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선교 120주년 기념] 권태건 기자의 내러티브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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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림교회 역사의 자취가 깃든 ‘성산포 피난교회’를 복원하고, 유적지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얼마 전부터 한국 언론계에서는 전형적인 역피라미드형 서술구조의 스트레이트 기사를 넘어 사실을 이야기에 담은 내러티브 기사에 관한 관심과 시도가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재림신문>도 한국선교 120주년을 맞아 교회의 역사에 담긴 ‘이야기’에 주목하려 합니다. 그 첫 시리즈로 권태건 기자가 제주 성산교회를 찾았습니다. 

성산교회는 한국 전쟁 당시 행정은 물론, 교육과 의료 그리고 지역사회 봉사로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도 선교사업을 멈추지 않았던 곳입니다. 지금도 그때 재림교회가 펼친 선행을 기억하는 주민이 생존해 있습니다. 하지만 눈물과 정성으로 지은 ‘피난교회’는 1989년 새 성전 건축을 위해 매각하고, 현재는 식당이 들어서 성업 중입니다.

일부에서는 한국 교회 역사의 자취와 정신이 깃든 ‘성산포 피난교회’를 복원하고, 유적지화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풀어야 할 과제도 만만찮습니다. 과연 ‘피난교회’의 유적지화는 가능할까요? 권태건 기자가 15회 연속 내러티브 리포트로 풀어냅니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가장 어두운 시절 밝힌 한국 교회의 횃불

2023년 9월 3일 제주대회 창립총회 현장. 제주대회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의회가 한창이던 순간, 어느 원로교수가 일어나 발언대 앞에 섰다. 제주 성산포 신앙리 마을 출신의 삼육대학교 신학과 오만규 전 교수였다. 모두의 시선이 원로에게 고정되고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성산포 피난교회를 복원해야 합니다.”

장내가 술렁였다. 성산포 피난교회는 제주 성도들조차 너무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이름인 까닭이다. 웅성이던 청중들도 이제 숨을 죽이고 오 교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성산포 피난교회는 제주도뿐만 아니라 한국 재림교회의 역사입니다. 유적지로 만들어 보존해도 시원치 않을 것인데, 현재는 이방인의 손에 넘어가 술집이 됐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입니까. 역사학자로서 3차례 이상 한국연합회 총회에서 발의했음에도 아직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이만한 역사 유적지를 가만 놔두는 것은 한국 재림교회의 손해입니다”


선교 120주년 기념 – 권태건 기자의 내러티브 리포트

제주도 동쪽 끝 성산포에 위치한 ‘성산포 피난교회’(이하 피난교회)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제주도로 내려온 재림교인과 제주성도들에 의해 세워졌다. 한국 재림교회 전체가 성산포로 옮겨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현실 속에서 피난교회는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한국 재림교회의 기둥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피난교회의 열매는 무엇보다 성산포 일대에서 얻은 영혼이었다. 그들이 바로 오늘날 제주대회가 존재할 수 있게 만든 밑거름이 되었다.

실제로 하루 전 열린 제주대회 창립총회기념 연합예배에서 97세의 부복수 집사(성산교회)가 전쟁 당시 피난민과 함께 예배드렸던 시절을 회상하며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며 재림을 고대하며 살아가자고 호소하기도 했다. 현장에 함께했던 350여 명의 성도는 눈시울을 붉혔다. 비록 그 기억이 희미해져 가고 있긴 하지만 피난교회는 제주성도들의 영적 고향이며, 가장 어두운 시절을 밝힌 한국 재림교회의 횃불이었다. 

2년간의 제주도 피난생활 증거인 이 교회는 피난 온 재림교인들이 흩어져 지냈던 성산포, 신앙리, 고성리, 오조리 등 4개 마을의 중심인 성산면 동남에 위치했다. 서울위생병원교회의 임시진료소가 마련된 성산 서초등학교(현재 동남초등학교)와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전쟁이란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남성들은 돌을 옮기고, 여성들은 치맛자락으로 흙을 날라 지은 교회였다. 오만규 교수는 이렇게 지은 피난교회를 “돌 하나하나에 성도들의 마음이 스며들어있는 교회당”이라고 표현했다. 


선교 120주년 기념 – 권태건 기자의 내러티브 리포트


선교 120주년 기념 – 권태건 기자의 내러티브 리포트

 

하지만 피난교회의 열매는 예배당이 더이상 수용하기 힘들 정도로 늘어갔고 더 넓은 교회가 필요했다. 그리고 1989년 11월 부복수 집사가 희사한 땅에 피난교회를 매각한 자금으로 새 성전을 지었다. 오조리 마을 입구를 지켜오던 새 교회도 이제는 세월의 흐름에 낡고 허물어져 리모델링을 했다.

벽돌의 붉은 빛이 감돌던 교회의 외벽은 베이지색으로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본당의 바닥도 새로 깔고 장의자도 교체했다. 새 조명으로 환해진 예배당은 언제 어디서 손님이 찾아와도 따스하게 맞을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옷을 갈아입은 교회를 바라보면서도 성도들의 가슴 한편엔 왠지 모를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스며있다. 그런데 이날 오만규 교수의 발언을 통해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확인했다. 다름 아닌 식당으로 변한 피난교회 때문이었다.

한때 찬양과 기도의 향기로 가득했던 교회는 이제 고등어조림 냄새가 그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성산교회 강관규 수석장로는 길을 지나며 손님으로 가득한 건물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리다. ‘그 당시 조금만 더 기도하며 힘을 냈더라면 피난교회를 보존할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아쉬움과 후회가 밀려온다.

1989년 당시 1억 원에 매각했던 피난교회는 이제 몇 배의 가격으로 뛰어올랐다. 더구나 당시 피난교회를 기억하는 성도도 마을주민도 몇 명 남지 않았다. 피난교회의 존재를 증언할 수 있는 이들이 점차 사라져간다. 되찾아야 한다면 더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다. – 다음 호 계속 –

* 이 기사는 <삼육대학교>와 <삼육서울병원>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