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지금, 재림교회 예배와 설교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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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종 목사는 확인되지 않은 ‘음모론’과 추측은 경계해야 한다며 건전한 재림신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 영적 ‘가데스 바네아’. 우리는 지금 땅을 보는가? 하늘을 보는가?

유창종 목사(동구능교회 담임 / 목회학 박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인류 역사에 놀라운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여러 나라가 서둘러 국경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비행기를 고요히 잠들게 했다. 활기 넘치던 대도시들은 텅 빈 적막강산으로 바뀌었다. 여행은 물론, 온갖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되면서 전 세계 시민들의 평범한 일상은 남의 일이 되어 버렸다. 사상 초유의 사태라는 말이 실감 나는 요즘이다.

■ 종교계는 어떤가?
지난 4월 11일 미국 CNN은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교회와 유대교 회당, 이슬람교 모스크를 조명했다. 종교와 교파를 초월해 컴퓨터가 설교 강단이 되어 버렸고, 소파나 책상이 교회 의자가 되어 버렸다. 온라인 예배는 이제 전 세계 교회의 일상이 됐다.

여기에 심각성을 더한 것은 같은 날 중앙방역대책본부 권준욱 부본부장의 말이었다.

“코로나19 발생 이전의 세상은 이제 다시 오지 않는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생활 속에서 감염병 위험을 차단하고 예방하는 방역 활동이 우리의 일상이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마지막 때의 징조에 대한 성경과 예언의 신의 기별도 권준욱 본부장의 말에 신빙성을 더한다.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 누가복음 21장 11절, 26절

“기근이 많아질 것이다. 전염병으로 수천 명의 사람이 생명을 잃을 것이다. 외부의 세력들과 내부에서의 사단의 활동으로 위험이 우리 주변에 편만하다…” ― 19MR, 382(1897).

앞으로도 어쩌면 자주 더 자주 온라인 예배를 드려야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빠르게 안정을 찾았지만, 그렇다고 안전지대는 아니다. 전문가들은 가을쯤에 2차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한다. 이러한 때, ‘교회는 어떻게 달라질 것이며, 무엇을 대비해야 할까?’에 대해 깊이 숙고해 보는 건 매우 중요한 이슈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코로나19 시대, 재림교회 예배와 설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1. 먼저, 예배 부분이다.
신천지 사태를 겪으면서 사회적 공공의 안녕을 위해 우리 재림교회를 비롯해 많은 교파들이 발 빠르게 온라인 예배로 대처했다. 이러한 부분은 재림교회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과 평가에 분명히 긍정적으로 기여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온라인 예배에 대해 걱정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필자는 예배에 대해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물론 교회라는 신학적 의미가 어떤 특정한 건물이나 공간이 아니라 성도들 자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구별된 시간–안식일-에 구별된 장소-성전-에서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것이 현실적 예배 모습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온라인 예배는 자칫 “함께”라는 공동체의식을 약화시킬 위험성이 있다.  

즉, 개인이나 가족이 집에서 드리는 예배보다, 다수의 믿는 자들이 “함께” 어울려 드리는 기도와 찬송 그리고 말씀 나눔을 더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온라인 예배가 장기화 되어 집에서 혹은 차에서 인터넷을 켜 놓고 설교를 듣는 게 예배라고 여기는 현상이 익숙해진다면 이는 분명 심사숙고해 봐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런 “함께”라는 부분의 온라인 예배의 취약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성도들과 함께 몇 가지 노력을 했다.

1) 본당예배 실시간 송출 – 성도들에게 인터넷의 설교를 무작정 듣도록 하지 않고, 목회부 가족 소수가 평소처럼 저녁예배와 안식일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모든 교인이 가입해 있는 밴드로 실시간 송출했다. 성도들이 실시간으로 함께 참여하고, 댓글로 서로 인사하고, ‘아멘’을 나누면서 우리가 비록 물리적으로 한 공간에 있지는 않지만, 시간을 함께 하고 있다는 의식을 심어 주었다. 성도들은 오히려 서로를 더 그리워하고, 함께라는 의식이 크게 희석되지 않음을 경험했다.  

2) 각 가정의 예배장면을 온라인(밴드)에 공유 – 성도들이 본당에서 송출되는 실시간 예배를 각 가정에서 드리는 모습과 피드백을 밴드에 공유함으로써 함께한다는 의식을 심어 주었다. 어떤 성도들은 이러한 모습에 감동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3) 각 부서별 온라인 모임 – 각 부서별로 가입되어 있는 밴드를 통해 서로 안부를 묻고 활동함으로 “우리는 함께”라는 의식을 심어 주었다.

또 하나 온라인 예배가 염려되는 부분이 있다면 자칫 잘못하면 예배의 거룩성(구별됨)이 결여되거나 약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구별된 시간, 구별된 장소, 구별된 복장, 구별된 마음은 예배의 중요한 요소다. 그런 의미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려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온라인 예배를 통해서도 어떻게 구별된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 몇 가지 구체적인 제안을 해본다.
  
1) 예배를 위해서 구별된 옷으로 갈아입는다. – 예를 들어 넥타이와 정장은 아니더라도 잠옷차림의 옷은 삼가는 게 좋겠다. 필자 장모님의 경우, 코로나로 현장 예배를 드리지 못한 이번 기간 동안에도 매주 안식일 아침이면 평소 교회에 가는 것처럼 똑같이 화장하고, 헤어스타일을 단정하게 단장하고, 깔끔한 옷을 갖춰 입고, 정확한 시간에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았다.

2) 침실이나 식탁보다는 잘 정돈된 거실에 가족이 모여 앉아 예배를 드린다. – 이는 자녀들에게 훌륭한 영적(신앙적) 산 교육이 될 것이다.

3) 예배드리는 동안에 동영상 예배를 전송하는 방송에만 집중한다. – 잠시 핸드폰은 멀리하여 예배드리는 도중에 메신저 알림음이나 전화벨 소리로 예배에 대한 집중력과 경건성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한다.

4) 본당예배에서 찬미를 기립하여 부르는 순서에는 함께 일어나 부르도록 한다. – 찬양 때 일어서는 행위는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드린다’라는 적극적인 몸짓이다. 입으로만 부르는 게 아닌, 온몸으로 드린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5) 온라인 예배를 드림에 있어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바로 헌금이다. – 미리 잘 구별해 두었다가 온라인으로든지 아니면 교회에 전달해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헌금을 구별함에 있어서 시험이 들지 않도록 한다.

2. 코로나19 시대에 두 번째로 생각해 보고 싶은 부분은 “설교”이다.
많은 선교전문가들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목회자의 설교는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교제도, 찬양대의 역할도, 선교의 역할도 축소되거나 위축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으로도 이전처럼 그리 자유롭지는 못할 가능성이 커졌다. 그런 의미에서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이 더욱 강력한 무기가 되어 성도들의 신앙을 유지시킬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코로나19 사태를 겪는 지난 몇 달 동안 개신교 목회자들의 설교 내용은 주로 어떤 내용이었을까? 대략 3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다.  

1) 신천지 및 이단을 비판하는 설교 – 코로나19 사태로 신천지가 수면 위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들의 비정상적인 포교전략과 비도덕적 행태는 우리나라 국민뿐 아니라 전 세계를 경악케 했다. 이로 인해 교계 수많은 목회자의 설교는 신천지뿐 아니라 이단이라고 지목된 교파들을 타깃으로 하는 비판적 설교와 영상이 크게 유행을 했고, 지금도 그렇다.

2) 성도들을 위로하는 설교 –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성도들의 경제와 삶이 참 힘들어졌다. 이에 발맞춰 성도들을 위로하는 설교가 아주 많아졌다.

3) 성도들의 사회적 선한 역할 강조하는 설교 – 이런 어려운 시기에 교회와 성도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설교가 강조됐다. 초대 교회 공동체 이야기를 전한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의 설교가 대표적이다.

“코로나19 사태의 상황에서 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가 쓴 <기독교의 발흥>이라는 책이 마음을 위로해 줬다. 로마시대 165년경 1차 역병이 일어나 15년 동안 로마제국 인구의 최소 4분의1, 최대 3분의1이 사망하는 엄청난 재앙이 있었다. 그때부터 100년 정도 지나 2차 역병으로 로마시 한 곳에서만 하루 5000명씩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교회 공동체 대응이 놀라웠다. 이교도들은 아픈 자를 내쫓았고 죽지도 않은 사람을 매장했지만, 초기 기독교인은 부활 신앙으로 아픈 자를 안심시키고 위협을 무릅쓰며 모든 필요를 공급하고 섬겼다. 병이 옮아도 아픔을 기꺼이 기쁨과 평안으로 감내했다”

한 시대, 한 사회가 어려움에 빠져 절망할 때, 시대를 선도하고 리드하는 역할을 초기 기독교인이 한 것임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방식은 세상과 달라야 한다는 내용의 설교가 강조됐다.

자, 그렇다면 코로나19 이후 재림교회 목회자들의 설교는 어떠한가?

대총회장 테드 윌슨 목사는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전 세계 성도들에게 보내는 세 번째 담화에서 “이 사건은 종말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더 심한 종말 사건의 전조”라고 지적했다. 코로나19 사태를 바라보는 재림교회의 시각이 개신교회와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그래서 코로나19 사태 이후로 <재림마을>이나 <진리횃불>, 그리고 유튜브에 올라온 재림교회 목회자의 설교를 살펴보니, 재림과 종말론에 관한 주제들이 많았다. 목적은 무엇이겠는가? 성도들의 영적 잠을 깨워 재림을 준비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이것은 예언을 아는 재림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다.

“끝은 가깝다. 우리의 교회들을 일깨우라. 하나님의 회심시키는 능력이 교인 개인의 마음에 경험되도록 하라.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깊은 감동을 보게 될 것이다” – 3기별, 154.

그렇다! 필자도 재림교회 목사로써 나 자신과 성도들을 깨워 재림을 준비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을 항상 안고 있다. 그런 면에서 종말론적 징조와 재림의 설교는 코로나19 시대에 어쩌면 당연히 전해야 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염려하며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이것이다. 바로 확인되지 않은 ‘음모론’으로 성도들을 자극하는 메시지다. 코로나19 이후, 필자에게 곳곳에서 여러 사람이 어떤 설교 영상을 보내주면서 “이런 설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는 질문을 해 왔다. 필자도 그 설교를 다 들어 보았다.

대략 코로나19와 미국과 교황권을 연결시키는 내용이었다. 심지어는 “코로나19가 미국과 교황권이 마지막 때에 일요일휴업령을 내리고, 재림교회를 핍박하려고 만든 것”이라는 뉘앙스도 담겨있었다. 조회 수가 상당했다. 물론 이 설교는 재림교단 소속 목회자의 설교는 아니고 재림교회에서 나간 한 부류 목사의 설교였다. 그 외에 다른 설교들도 많았는데 제목이 상당히 종말론적이고, 자극적이었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물론 마지막 예언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13장의 기별들이 성취될 것이다. 그러나 재림교회 역사상 시시때때로 많은 영향력 있는 설교자들이 상당히 자극적인 제목과 내용을 가지고 청중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세력이 형성되면 엇나간 사례가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백성들을 오히려 건전한 재림신앙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처럼 진짜가 왔을 때, 준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진짜 중요한 건 재림의 징조에 그것도 확인되지 않은 루머들로 백성들을 자극하기 보다는 성도들이 더욱 예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강력한 징조가 와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다른 것이 생기면, 그 징조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중요한 건 주인 되신 그리스도가 반드시 오신다는 것을 믿고, 징조를 예의주시하며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신명기 7장 4-5절.

신명기 1장에 보면, 43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그 힘든 광야를 거쳐 그렇게도 오매불망 그리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바로 앞 ‘가데스 바네아’에 당도했다.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행복해야 할까? 두려워야 할까? 당연히 행복해야 한다. 얼마나 그리던 가나안 땅인가!

그런데 그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려웠다.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어디로 갈꼬.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로 낙심케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 신명기 1장 28절.

그들은 왜 두려웠을까? 땅을 보았기 때문이다. 가나안 성읍을 보고 성곽을 보고 아낙 자손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거대함 앞에 자신들은 메뚜기처럼 여겨진 것이다. 그 순간, 그동안 함께 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약속은 보지 못했다.

“백성들은 실망과 낙담으로 자포자기했다. 고민의 통곡 소리가 어지러운 불평의 소리와 뒤섞여 퍼져 나왔다. 갈렙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옹호하고자 담대히 일어서서, 불충실한 동료들의 악한 영향력을 물리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잠시 동안 백성들은 아름다운 땅에 대해 희망과 용기를 주는 그의 말을 듣느라고 잠잠했다. 갈렙은 이미 보고된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성벽은 높았고 가나안 사람들은 강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다. 갈렙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격려했다. 그러나 열 정탐꾼들은 그의 말을 가로 막고 장애물에 대해 처음보다 더 어둡게 묘사했다” – 부조와 선지자 388.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영적 ‘가데스 바네아’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잠시 후면 하늘 가나안에 들어갈 예수님의 재림을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열 정탐꾼들처럼 백성을 두렵게 하는 메시지보다는 갈렙처럼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한 하나님의 약속과 신실하심을 성도들로 바라보게 하고 희망과 용기를 전해야 한다. 확인되지 않은 루머들로 추측해서 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고 무조건 희망만을 말하라는 건 아니다. 성도들을 깨워야 한다. 그러려면 때로는 두려운 소식도 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본 어떤 설교처럼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된다. 성도들이 바라봐야 할 대상은 징조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선은 손가락 끝이 아니라, 하늘이어야 한다.  

신명기 1장30절의 말씀처럼 “우리보다 먼저 가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앞으로 더 심각한 전염병과 재림의 징조들이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가 성도들로 하여금 바라보도록 해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현 위치에 이르기까지 한걸음 한걸음씩 전진하며 여행한 우리의 과거 역사를 회고해 볼 때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할 수 있다. 주님께서 행하신 역사를 바라볼 때 나는 경탄과 우리의 인도자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확신으로 충만해진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오신 길과 우리의 과거 역사를 통해 주신 그분의 가르침을 잊어버리는 것 외에는 미래에 대하여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다” ― 엘렌 G. 화잇 자서전, 183, 184(1902).

그렇다! 설교자와 온 성도들의 눈이 가나안 땅과 성읍, 아낙자손의 장대함을 바라보는 대신, 우리의 과거를 인도하신 주님, 현재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 앞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도록 하면 참 좋겠다. 코로나19 시대, 재림교회의 예배와 설교가 그렇게 회복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