에 분노를 느껴야 하고, 분노감정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 모르는 게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팬데믹 이후 다양한 방면에서 발생하는 높은 분노가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특히 윤리적 문제에 자유로울 수 없는 종교단체에 무분별하게 표출되고 있어 걱정이다. 물론 종교단체가 보이는 이기적인 모습은 그 무엇으로 용납될 수 없다. 하지만 그 이상의 분노가 종교단체와 교회로 집중되고 있어 우려스럽다.
교회를 향한 분노는 청년세대가 진리 찾는 과정에 장애물로 작용한다. 앞서 작성한 글에도 언급했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합리성을 추구하는 세대다. 본인이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중요하다. 합리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면 그 어떤 세대보다 진리를 수호하고 충성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교회가 받는 무분별한 분노와 지탄이 이들 세대가 합리적으로 납득하기 위한 입구를 막아서고 있다. 이미 교회를 향한 부정적 시각이 최고조에 달해 있다. 교회는 오만하고 이기적이며 폐쇄적인 곳이라는 인식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믿음이 있으면 코로나에 걸리지 않는다는 비이성적인 주장이 미래세대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강화시켰다.
그렇다고 이렇게 진리의 문에 쌓여가는 장애물을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재림교회는 비이성적인 주장을 하는 곳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외쳐야 한다.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소극적으로 지켜보는데 머물러선 안 된다.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서둘러 찾고, 적절한 방법을 시행해야 한다.
물론 많은 교회에서 펜데믹 여파로 발생한 이웃의 어려움을 돌보고 있다. 마스크를 기부하고, 독거노인을 찾아가고, 연탄을 배달하는 봉사와 나눔의 소식이 가슴 따뜻하게 다가온다. 재림교회가 갖고 있는 선한 감화력이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이어지는 게 참으로 감사하다. 이러한 소식을 청년들에게 전할 때, 이기적이지 않고 이타적인 교회의 모습을 소개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다행스럽다.
세상이 가진 증오와 분노를 우리가 모두 해소할 순 없다. 그러나 세상이 가진 증오와 분노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미래세대에게 ‘우리도 함께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중이며,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간의 행복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공동체’라고 말해야 한다. 이들이 교회로 발을 디딜 수 있도록 최소한의 장애물을 제거해 주는 게 지금 이 시대, 우리가 해결해야 할 역할이다.
그러므로 최소한의 관심을 보이는 청년들에게 우리가 이성적인 진리와 합리적인 활동을 하는 공동체라는 걸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필자는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인간의 행복을 기본으로 기록된 책이라는 확신이 있다. 그렇기에 성경에서 제시하는 하늘의 법칙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법칙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말씀을 연구해 청년들에게 제시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그런 목회자가 되기 위해 애쓴다. 재림교인이 갖고 있는 선한 마음과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헌신의 마음이 실제 사역 현장에 적용되고, 공유되어 교회를 향한 무분별한 분노가 해소되길 원한다. 나아가 교회를 향해 분노하도록 만든 사람과 악한 영의 활동을 무력화시키는 교회가 되길 소망한다.
■ 분노를 희망으로 바꾸는 교회가 되길
교회는 세상에 만연한 분노감정을 하나님 말씀의 능력에 힘입어 희망으로 바꿔주는 곳이어야 한다는 게 필자의 궁극적 생각이다. 정부나 세상의 지식이 제시하는 가치와 방법보다 더 매력적이고 분명한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이 엄습해 올 때, 어디에 분노를 표출해야 할지 모르고, 서로 증오하는 감정이 관계를 깨트려 버리려 할 때, 그들이 희망을 찾는 곳이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마쳐갈 때, 사랑하는 형제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켜 세우셨다. 이때를 기점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지도자는 그를 죽이기 위해 공모했다. 예수님을 향해 분명한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때,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분명한 목적을 갖고 예수님을 증오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하루 먹고 살 것을 염려하는 사람들이었다. 로마의 압제하에 무거운 세금과 통제되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이 가득한 이들이었다. 그들의 마음에는 명확한 대상이 없는 증오와 분노가 가득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사랑의 말씀은 희망으로 다가섰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점점 많아지고, 사람들이 갖는 희망은 점점 거대해져 새로운 왕에 대한 기대감이 무르익었다. 십자가의 마지막 사역을 통해 우주의 왕으로 대관식을 치르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드디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다. 그 행렬을 따르는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길가에 깔고 종려나무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다. 어린아이까지 왕의 행차를 따르며 희망이 가득한 분위기가 성을 채워나갔다.
그러나 갑자기 상황이 변했다. 제자 중 한 명이 예수님을 팔았고, 군인들은 그를 거칠게 길거리로 끌고 돌아다녔다. 여러 번의 불법재판을 지켜보며 무리들은 예수님을 향해 품었던 희망이 배신당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마음에 갖고 있던 희망이 배신당하고, 다시 절망의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분노가 예수님께 집중됐다. 그들은 빌라도의 제안에 그 분노를 담아 대답한다. ‘살인자와 예수 중 누구를 풀어 줄까’라고 묻는 질문에 지금까지 쌓아두었던 대상이 없던 분노를 자신이 갖고 있던 희망을 배신한 예수에게로 쏟아낸다.
과거 이스라엘에서 일어났던 무분별한 분노의 공격이 재현되고 있는 이때, 그 분노를 담담히 감당하신 예수님의 모본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매일 지치고 힘든 상황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희망이 좌절되면서 집중된 잘못된 분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셨다. 인간의 이기적인 생각으로 시작된 희망이 좌절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고, 그들이 하늘에서 시작되는 희망을 품고 살길 바라시며 가르치셨다.
■ 청년들은 희망을 좇고 있는 무리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 그중에서도 청년세대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던 것처럼, 지치고 좌절되는 상황과 부정적 요소가 많은 세상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조금이라도 희망을 보기 위해 노력한다. 물질적인 것을 축적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희망적인 세상을 바라며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주는 히어로물에 열광한다. 희망을 얻기 위해 교회에 발을 들여본다.
부디 희망을 품고 교회에 발을 디딘 청년들이 세상과 다름없는 교회의 모습에 실망하며 발길을 되돌리는 일이 없길 바란다. 혹은 하늘의 희망을 바라볼 수 있도록 시선을 돌리지 않음으로 자신의 마음에 있는 희망이 배신당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적의를 갖고 분노하게 하는 원인이 내가 되지 않길 당부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개역한글)
교회는 절망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하늘에 속한 희망을 볼 수 있도록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사마리아 여인이 하늘의 희망을 보고, 그의 삶이 완전히 희망의 삶으로 변화되었듯, 절망하며 끌려온 간음한 여인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용서의 손가락을 통해 희망을 갖고 하늘을 바라본 것처럼, 이제 희망을 찾는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는 말씀, 행동, 진리가 되는 재림교회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