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선교 120주년 특집] ‘복음의 시간을 거슬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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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노비키폭포 앞에 서자 ‘바로 여기구나! … 이곳에서 우리의 선교역사가 시작됐구나’라는 생각에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갑작스런 눈병 때문에 예정대로 하와이행 여정에 오르지 못한 이응현은 이때 쿠니야 전도사에게 한 사람을 데리고 갔다. 키가 말쑥하게 크고, 콧수염을 기른 그는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 대구 출신의 손흥조(孫興祚)였다. 장로교회 신자였던 그 역시 하와이행 이민선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다음 이민선은 6월 12일, 일요일 저녁 떠날 예정이었다. 이들은 남은 기간동안 성경의 진리를 배웠다. 드디어 출항을 하루 앞둔 11일. 조선인 노동이민자 두 사람은 고베교회의 안식일예배에 출석했다. 오후에도 자리를 뜨지 않은 채 자정이 가까워질 때까지 열심히 성경을 공부했다. 이날 쿠니야 전도사와 록우드 박사는 이응현과 손흥조에게 침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침례의 성서적 기초에 대해 확실하게 깨달은 두 조선인 ‘구도자’는 이미 세례받은 기독교 신자였지만, 꼭 침례를 받고 싶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다시 부활하심을 믿고, 신앙고백했다. 하나님의 참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은 이미 자정이 지난 깊은 밤이었다. 게다가 밖에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이민선의 출항도 몇 시간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들은 눈물로 침례를 간청했다. 지금이 아니면 더이상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이응현과 손흥조가 얼마나 재림신앙에 진심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장면이다. 그들은 결코 충동적이거나 즉흥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신앙심은 백지장처럼 순수했고, 영혼은 맑았다. 

결국 쿠니야 전도사와 록우드 박사는 두 조선인의 간절한 소원을 물리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곧 고베교회 성도들과 함께 거센 빗줄기를 뚫고 롯코산(육갑산 / 六甲山)으로 향했다. 그곳에 누노비키폭포가 있었다. 


선교 120주년 특집 – ‘복음의 시간을 거슬러’ (2)

 

비가 내리는 밤, 쿠니야 전도사는 종이 등불을 켜 들고 누노비키 3단 폭포의 세 번째 폭포에서 이응현과 손흥조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역사학자 오만규 교수는 <한국재림교회 100년사>에서 이 장면을 “조선인들에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신앙이 최초로 접목되는 역사적 사건은 이처럼 엄숙히 이루어졌다. 진실로 이 두 조선인이야말로 조선 백성 가운데서 재림기별이 수확한 첫 열매였던 것이며 조선재림신앙 운동의 첫 불씨였다”라고 기록했다. 

오만규 교수는 “재림교회 신앙을 최초로 수용한 조선인 선교주체는 양반도 학자도 아니라 기독교신앙을 가진 노동자였을 뿐 아니라 그들이 기존신앙을 개혁한 구도(求道) 현장은 정치 활동이나 학문 활동의 공간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살아온 제 나라에서 삶의 근거를 잃고 머나먼 외국 땅 하와이의 거친 일터에 품을 팔기 위해 나선 노동이민의 길이었다”면서 “아브라함과 사도 바울의 경우를 위시한 성경역사와 기독교 역사의 숱한 종교적 혁신이 치열한 이민여행의 노정과 연계되어 있었듯 조선의 재림교회 선교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을 찾아가는 조선 노동자들의 노정에서 출발했다”라고 의미를 평가했다.

아쉽지만, 이응현과 손흥조가 쿠니야 전도사에게 성경을 공부했던 고베교회 옛터는 현재로서는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없다. 당시의 주소도, 위치도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역사에 고베 야마모토토오루 니마치메(神戶 山本通 二町目)라고 남아 있고, 누노비키폭포가 교회의 뒷산이라고 알려져 있는 만큼, 지금의 장소와 그리 멀지 않을 것으로 추정한다. 

좁은 주택가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현재의 고베교회를 찾아 당시를 유추하며, 그때의 감동을 되새겨보는 것도 한국인으로서는 뜻깊은 일이다. 사라진 옛 유적에 대한 아쉬움은 애써 삼켜야 하지만, 그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세월을 타고 한국 땅에서 이렇게 성장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위안을 삼는다.


선교 120주년 특집 – ‘복음의 시간을 거슬러’ (2)

 

고베교회 인근에는 롯코산(육갑산 / 六甲山)이 있다. 도보로 채 20분이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다. 아름다운 고베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이곳에 누노비키폭포가 있다. 흐르는 물의 모습이 마치 천(布)을 늘어뜨리고 있는(引) 것처럼 아름답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와카야마현의 나치폭포, 도치기현의 케곤폭포와 함께 일본 3대 신성한 폭포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초입에는 작은 신당이 세워져 있다. 일본의 전통적 정형시인 와카에도 많이 등장하는 곳이다. 잘 가꿔진 트레킹 코스와 함께 최근에는 누노비키허브원이 들어서 평일에도 많은 등산객과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으며, 고베 방문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야 할 아름다운 명소 중 하나로 사랑받고 있다. 

가장 상류로부터 ‘온타키’(雄滝, 수폭포) ‘멘타키’(雌滝, 암폭포) ‘메오토다키’(夫婦滝, 부부폭포) ‘츠츠미가다키’(鼓ヶ滝, 북폭포) 등 4개의 폭포로 이뤄져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응현과 손흥조는 누노비키 3단 폭포의 세 번째 폭포에서 침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 4개의 폭포 중 세 번째 폭포가 정확하게 어디를 말하는지 확정하기 어렵다. 다만, ‘멘타키’ 폭포가 아닐까 추측하는 이가 있고, 더러는 당시 정황상 폭포로 올라가는 등산로의 초입이라 주장하는 이도 있다. 

한국 재림교인 가운데는 은연 중 누노비키폭포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사람이 많다. 마치 본인이 침례 받은 장소를 기억하듯, 한국 재림교회 믿음의 선조가 처음으로 침례 받은 곳에 대한 신앙적 근원을 찾고 싶은 정서에서 비롯된 감정으로 보인다. ‘누노비키’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정확하게 어디인지, 어떤 모습인지 알려진 적도 거의 없다. 다만 이응현과 손흥조가 나란히 찍은 흑백사진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모습이 눈에 익었을 뿐이다. 그 궁금증을 해소하려 오사카에 관광 왔다가 개인적으로 다녀오는 이들도 종종 있다. 


선교 120주년 특집 – ‘복음의 시간을 거슬러’ (2)

 

류종현 목사와 남형우 목사의 안내로 폭포를 찾아 올라갔다. JR 산요 신칸센의 정차역인 신고베역을 지나 녹음이 짙푸른 등산로에 발을 디뎠다. 이곳부터 600m 거리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삼육대 제명호를 닮은 오솔길을 지났다. 그날 밤처럼 이곳에도 빗줄기가 흩뿌렸는지, 길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나마도 그때는 이처럼 정비되지 않았을 테니 질퍽한 길이 꽤 불편했을 것이다. 

폭우가 내리는 밤,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각. 종이 등불에 의지해 캄캄한 어둠을 뚫고 이 길을 걸어 올랐을 두 사람의 마음은 과연 어땠을까. ‘자기 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몰라 두려웠을까 아니면 새로운 진리를 품은 감동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을까’ 여러 가지 상상이 뇌리를 스쳤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쉬엄쉬엄 걸으니 10분 만에 멘타기폭포에 맞닿았다.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울창한 산림 속에 지저귀는 새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폭포수의 울림이 장엄하게 들려왔다. 나뭇가지에 가려 전체 모습을 조망할 수 없는 게 다소 아쉬웠지만, 반갑고 기뻤다.

‘바로 여기구나! … … 이곳에서 우리의 선교역사가 시작됐구나’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한동안 기분이 먹먹했다. 그날의 역사가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됐다는 생각에 감사의 기도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폭포로 내려가는 길은 출입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석성(石城)처럼 쌓아 올린 둑이 접근을 가로막았다. 그 밑으로 몇 미터나 될지 가늠하기 어려운 낭떠러지가 아찔하게 깎여 있었다. 옆으로는 물길이 마치 협곡처럼 이어졌다. 예전에야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그 깊은 밤에 침례를 받을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경사가 매우 가파르고 위험했다. 비가 내려 길이 미끄러웠기 때문에 접근이 더 어려웠을 것이다. 어찌 됐건, 말로만 듣던 누노비키폭포 앞에 서니 가슴 끝에서 뭔가 모를 뜨거운 감정이 뭉클하게 차고 올라왔다. 

* 이 기사는 참교육을 회복시키는 건강한 대학 삼육보건대학교 지원으로 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