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자들도 여전히 용서 받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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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총회 성경연구소의 성경 난해 문제 해석

Interpreting Scripture: Bible Questions and Answers


[대총회 산하에 봉직하고 있는 선발된 학자 49명이 내놓은 성경 난제 94개에 대한 균형 잡힌 해석들]


타락한 자들도 여전히 용서 받을 수 있는가?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

소위 히브리서의 경고 구절들은 그 책의 구조와 사상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2:1∼4; 3:7∼4:13; 5:11∼6:12; 10:19∼39; 12:14, 29). 사도는 수신자들의 영적 상태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 경고들(어떤 것은 매우 두려운 경고임)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교의 신앙으로 다시 돌아와 좀 더 결정적인 헌신의 삶을 살라고 그들을 설득한다. 이 경고 구절들 가운에 하나인 히브리서 6:4∼6은 특별히 도전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구절은 일단의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에서 “타락하여” 심지어는 심판까지 받았다. 이 구절은 많은 해석자들이 그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생각할 만큼 귀에 거슬린다.
따라서 여러 질문이 이 구절에 연루된다. (1) 여기에 묘사된 사람들은 한때 신실한 신자였는가, 아니면 가짜 그리스도인이었는가? (2) 그들의 “타락”의 성격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그들의 배도는 전면적이었는가, 아니면 부분적이었는가? (3) 타락한 자들은 회개하여 절대 회복될 수 없는가, 아니면 그들이 그 배도에서 돌이키면 다시 한 번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가? (4)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죄가 무엇을 의미한다고 말하는가?


경고의 목적:

이 무서운 경고의 목적이 무엇인지 주의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전후 문맥에서 저자는 수신자들의 영적인 나태 및 미성숙에 대한 염려를 피력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경험에서 그때쯤에는 이미 선생이 되어야 했을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도 그리스도교 도(道)의 초보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참조 히 5:11∼6:2). 사도는 그들의 방만한 믿음 생활에 부흥을 일으키라고 촉구하면서 히브리서 6:4∼6에 포함된 무서운 경고를 발한다. 저자는 이런 엄한 경고를 발한 후 보증을 주는 기별로 다시 돌아와,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9절)고 사려 깊게 말한다. 다시 그는 그들에게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고 게으르지 말라고 권고한다(11, 12절). 따라서 이 두려운 말씀들은 수신자들이 영적으로 건강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사도의 염원의 틀 안에 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을 사용하여 낙담하고 낙심케 하는 것은 원래 문맥과 의도에 어긋나는 일이 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인간의 고난:

또 하나의 중요한 문단은 히브리서 12:1∼11로, 고난이 어떤 결과를 내는지를 가르쳐 주는 권고 부분이다. 우리의 고난과 예수의 고난을 동시에 말함으로써 이 부분은 고난에는 육체적 고난 이상의 것이 결부돼 있다는 것을 보도록 돕는다. 십자가(12:2a), 수욕(12:2b), 타인에게 받는 적대감(12:3), 죄의 유혹(12:4) 등은 육체적, 사회적, 종교적 및 심리적 고통과 관련된다. 그러나 고난을 하나님의 연단으로 말하는 이 부분의 긴 논의(12:5∼11)는 영적인 고난이 가장 중요한 인간의 고난임을 분명히 한다. 시편에 나오는 많은 기도들이 사실상 이런 종류의 고난을 반영하고 있다(시 10:1, 13; 22:1; 42:9, 11; 43:2, 5; 44:23, 24; 49:5; 74:1, 11; 88:14).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그러신 것처럼, 이런 기도의 문맥에서 하나님께 “왜”라고 묻는 것은 불신이나 반역의 행위가 아니라 정신적 및 영적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왜”라고 묻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고통에서 구원하실 능력이 있는 분임을 믿고자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는 “왜”라고 물음으로써 배운다. 강한 호기심을 통해 배우려는 마음이 생기는 법이다. 우리!
가 순종의 더 깊은 수준에 도달하려는 실제적인 의도를 가지고 열렬하게 그러나 참을성 있게 대답을 찾을 때 영적으로 성장한다. “왜”라는 물음을 멈춘 자들은 배움도 멈춘다.


배도한 그리스도인:

그러나 히브리서 6:4∼6에서 저자는 특정한 무리의 사람들을 묘사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에서 배도한 것에 관한 부정적인 예를 제공한다. 마치 사도가 “이런 일이 너희에겐 생기지 않도록 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먼저, 사도는 이 무리의 사람들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6a절). 그런 다음 저자는 한때 이들의 그리스도인 경험을 묘사하고, 이어서 그들의 배도의 상태를 서술한다(4절).
이 사람들이 지금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에서 배도한 상태에 있으나 한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헌신된 삶의 축복을 누렸었다. 사도는 이들의 경험 가운데서 현재의 상태를 네 가지 구절을 사용하여 표현한다. 이 사람들은 (1) “비췸을 얻고” (2)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3)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4)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적이 있다. 이 구절들을 액면 그대로 읽으면, 이들이 한때 온전한 그리스인이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고귀하고 거룩한 축복들을 누린 적이 있었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한때 충실한 신자였던 이 사람들의 현재 상태를 다시 말하자면 이렇다. 이들은 지금 그리스도교의 신앙으로부터 “타락했”다. 또한 다소 난해한 표현이지만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였”다(6절)고 말한다. 이들이 자신들의 이전 생활 방식으로 다시 돌아오려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에서 조용히 돌아섰던 것 같진 않다. 이들은 자신들의 그리스도인 경험과 거기서 배도한 것을 신자들을 경멸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아,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야를 따르는 것은 순진하고 바보 같은 짓이라고 비아냥거렸을 것이다. 예수를 배신한 유다의 전철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런 묘사를 통해서 사도는 이 무리의 전면적인 배도를 말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신앙에서 완전히 돌아서서, 지금은 사도가 신실한 것으로 여겼던 자신들의 이전 신앙에 대해서 도전하고 있다. 이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서 영원히 잃어버림을 당한 자들이다.
이 구절은 특히 한때 누렸던 축복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야기를 반영하는 것 같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기둥”의 인도를 받았던 것처럼 이들은 한때 “비췸을 얻”은 적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의 만나를 먹었던 것처럼, 이들은 “하늘의 은사를 맛본” 적이 있다(히 6:4). 성령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신 것처럼, 이들은 “성령에 참여한” 적이 있다. 또한 사도는 예증으로 제시한 7, 8절에서 신명기 11장에 나온 축복과 저주를 그 예증의 근거로 사용하여 그런 배경을 확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 수신자들에게 바라는 긍정적인 미래가 7절에 그려져 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4∼6절에 묘사된 배도자들에게 내릴 심판 곧 그들의 부정적 미래는 8절에 묘사돼 있다.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이 구절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이런 죄의 허물이 있는 자만이 회개하여 새롭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죄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음성과 성령의 호소에 지속적으로 저항하는 데서 나타난다. 이 죄는 하나님의 음성에 더 이상 반응하지 못할 때까지 마음을 강퍅케 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성령을 거슬리는 죄를 짓는 사람은 죄를 후회하거나 슬퍼하거나 거기서 돌이키려는 마음도 없고, 그를 고소하는 양심도 없다. 옳은 일을 행하려는 신실한 마음이 있다면 그에겐 아직 희망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제7권, 435).


배도의 성격:

우리의 논의에 맞게 시작 부분에서 말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자. (1) 여기에 묘사된 사람들은 과거에는 신실한 신자였는가, 아니면 가짜 그리스도인이었는가? 이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고귀한 축복들에 참여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한때 신실한 신자들이었음이 분명하다. (2) 그들의 “타락”의 성격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그들의 배도는 전면적이었는가, 아니면 부분적이었는가? 이들의 배도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일 만큼 전면적이었다(6절). (3) 타락한 자들은 회개하여 절대 회복될 수 없는가, 아니면 그들이 그 배도에서 돌이키면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가? 이런 사람들의 전면적 배도 및 그리스도교 신앙에 반하는 활동 등에 비추어, 사도는 이들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그 교제 속으로 다시 회복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는 그들이 회개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분명 그렇게 보인다).[1]


그리스도인의 삶과 죄:

이 논의의 서두에서 제기한 마지막 질문에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죄가 무엇을 의미한다고 말하는가? 이 구절은 침례를 받은 후에 그리스도인이 저지른 죄는 무엇이든 구원을 잃게 만들어 결국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되곤 했다. 이런 해석은 간단히 말해서 본문의 의미에서 벗어난다. 여기서 사도가 논하는 것은 침례 후에 지은 죄가 아니다. 죄를 저지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대우에 관하여 알려면, 그 주제에 관해 좀 더 분명하게 다루는 요한일서 1:9같은 본문을 살펴보아야 한다. 히브리서 6장에서 사도는 잘 알려진 일단의 사람들 곧 그리스도교의 신앙에서 타락하여 그것에 대해서 전면적이고 공공연하게 도전하는 사람들의 배도에 관해서 논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일시적인 좌절이나 실족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결심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의 연약함을 체휼하셔서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고 그들을 사랑으로 대하시는 대제사장이 계신다(히 4:15∼5:3).
이렇다면, 우리는 사도가 주는 강력한 경고를 묵살해서도 안 되고 그것의 중심 취지를 놓쳐서도 안 된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온전하고 열렬하게 신뢰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미지근한 헌신은 결국 공개적인 배도로 이어질 위험이 있으며, 따라서 영원한 멸망의 전조가 될 수 있다. 히브리서 6:4∼6의 두려운 경고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회복하고 “구원에 가까운 것”(히 6:9)을 다시 새롭게 하라고 호소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John K. McVay


<미주>


1. 히브리서 10:26∼31; 12:15∼17, 25∼29 같은 구절도 같은 식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