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익 교수(삼육대 신학과)
코로나19는 생각지 못한 일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마스크 쓰는 문화가 전 세계로 번져가고, 손을 씻고 개인위생과 청결을 중요하게 여기는 생활습관이 확실히 자리 잡고 있다. 아마도 온라인으로 쇼핑하는 문화는 점점 확산될 것이다. 특별히 필자 개인적으로는 목회를 시작한지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가족과 가장 오랜 시간 함께하는 상황을 누리고 있다. 전혀 다른 삶의 양상이 벌어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여러 가정에서 자녀들이 집에만 있으므로 해서 달라지는 것이 많아졌고, 부부 간에도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필자에게는 여러 가지 긍정적인 변화가 이르러 왔지만, 미국에서는 가정폭력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슬픈 현실이다. 한국에서도 게임기가 동이 났다는데 부모들이 자녀교육을 위해 무엇을 해야 될지 모른다는 반증이다. 자녀 세대의 신앙교육은 어떠할지 염려가 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여러 사회 경제적인 변화와 더불어 종교생활의 변화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교회 안에서 이런 논쟁이 갈등과 분리로 발전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이런 일들을 통해 오랜 시간 습관적으로 이뤄지던 우리의 예배를 포함한 모든 교회활동과 개인적인 신앙생활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숙고가 있었으면 좋겠다.
늘 우리는 형식을 의미보다 앞세울 때가 많았는데, 이번 기회에 우리의 종교적 형식이 의미를 놓치지는 않았는지 고민하면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회복하는 계기로 삼으면 좋겠다(요한계시록 2장 5절).
■ 코로나19는 예배의 자유를 침해하는가?
코로나19 사태로 교회에서 현장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자, 여러 곳에서 공적 예배의 운영여부가 믿음과 예배의 자유문제로 발전해 갈등이 커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최근에 만난 한 성도는 예배 문제로 논의하다가 감정의 골이 깊어져 이번 사태가 끝나면 다른 교회로 옮기겠다고 했다.
한국에서 가장 큰 종교단체인 불교계와 가톨릭은 신속하게 공식 집회를 멈추고, 온라인으로 종교 활동을 옮겼다. 반면, 여러 개신교회와 일부 재림교회에서는 현장 예배의 지속 여부를 두고 서로 다른 의견이 엇갈려 표출됐다. 그렇다면, 왜 정기적으로 모이는 공적 예배가 죽고 사는 문제로 다뤄지고 있을까?
코로나19 사태로 예배를 멈추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를 논의하기 전에 먼저 예배란 무엇인지에 대해, 즉 예배 신학에 대한 이해와 기독교 예배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좀 더 심도 깊게 다룰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우리는 예배의 형식만 주목하고 예배의 참 의미를 숙고하는 일을 놓치고 살지는 않았는가? 세 천사의 기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선포는 사실 안식일 대예배를 교회당에서 드리라는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사실 성경과 예언의 신에는 안식일이 예배일로 사사로운 일이나 오락을 행치 말고 거룩하게 지키라는 사실을 언급한 것을 제외하고 예배의 형식이나 횟수, 장소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물론 구약에서 안식일에 드리는 제사에 대해 세세히 언급했으나 현대에 적용할 수가 없는 사항이다.
많은 안식일 예배의 관행은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교회들에서 가져온 것이다. 안식일학교를 9시30분에 시작하는 것도 미국 청교도들이 아침에 닭과 가축들의 모이와 물을 주고 씻은 후 정장을 하고 마차를 타고 교회 와서 주일학교에 참석하는 시간에 기원한다. 당연히 11시 예배도 이렇게 청교도들이 주일학교를 마친 이후의 시간인 것이다.
재림교회의 화요기도회는 개신교의 수요기도회에서 왔다. 히브리서 10장 25절의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는 말씀을 적용하여 주중에 기도회 형식으로 한 번 더 모인 것이다.
금요예배의 기원도 가톨릭교회와 정통주의 교회에서 매일 저녁 기도회와 연관이 있다. 금요일 저녁예배를 베스퍼스(vespers)라고 불렀는데 개신교가 금요일 저녁예배를 받아들인 것이다. 한국 개신교는 금요 철야기도회로 열고, 재림교회는 안식일 환영예배의 개념으로 금요집회를 갖기 시작했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금요 예배를 베스펄스(vespers)라고 부른다.
성만찬예식을 1년에 4회 시행하는 것과 주일학교를 안식일학교로 전환시켜 도입한 것, 그리고 안식일 대예배의 순서도 교회 역사의 특정 시점에 특별한 상황 속에 받아들여진 것이다. 성경이나 예언의 신에는 의미는 제시되어 있지만 순서절차나 시행횟수, 순서의 적정한 시간대나 순서의 길이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은 없다. 하지만 세대가 지나가면서 기원과 이유와 정신은 사라지고 형식이 불변의 전통으로 굳게 되어 절대화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예배의 본질이다. 초기 교회 성도들은 핍박으로 공적 예배를 드릴 수 없어 대부분 가정예배를 드렸다. 북한이나 근본주의적 이슬람 지역에서는 마음으로만 예배를 드릴 수 있다. 따라서 예배를 어디서 드리느냐가 쟁점이 아니라 이번 기회에 참된 예배란 무엇인지를 묵상하고 숙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를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삶이 예배라는 것을 더욱 강조할 필요가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교회의 공적 예배가 중단된 가운데 북미지회의 한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종식시키기 위해 교회 문을 닫는 것은 요한계시록 13장 사건이 아니라 레위기 13장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3장처럼 행동하되, 로마서 13장의 말씀이 이뤄지게 하라.”
해석을 하자면 교회 공적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된 것은 짐승의 표처럼 종교법 때문이 아니라 전염병 환자는 격리시키라는 공중위생법 때문이다. 또한 급속한 전염의 시기에 이웃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의 우려에 대해 배려하는 사랑의 정신으로 인내하며 사회적 거리를 둬야 하고, 공익을 위한 국가권력 행사에 순종하는 것이 선한 일이다.
얼마 전 집 근처에 사시는 초신자 한 분을 만났는데, “요즘 교회에 가고 싶어 죽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분의 말씀은 군 입대하고 난 후 안식일에 교회 나가려고 씨름하면서 겪었던 간절한 감정을 상기시켜주었다. 교회 문을 닫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조급히 생각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롬 8:28). 이 사태를 통해 하나님은 한국 재림교회가 전화위복하기를 원하신다.
사실 우리는 침례 받기 전에 교리 공부는 많이 하지만, 성경공부법, 기도법, 그리고 공중 예배와 가정예배, 그리고 개인 예배 등을 통해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체험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배울 기회가 많지 않았다. 코로나19 사태로 재림성도들 사이에서 예배의 본질이 회복되고 예배의 열정이 되살아나도록 특별한 예배 부흥회나 특별 세미나를 자주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사실 종말론적으로 보면 요한계시록 14장의 세 천사의 기별 속의 예배 문제의 본질은 순서나 예배시간이나 장소의 문제, 혹은 안식일 토요일이냐 일요일이냐의 문제를 넘어선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백성이 되고(로마서 12장 1절), 하나님의 말씀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백성이냐 하는 것이 더 우선되는 쟁점이다(사무엘상 15:22, 고린도전서 10장 31절). 이런 것들이 먼저 해결되면 나머지는 쉽게 풀린다.
무엇보다 영혼구원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헌물이라는 가르침도 강조되면 좋겠다(로마서 15장 16절). 교회 재정의 문제도 재정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 효율성을 높이는 긴축재정 운영이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IMF 재정위기 사태 때 많은 국민들이 금 모으기를 하면서 국가적인 외화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던 것처럼, 교회 사랑이 어느 누구보다 극심한 재림 성도들이 선교를 위한 재정위기 상황에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재정문제도 기도하고 교육하고 호소하면 위기를 반전의 기회로 삼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실 것이라 믿는다.
■ 코로나19는 하나님의 심판인가?
신정시대였던 구약에서 전염병은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전염병이 누가복음 21장 11절에서 종말의 징조로 “큰 지진과 기근”과 더불어 언급된 것이 전부이다. 자연재해로 고통당하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위해 이방인 교회가 헌금하여 돕는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신약교회에서 자연재해로 인해 회개하자는 메시지를 교회 안에서 나눈 사례는 없다.
예언의 신에서는 종말시대에 사단이 공기를 오염시키고 독소를 뿌린다는 표현이 자주 나타나는데, 『각 시대의 대쟁투』에서는 이에 더하여 매우 충격적인 묘사가 나타난다.
“그는 치명적 병독을 공중에 뿌림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질병으로 죽게 한다.”(590).
이 문구 앞에는 사단이 자연재해를 일으킨다는 진술이 나타난다.
“사단은 뜻하지 않은 사고, 바다와 육지에서 일어나는 재난, 큰 화재, 사나운 풍랑, 심한 우박, 폭풍우, 홍수, 회오리바람, 해일, 지진 등 수많은 방법으로 각 지역에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다 익은 수확물을 쓸어버림으로 기근과 불행이 뒤따르게 한다.”(589-590).
그런 후 앞서 언급한 사단이 병균을 뿌린다는 표현이 나타나고, 그 다음에 그 결과가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일은 점점 더 빈번하고 비참해져 간다. 멸망이 사람과 짐승에게 똑같이 엄습한다.”(590). 현대의 ‘인수공통 전염병’(人獸共通傳染病)을 상기시키지 않는가?
사단이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 사단의 이런 활동하는 목적은 모든 재난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거나, 재난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법과 다르게 살아가는 재림 성도들 때문에 일어났다는 여론을 일으키기 위해서이다.
“그 때에 큰 기만자는 사람들에게 이런 재난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고 역설할 것이다.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을 자극한 부류에 속한 자들은 범죄자들에게 언제나 무언의 견책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이 그들이 당하는 모든 재난의 원인이 된다고 비난할 것이다.”(590).
같은 책에서 강신술의 역사도 동일한 방향으로 역사할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따라서 종말 시대에 일어나는 모든 재난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는 일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 코로나19 사태를 재림의 징조로 적용할 때 주의할 점
앞서 언급한 사항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코로나19 사태를 재림의 징조로 적용할 때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1) 이 사태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전하는 것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
신정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전염병을 통해 직접 심판하신 사례가 성경에 나타난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신약교회 시대에는 이 같은 사례를 찾기 어렵다. 특히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종말시대의 재앙과 언급하여 예언의 신에서는 이 같은 재앙을 허락하신다는 표현이 다수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재림 전 최종 단계에서 7재앙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 천사들을 통해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도록 허용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현재의 사태와 연관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기별을 전할 때 앞서 인용한 것처럼 사단이 하나님을 비난하도록 만들기 위해 조작하는 재앙이 아닌지 먼저 숙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7재앙에서는 악인만 멸망당하지만, 재림운동 이후 현재까지 여러 자연 재난과 전쟁에서는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도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4월 20일 대총회 관계자에 의하면 뉴욕에서만 재림교인들이 50명 전후로 사망했다고 한다.
사실 세속 사람들조차 초자연적 재해를 맞이하면 하나님이 내렸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치셨다”(룻 1:13), 혹은 “하나님의 손”(사무엘상 5장 11절)이란 표현 등으로 재난을 묘사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질병이나 신체적 장애를 인간의 죄와 연결된 하나님의 징벌로 해석하는 당대 종교적 문화에 대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답하신다. 재난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게 하는 기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재난의 때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구약에서 욥은 사단이 내릴 징벌로 고통당하고 있을 때 가장 측근들이 찾아와 그가 지은 죄로 하나님께 심판받으니 회개하라고 권면한다. 욥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비난하는 친구들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요청한다(욥기 19장 21절). 이어 욥은 “대언자”를 언급하는 것을 통해 자신이 당한 재난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음을 보여준다. 그가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자하는 것은 그들의 주장처럼 설사 자신이 하나님의 치심을 당했다 해도 재난 속의 자신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이다.
이런 욥의 요청은 현재 잘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떤 자세를 보여야 할지 지적해 준다. 육신적, 정신적,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 대해 예수의 심정으로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불쌍히 여기고 도울 방도를 찾는 모습이 재림성도 삶의 편린이 되어야 한다.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대재앙이 임한 지역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심판받는 자들이 아닐까하는 표현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일에는 신중을 기해야한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이 왜 이런 재앙을 허락하시느냐고 울부짖는 참담한 상황 속에서 위로와 격려의 자세를 보여야 한다. 사랑의 봉사와 헌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 사랑의 품성을 보여주며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이심을 증거 할 수 있어야 한다.
재림성도는 어떤 재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신 분이시라는 믿음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재난으로 고통당하는 이웃에게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사랑의 봉사를 통해 소망과 치유의 기별로 전하므로 ‘생명과 구원의 복음’을 보여주는 것이 재난의 징조 속에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선한 뜻이다.
(2) 이 사태가 전 세계적이기는 하나 재림의 긴박성을 알려주는 최종 사건은 아니다
이미 언론에도 소개됐고, 간단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 코로나19 사태나 최근의 큰 지진과 자연재해가 인류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아니라는 점이다. 전염병만 해도 페스트라 불리는 흑사병이 14세기 중엽부터 3년간 유럽대륙을 휩쓸어 적게는 몇 천만 명에서 크게는 몇 억 명대의 희생자를 야기했다. 20세기 들어 1918년에 처음 발생해 2년 동안 전 세계에서 2500만~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도 악명이 높다. 에볼라, 에이즈, 신종 플루, 사스 등의 피해상황을 일일이 다 비교하여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코로나 바이러스가 과거 어떤 질병보다 전염의 속도가 빠르고, 최근 변종이 발견되기 시작하여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대한 우려가 큰 것은 사실이다. 앞으로 더 추세를 지켜봐야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재 우리에게 엄청난 재앙으로 보이는 코로나19 사태는 앞서 언급한 과거의 전염병 사태의 피해상황 보다는 아직까지는 더 커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설사 현재 코로나 19가 과거의 대전염병 이상으로 악화된다 해도 이 사태는 앞의 사건들과 그 기능이 동일하다. 요한계시록 8~9장에 나오는 온 세상 인구의 삼분의 일, 특별히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만 죽임을 당하는 7재앙의 피해 상황과 같은 최후의 사건으로 나아가는 종말의 한 지계표일 뿐이다.
(3) 이 사태를 가지고 재림의 시기를 예측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깊이 말씀을 연구하는 분들 중에서 정확한 날짜를 정하진 않아도 종종 언제쯤이라는 예측을 너무 쉽게 하려는 시험에 빠지는 성도들이 가끔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경산교회 사경회에 참석해 가장 앞줄에서 말씀을 듣는데 강사께서 재림의 징조를 언급하면서 필자를 보고 “네가 결혼하기 전에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린 나에게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상당히 오랜 시간 어린 마음에 결혼 못할 운명이 되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내 어린 삶에 상당히 부담스러운 영향을 미쳤으나 결국 그분의 ‘예언’(?)은 빗나갔다.
레이건 대통령이 교황과 만났을 때, 아들 부시 대통령이 보수적인 기독교 지도자들과 회동하면서 나눈 종교적 담화에 근거해 일요일 휴업령이 이들 대통령 임기 내에 내릴 것이라고 단언하는 분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종종 개인적으로 개연성은 있어보여도 이런 식의 추론을 성도들과 성급히 나누면, 이후에 예상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 있다. 특히 매우 이성적인 젊은 세대에게 자칫 우리 기별의 본질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는 암초로 작용할 수 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재림교회뿐 아니라 개신교회 안에서 짐승의 표가 매매하지 못하게 한다는 성경의 진술에 초점을 맞춰 경제 금융위기를 통해 짐승의 표 예언이 매우 빠른 시기에 실현된다는 예언 해석이 널리 확산된 적이 있다. 재림교회 일각에서도 상당히 가까운 미래에 전 세계적인 금융-경제 공항이 일어나면서 일요일 휴업령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단정적 예측이 널리 확산되었다.
기억할 것은 결정적인 사건이 상당히 긴급하게 일어날 것이라는 암시는 그 방향성과 연관해 개연성을 가질 수는 있어도, 예측이 빗나갈 때 큰 부작용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는 점이다. 세계적인 경제 전문가나 투자 전문가도 예측은 하지만 미래의 경제 상황에 대해 단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간혹 2008년 경제위기를 예측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나, 그 역시 그 이후 다른 경제 위기 예측에서는 빗나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코로나19 사태가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연결되는 이 시점에 다시 경제로 종말사건을 예측하는 일이 많아질 것이다. 어떻게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할까? 2008년 경제위기에 대한 매우 정확한 분석으로 상을 받은 한국의 유명 투자회사 경제 분석가가 방송 대담에서 미래예측에 대해 말하는 것을 경청한 적이 있다. 사회자가 미래 예측을 질문하자, 그는 정부나 은행이나 기업이 과거에 발생한 경제위기에 대해서는 연구를 많이 해서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고 현재 어느 정도 대비가 잘 되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과거의 사례에 기초해 미래의 상황과 위기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무모하고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했다. 새로운 위기는 늘 과거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많은 경제전문가들은 경제 예측에 대해 과거의 일을 분석해 현재에 미치는 영향을 진단하고 미래의 방향성 정도를 전망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지적한다. 미래 예측은 단지 참고사항일 뿐인 것이, 생각지 못한 변수들이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시장을 이끌어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림성도들은 이런 경제적인 예측을 통해 지혜로운 재정의 청지기로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얻는다면 긍정적이다. 재정운영을 지혜롭게 하여 빚에 허덕이지 않고 삶의 안정성을 누리면서도 선교를 위한 재정적인 헌신을 정기적으로 할 수 있는 지혜로운 재정 운영을 위해 이런 거시적인 경제흐름에 대한 예측에 관심을 기우리는 것은 비난할 일이 아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장사할 사람들은 경제와 금융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신실한 청지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말론과 연관해서 경제 예측을 사용하는 일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경제의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전문가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경제, 더 나아가 국제 정치 상황에 대한 분석으로 미래를 예측하여 정밀한 종말 사건 시나리오를 단순한 표로 도식화하려는 시도는 성경과 예언의 신이 정해놓은 한도를 넘어가는 것이다. 사실 예언의 신에서는 종말 사건에 대해 매우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지, 구체적으로 어떤 시간표, 혹은 일어날 사건의 순서 혹은 구체적인 시간 프레임을 제시하지 않는다.
매일이 재림이라는 의식으로 살자
테드 윌슨 대총회장이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전 세계 성도들에게 보내는 세 번째 담화에서 “이 사건은 종말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더 심한 종말 사건의 전조”라고 했다. 코로나19 사태는 종말 사건이라기보다는 재림이 가까움을 일깨워주는 표지판이라는 말씀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집중해야 한다.
사실 그때와 시기는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재림의 가까움을 알려주는 징조는 다소간에 긴장관계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재림이 얼마나 속히 일어날지에 대해 추측하는 시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아무리 우리가 깊이 연구하고 예측을 해도 성경과 예언의 신은 그런 노력을 지지하지 않는다. 최고로 깊이 연구해서 완벽한 예측을 한다하더라도 예수님은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한 시점에 다시 오신다고 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4장 44절, 누가복음 12장 40절).
생각지 못한 시간에 주님이 오시면 매일을 주님이 오실 날처럼 생각하고 개인에게 맡겨진 매일의 직무에 성실한 사람들만이 주인에게 “착하고 충성된 일꾼”이라는 칭찬을 듣게 될 것이다. 결국 건전한 재림신앙의 본질은 매일을 재림으로 생각하고 사는 재림성도의 삶의 자세이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