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혼과 재혼을 허락하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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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총회 성경연구소의 성경 난해 문제 해석
Interpreting Scripture: Bible Questions and Answers

[대총회 산하에 봉직하고 있는 선발된 학자 49명이 내놓은 성경 난제 94개에 대한 균형 잡힌 해석들]

예수께서 이혼과 재혼을 허락하셨는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9).

이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혼 후 일체 재혼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공관복음에 있는 어떤 본문을 읽을 때는 공관복음의 다른 곳에 나온 평행 본문과 비교한 후 전후 문맥에 비추어 해당 본문을 읽어야 한다.

마음의 강퍅: 마태복음 19:1-10의 문맥은 상당히 넓다. 특별하게 부각되는 면은 마음의 강퍅에 관한 것인데, 8절에서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다. 바리새인들은 마음의 강퍅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나타내 보인다. 그들이 이혼을 할 수 있는 구실들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결혼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들은 결혼 관계가 해체되었다면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라고 제안한다(10절). 그들은 이혼한 후 다른 결혼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의 강퍅은 얼마 후에 어린 아이들을 축복해 달라고 예수님께 데려오자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을 때도 드러난다(13절).
젊은 부자 법관 같은 부자들은 그들의 마음의 강퍅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힘들다(마 19:21-23). 예수님을 따른 것에 주어질 보상에 관한 베드로의 질문도 마음의 강퍅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27절). 포도원 품꾼의 비유(20:1-16)에서 하루 종일 일한 자들은 주인의 관대함에 대해 불만을 나타낸다. 그들은 악하고 강퍅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미 마태복음 18장에서 마음의 강퍅이 나타난다. 제자들은 사회의 소외계층, 특히 여인들을 포함하여 어린 자들을 멸시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았다(6, 10절). 18장은 천부께서 마음으로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 자들을 고통에 넘겨 줄 것이라는 경고로 끝난다(34, 25절). 용서하지 못하는 종은 마음이 강퍅한 자에 대한 가장 적절한 본보기이며, 이 주제는 이혼과 재혼을 다루는 다음의 구절에서도 발전되고 있다. 배우자를 용서하는 대신, 결혼관계에서 빠져 나와 배우자를 버릴 구실과 가능성을 찾는 바리새인 같은 자들이 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대화는 바리새인들이 그분께 이혼할 수 있는 사유를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어떤 이유로든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더 자유주의적인 랍비 힐렐 학파와 간음의 이유만으로 이혼을 허용한 좀 더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 사이의 논쟁에 예수님을 휘말리게 하려 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이 헤로디아와 결혼한 헤롯의 문제를 거론하여 헤롯과 원수지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마 14:3, 4). 이것은 매우 정치적인 문제여서, 침례자 요한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데까지 갔다.
마태복음 19:3에 있는 중요한 단어는 헬라어 아폴뤼오로, 문맥상 “내보내다”, “이혼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바리새인들이 두 번(3, 7절), 예수님이 두 번 사용하였다(8, 9절). 그러나 예수님은 두 번째로 대답하실 때만 그 단어를 사용하고, 첫 번째 대답에는 헬라어 코리조를 사용하여 이혼의 개념을 표현하셨다(6절). 예수님은 이혼에 분명하게 반대하셨다. 6절에서는 예외가 거론돼지 않고, 9절에서 한 가지 가능한 예외가 언급된다.

결혼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 마태복음 19:4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답하셨다. 그분은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 곧 창조의 나머지 것들과 함께 결혼도 좋은 제도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대답(4-6절)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읽지 못하였느냐”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 질문은 구약의 두 구절을 가리킨다(창 1:27; 5:2). 그런 다음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는 진술이 뒤따라 나온다(마 19:5).  6절의 허두에서 앞의 사상이 반복된다.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런 후 본문은 명령으로 끝맺는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따라서 여기서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에 대해 두 번 읽게 된다(마 19:5a; 6a). 예수께서 이혼을 할 수 있는 어떤 사유를 말씀하시는가? 아니다. 창조의 질서는 어떤 이유로도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담에게 하와를 배우자로 주신 그리스도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첫 이적을 행하셨다. 친구와 친척들이 함께 즐기던 잔치 자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공중 봉사를 시작하셨다. 이리하여 그리스도는 결혼을 당신께서 친히 제정하신 제도로 인정함으로써 이를 윤허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남녀가 거룩한 혼인으로 연합되고 그 권속들은 영광으로 관 씌워져서 하늘 가족의 권속으로 인정되도록 정하셨다.” (재림신도의 가정, 99)

마태복음 19:5은 “말씀하시기를”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가리킨다.  최고의 권위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함께 새로운 연합을 이루도록 정하셨다. “한 몸”이라는 말은 특히 부부의 육체적 연합을 가리킨다. 그러나 “몸”은 전 인격을 나타내는 용어이므로 단순히 육체적 영역에만 국한될 순 없다. 그래서 간음이 그토록 심각한 것이다. 그것은 남편과 아내의 그 놀라운 결합을 산산조각 낸다.
“한”은 연합과 하나됨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두 존재,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된다. 이 진술을 하심으로써 예수께서는 일부다처뿐 아니라 동성애도 배격하신다. 부모를 떠나 함께 살고 한 몸을 이루는 것은 인간의 행위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남녀를 함께 연합시킨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모든 합법적인 결혼은 하나님께서 함께 연합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배우자와의 이혼은 허용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이혼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신다.

이혼 문제: 바리새인들은 이혼이 허락되지 않았다면 왜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라 했는지를 질문함으로써 예수께 대응하였다. 신명기 24:1을 언급하여 느슨한 이혼 관습을 지지하기 위해 창세기 1, 2장의 내용을 은폐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경의 구절들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지를 설명하셨다. 마태복음 19:9에 그분의 최종적 결론이 나와 있다. 인간은 이혼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파괴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아내가 점잖지 못한 일을 저지르면 그녀에게 이혼 증서를 주라고 모세가 명령했다(헬라어 에네테일라토)고 주장했다(19:7). 그러나 예수님은 훨씬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신다. “모세는 이혼을 허용했지(헬라어 에페트렙센), 명령하진 않았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19:8).
6절에서 예수께서는 이혼을 단언하여 부정한다. 9절에서 그분은 누구든지 성경의 증거에 반하여 이혼한다면 그 또한 무죄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5:32에 의하면 이혼 당한 여자가 그녀의 남편이 간음한 이유를 제외한 다른 이유로 다시 결혼하면 간음한 것이 된다. 그녀는 여전히 결혼 상태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 것으로 보인다. 마태복음 19:9에서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남편도 간음한 것이 된다. 예외가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도 역시 여전히 결혼 상태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가복음 10:12에 의하면, 이혼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에 의해서도 이뤄진다.
마태복음 19:9은 이혼을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유만을 허용한다. 그것은 성적 간음(헬라어 포르네이아)이다. 그러나 문맥은 그럴 경우에라도 배우자를 용서하고 강퍅한 마음을 떨쳐버리라고 촉구한다. 포르네이아의 다른 국면들에는 매춘, 혼전 성교, 간음, 근친상간, 동성애 등도 포함된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종류의 혼외 성적 관계를 포함한다.
이제 남아있는 문제는 예외 조항이 이혼만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재혼도 언급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1)  “누구든지  아내를 내어 버리고
                        음행(포르네이아)한 연고 외에
(2)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9)

(1) 자기 배우자와 이혼하고 재혼하는 것은 간음이다. 그러므로 정확히 (1)과 (2) 사이에 나오는 예외 조항은 이혼 후의 재혼을 할 수 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만약 포르네이아에 연루되지 않는 배우자도 재혼할 권리가 없다면 예외 조항은 있을 필요가 없다. 합법적인 이혼은 합법적인 재혼을 허용한다. 구약시대뿐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이혼 후의 재혼은 허용되었기 때문에 신약시대에도 비슷한 정황을 기대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신약은 새로운 규정이 세워졌다고 분명하게 진술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특별한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혼과 재혼을 허용하시지만 그분의 기별의 요점은 결혼의 계속성을 말한다.

“나라의 법률에 의하여 한 여인이 법적으로 그의 남편과 이혼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리고 보다 높은 법에 의하면 아직 이혼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남편이나 아내를 결혼 서약에서 자유하게 하는 입장에 둘 수 있는 것은 오직 간음죄뿐이다. 국가의 법이 이혼을 승인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율법에 의거하여 성경의 빛으로 볼 때 그들은 여전히 남편이요 아내이다.”(재림신도의 가정, 344).

오늘날에 적용할 교훈: 하나님께서 결혼을 제정하셨을 때, 그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평생 결합 곧 이를 통해 두 사람이 서로를 보완하고 상호의 안녕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예수께서는 결혼제도의 영속성을 강화하셨다. 이혼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파괴시키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다. 어쨌든 음행의 연고 외에 이혼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성경적으로 말해서 곧 혼자 살든지 아니면 배우자와 화해하는 수밖에 다른 수가 없다. 음행한 연고 외에 어떤 이유로든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은 음행한 자이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이다. 배우자가 음행한 연고 외에 다른 이유로 이혼한 사람과 결혼한 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교인이 배우자와 이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유는 음행이다. 배우자가 음행을 저질렀다면 그런 일에 연루되지 않은 상대 배우자는 이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화해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화해가 불가능하면 음행에 실제 연루되지 않은 배우자는 재혼할 수 있다.
한 가정이 해제될 경우 교회도 항상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살펴야 하고 균형 잡힌 성경적 방법으로 문제를 다뤄야한다. 그 일에 아주 무관심한 것은 무책임한 행동일 수 있다. 교회가 그 일에 관심을 갖는 목적은 도움을 주고 상처를 치유하고 잃어버림을 당할 수도 있는 영혼들을 원조하는 데 있다. 어떤 경우에는 문제에 연루된 자에게 교회가 징계를 주어 교회에서 내 보낼 수 도 있다. 그렇다고 교회는 성적인 죄를 범한 자들에게 영원히 낙인을 찍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교회는 죄를 가벼이 여겨서도 안 되고, 빗나간 자들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재기할 기회를 주는 것을 거부해서도 안 된다.
모든 신자들은 강퍅함에서 돌아서서 자신들의 결혼생활을 위해 노력하고 서로 용서하고 새롭게 시작하며,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결혼생활의 모본을 보여 주라는 부름을 받는다. 불행한 상황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의 해결책은 배우자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바꾸는 것이다. 절망적으로 보이는 경우에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께서 우리의 결혼생활을 새로운 삶으로 부활시킬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Ekkehardt Muel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