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공적 책임 수행자로서 교회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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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원영 교수는 전염병 대유행의 시대, 루터에게 배우는 교회의 역할과 책임을 조명한다.
이 글은 지난 4월, 「신학과 학문」(제22권, 제3호 [2020])에 “전염병 대유행 시대에 대한 루터의 이해와 교회의 역할과 책임”이란 제목으로 게재한 논문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 편집자 주 –

봉원영 교수(삼육대 신학과)

이제 전염병 시대에 이 공동체의 공적 영역에서 모든 구성원을 위한 사회적 웰빙을 구현할 책임이 있는 오늘날의 현대 교회는 과연 어떠한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루터의 앞서 설명된 내용과 신학적 이해를 토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서 있다는 사회적 책임의 인식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과정에서 고라의 반역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 땅이 갈라져 그들과 그들에게 속했던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일이 있었다(민 16:32, 33). 그런데 그 사건으로 인해 오히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그들이 무고한 “여호와의 백성들을 죽였”다고 원망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염병을 보내어 심판하셨다(46절). 이 염병으로 1만4700명이 죽었는데, 이 염병을 그치게 했던 것은 제사장 아론이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였다(47, 48절).

“죽은 자와 산 자 사이”라는 표현은 일차적으로 염병이 엄습한 지역과 아직 그렇지 않은 지역의 사이에 섰다는 말로 이해가 가능하겠지만, 또 다른 의미로는 아론이 죽어야 할 사람과 용서받아 생존할 사람 사이에 섰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염병이 갑작스럽게 창궐한 가운데 삶의 죽음의 중간에 서서 죽음의 위험에도 개의치 않고 중보 사역을 감당했던 아론의 모습은 곧 십자가의 죽음을 개의치 않고 죄인을 향하여 생명의 중보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사 53:4-6).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른다고 공언하는 그리스도인 역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타자(他者) 앞에서도 서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루터의 공공신학(Public Theology)에 대해 논의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은 그의 “두 정부론”이다. 이것은 흔히 교회와 국가라는 분리된 이론으로 혼동되어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 니버 형제(Richard Niebuhr & Reinhold Niebuhr) 등에 의해 그의 신학과 윤리관을 이원론적인 것으로 비판하게 하는 근거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루터의 두 정부론은 실제로는 전체적인 모든 국면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루터는 이 두 통치영역은 통합될 수도 없고 따로 분리될 수도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 정부와 영적인 정부의 통치를 동시에 받는 시민이기 때문에 영적인 정부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 가운데 세워진 세상 정부에 대하여도 복종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롬 13:1; 벧전 2:13). 또한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에 상관없이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활용 가능한 모든 권력은 자신이 아닌 이웃의 문제를 하나님의 뜻에 부합시키는데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루터에게 있어 두 정부는 모두 공동체 안에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과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 두 정부를 분리가 아닌 구별로서 이해했고 상호 협력을 필요로 하는 의존적인 관계임을 분명히 했다.

그렇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스스로를 단순히 사적인 영역을 넘어서 교회 울타리 밖 공적인 영역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할 공인(public being)임을 인식하고, 타자를 위한 존재(being for others)로 살아가야 함을 뜻한다. 그리고 마치 아론이 자신의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 염병의 저주가 끝이 났고 죽을 사람들이 살아났던 것처럼, 현대의 교회는 그 “중간에 서서” 양쪽을 매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중보하는 살아가야 할 것이다.

당시 중세 크리스텐돔 상황에서 성직자의 활동범위와 역할이 현재 한국적 상황과는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당시의 루터가 공적인 영역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참여했던 것을 지금의 상황에 바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현재 어느 선진국에서든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건강관리와 정책이라 할지라도 당시 루터의 교구민들을 곤경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의사와 간호사가 최전선에서 자신들의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 역시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분명히 말한다. 모든 개인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자신과 이웃을 보호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다. 또한 병원은 의료적인 필요를 돌볼 수 있지만, 노인들에게 식료품 한 봉지를 가져다 줄 수는 없고 오후에 일하는 엄마의 자녀들을 대신해서 돌봐줄 수도 없다. 그것은 지역사회 공동체 구성원에게 맡겨진 몫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모든 가정들에게 고립될 수 있는 시간 동안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과 친절을 베푸는 것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하나로 묶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라는 마음으로 하는 사회적 역할의 실천
울리히 벡(Ulrich Beck)이 말했던 “위험 사회”(risk society)는 현대의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세계에는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불확실한 불명확성과 불예측성을 특징으로 한다는 이해에서 시작한다. 그가 말하는 ‘위험’이라는 용어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개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는 모든 것이 측정 가능하고 계산 가능한 확률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에서의 ‘위험’이다. 그러나 둘째로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비정량적 불확실성, 즉 ‘알 수 없는 위험’을 가리키는 데 에도 사용된다.

벡이 주장하는 “위험 사회”에서의 위험은 후자의 의미에서 제조된 불확실성이다. 빠른 기술 혁신과 가속화된 사회적 대응에 의해 시행되는 이러한 “진정한” 불확실성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글로벌 리스크 환경을 창출하고 있다. 그는 원자력에 대한 과거의 결정과 유전 기술, 인간 유전학, 나노 기술 및 컴퓨터 과학의 사용에 대한 현재의 결정을 통해 우리는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으며, 실제로는 심지어 의사소통도 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와 지구의 생명을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결국 오늘날 인류가 경험하는 이 세계는 산업의 발전과 고도화가 가속될수록 인간의 행복과 안녕을 위협하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크고 많은 다양한 요소들로 인해 더 큰 불안과 두려움을 동반한 위험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에서 현대의 교회는 어떠한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다윗이 치리하던 때에 또 다시 전염병이 온 이스라엘을 덮쳤던 사건이 있었다. 그로 인해 약 7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대상 21:14). 발단은 다윗의 인구조사였는데, 그것은 신정(神政) 국가의 복된 미래를 약속하셨던 하나님보다는 자신을 드러내고 그것에 만족하고 싶어 했던 다윗의 교만과 야심 때문이었다. 군대장관이었던 요압마저도 만류할 정도로 그의 생각은 옳지 않았다(삼하 24:3).

이후 다윗은 곧 자신의 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회개하지만 그 일로 인해 온 이스라엘에 삼 일 동안 온역이 들게 되었다(13절). 그 때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라고 간구하면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을 때 비로소 이스라엘을 향했던 재앙이 그칠 수 있었다(25절). 하나님 앞에 보였던 다윗의 회개는 단순히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차원을 넘어서 그 죄로 인한 결과까지도 기꺼이 책임지려는 자세와 타인의 죄악과 허물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통회하는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보여 준다.  

루터는 사실 자신을 통해 드러난 윤리적 가르침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실천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지상의 정부에 더 익숙하고 그 정부에 속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터는 그리스도의 정부가 모든 사람에게 확대되지는 않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다수의 비그리스도인들이 속한 사회 속에서 항상 소수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그리스도인은 지역사회 공동체의 다양한 공적인 영역에서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일상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정부와 지상의 정부를 매개하는 책임 있는 삶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루터가 1520년에 글로써 썼던 설교인 ‘선행에 관하여(Von guten Werken)’는 새로운 차원에서의 그리스도인 삶의 실천에 대한 이해의 길을 열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선한 행위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이웃의 유익을 위한 사랑의 행위이며 그것은 곧 믿음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열매임을 강조했다.

루터는 이 글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선행과 사람들에 대한 윤리적 선행을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윤리적 행위가 모든 신앙인들에게 불가분의 관계임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 글을 통하여 선행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고 했다기 보다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변증적으로 설명한 것이라 보는 것이 더 맞다. 모든 선행은 신앙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신앙인이라면 그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이웃을 위한 선행을 실천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차라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라고 외쳤던 다윗의 마음이 오늘날 교회에게 필요하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계명은 나 자신이 보호받고 돌봄을 받아야 할 귀한 존재인 것처럼, 다른 사람도 역시 동일한 가치와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나와 타자가 같다는 의식이다.

이것은 타인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어야 하듯이, 타인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이고 곧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의식으로 연결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내 속에 계신 그리스도는 타자 속에도 존재하시고, 그 그리스도는 타자와 나를 동일하게 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전염병의 시대에 단순히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아픔에 참여하는 것 이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해결해야 할 죄악을 나의 죄악으로 여기는 깊은 회개와 성찰의 과정이 필요함을 기억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가 보였던 반유대주의적 감정에 대해서는 분명히 현대교회가 심각하게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중세로부터 반유대주의적 정서가 루터 당시까지 이어졌으며 그것이 유대인 혐오로까지 확대되어 있었다. 청년기의 루터는 유대인의 회심을 가능하다고 보았고 그것을 위해 열렬하게 일했지만 그 기대를 깨지는 경험을 한 후에는 그가 반유대주의로 돌아서게 되었다. 물론 루터가 유대인들과의 개인적인 접촉 중에는 자신의 그러한 면을 나타내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종교개혁은 민족주의 운동과 연결되어 자국민의 자긍심을 높이는 분위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루터는 독일인 속에 살고 있는 유대인에 대한 반유대주의 정서를 이용해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도구로 삼았다. 또한 루터는 신학적으로 구약의 율법주의를 경멸해 왔는데, 칼슈타트(Andread Bodenstein von Karlstadt)가 율법을 강조하자 루터가 그에 대한 견제 방책으로 반유대교 경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는 1523년 논문의 마지막 문단에서 유대인에 대한 관용 여부는 유대인 붕괴에 달려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그가 유대인의 개종은 유대인 공동체의 붕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되어야만 유대인의 개종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역사에서 마리아주의(Marianism)와 반유대주의는 함께 길을 걸어왔다. 예수가 메시아임을 부인하는 것은 마리아의 위치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 점에서 마리아주의는 유대인들과의 대척점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들은 당시의 중세적 분위기가 유대인을 아주 혹독하게 대하도록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루터가 공적 영역에서의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한 선행을 강조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보여주었던 반유대주의를 특정 인간이나 집단에 대한 혐오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그의 인간적 한계가 특정 민족에 대한 배제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것은 미국에서나 유럽에서 자신의 종교와 상관없이 아시안(Asian) 등의 특정 인종에 대해 보이는 혐오사상이나, 한국에서 기독교인이 혹은 일반인이 특정 교단이나 혹은 특정 직종의 사람들에 대한 혐오로 표출되는 문제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히 10:24)하고 필요에 따라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갈 6:10) 해야 하겠지만, 교회 밖 공적인 영역에서도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갈 6:10). 그리스도인의 선행의 대상이 선별적이거나 제한적이지 않도록 모든 타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기억해야 할 또 한 가지 사실은 그것이 구원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정부의 행정적 명령과 지침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협조하고 합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루터의 두 정부론 자체가 이러한 입장을 잘 지지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정부의 지침에 따라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였지만, 일부 교회들은 여전히 현장예배를 고수하고 있다. 현장예배 진행에 대한 신앙적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한국의 경우)예배 참석자들은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게 하는 등 그들 나름대로의 예방 조치는 취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최근 들어 그러한 현장예배를 진행한 교회들에서 COVID-19 확진자가 발생함에 따라 확산에 대한 염려가 증가하고 있다. 정부의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에 따라 정부는 기독교에 공식적으로 요청한 온라인 예배로의 전환이나 자택대피 행정명령 등에 대한 협조는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기대하는 것들이다.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전염병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품위(decency)입니다.” 알베르트 까뮈(Albert Camus)의 1947년 소설 전염병(The Plague)의 중심인물인 리외(Rieux) 박사의 말이다. 리처드 마우(Richard J. Mouw)도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시민 교양이 바로 이 품위(decency)라고 말했다. 이러한 다원주의 시대일수록, 더욱이 이 전염병의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에서 공공의 영역에서 보여주어야 할 것은 바로 품위이다. 리외가 말한 품위는 자신의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었다. 오늘 나의 삶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맡겨진 직분에 충실할 때 그것이 곧 품위 있는 삶인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온라인 예배로의 전환 요청이 종교의 탄압 또는 세상과의 타협으로 보는 시각으로 인해 여전히 현장예배를 고수하는 것에 대해서도 교회가 그 입장에 대해서 함께 고민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분명히 건강한 판단을 토대로 하여 취해진 예방 조치들이 많이 있었지만, 지혜로 위장한 비이성적인 공포와 불안 때문에 선택한 결과들 역시 많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구성원들을 보호하면서도 공포나 불안, 무조건적인 자기보호의 문화적 풍토에 굴복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전염병의 시기에 단순히 안전수칙들만 안내할 것이 아니라, 어떠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삶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을 것인지를 명확히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