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여자를 “개”라고 부르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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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총회 성경연구소의 성경 난해 문제 해석
Interpreting Scripture: Bible Questions and Answers

[대총회 산하에 봉직하고 있는 선발된 학자 49명이 내놓은 성경 난제 94개에 대한 균형 잡힌 해석들]

예수께서 여자를 “개”라고 부르셨는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마 7:27).

이 본문에서 독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예수께서 이방인을 묘사하면서 사용하신 거칠고 무정한 언사, 곤경에 처한 이방 여인을 돕는 것을 마지못해 하는 것, 후에 마음을 바꾸는 엉뚱한 처사 등과 관련된다.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막 7:24-30)는 두로, 시돈, 데가볼리 등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베푼 예수님의 선교 봉사를 언급하는 기사(막 7:24-8:10)의 일부이다. 또한 그것은 “떡”을 제공하시는 예수님의 능력 및 그분의 그런 능력의 의미와 관련하여 보인 제자들의 강퍅함과 무지라는 두 개의 주제를 부각시키는 더 넒은 문맥(막 6:30-8:21)에 속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 여행 중에 행하신 유일한 이적이었다.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의 변경에 가신 것은 이 이적을 행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는 괴로워하는 여인을 구하는 동시에 함께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제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멸시받는 백성 중 한 사람에게 자비의 사업을 행하시는 모본을 남기기를 원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유대인의 배타성을 버리고 본국 백성들 외의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는 것에 관심을 갖기를 바라셨다.”(시대의 소망, 402).

이 이적의 이야기는 7장 및 8장과 몇 가지 연관성을 갖고 있다. (1) 바리새인들 및 서기관들과 치른 논쟁(막 7:1-23)에서 예수께서는 부정한 대상에 대한 그들의 유전(예컨대, 제자들의 손, 막 7:1-5)을 반박하시면서 진짜 부정은 밖에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온다(막 7:20-23)고 가르치셨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에서 그분께서는 부정한 사람(예컨대,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견해를 반박하시면서 그 여인의 딸의 치유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편애 없음을 피력하셨다(참조 행 10:34-35). (2) 구속사의 관점 곧 이스라엘이 이방인보다 우선권을 갖는다는 관점이 두 가지 이적에서 드러난다. 첫 번째 이적에서는 5,000명의 유대인을 먹이셨고(막 6:30-44), 두 번째 이적에서는 4,000명의 이방인을 먹이셨다(막 8:1-10). (3) 수로보니게 여인의 굽힐 줄 모르는 믿음은 제자들의 완고함과 무지(막 6:52; 7:17-18; 8:16-21)뿐 아니라 유대 지도자들의 불신 및 저항(막 7:1-23; 8:11-13)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이 이야기와 그것의 더 넓은 문맥의 기사에 포함된 천국 선포에 대한 대조적인 반응들은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뮌선포에 대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보인 전형적인 반응을 예표한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근본 목적: 이 이방 여인의 이야기를 구속사의 틀 안에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스라엘의 주권적 선택에는 하나의 근본적인 목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및 그의 후손과 언약을 맺으신 것은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기 위함이었다(창 12:1-3). 구약은 이스라엘의 이런 사명을 거듭거듭 언급한다(사 19:19-25; 42:1, 6; 49:5, 6; 60:1-22; 61:1-11; 미 4:1-5:15; 슥 8:20-23). 이스라엘의 메시야로서 예수께서 오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새롭게 하고 재정비하여 그들이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사명 곧 그들이 이방인에게 축복이 되는 사명을 이루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눅 2:30-32; 요 12:20-26).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교훈을 가르치심: 예수님의 사명이 하나님의 회복된 백성들을 모아들임으로써 아브라함 언약을 성취시키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압도적으로 이방인이 많은 지역인 베니게 지경으로 들어가려는 그분의 결심은 분명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이 왔다는 교훈을 가르치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는 교만과 배타주의 때문에 이 거룩한 임무를 수행하는 일을 대단히 소홀히 여겼다. 처음에 이방 여인에게 나타낸 침묵(막 15:23)과 이스라엘의 우선권을 지지하는 그분의 진술(막 7:27)이 여기서 문제의 관건이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비참한 이방 여인을 돕지 않으려는 못된 예수님의 반응처럼 해석해서는 안 된다. 사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유익을 위해 그들의 면전에서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적대심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얼마나 못되게 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시고자 하셨다. 유대인 전승에서 “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경멸적으로 가리킬 때 사용하는 특유의 용어이다. 성경에서도 개는 한결같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삼상 16:9; 시 22:16; 마 7:6; 빌 3:2; 벧후 2:22; 계 22:15).1 그러나 예수께서 작은 “개”를 나타내는 단어(퀴나리오이스)를 사용하심으로써,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더러운 것을 먹어치우는 잡종개가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애완용 개를 지칭하려 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2 그러므로 퀴나리오이스를 사용함으로 그분의 언사의 거친 면이 상당히 완화되고 있다.
유대인들은 편견으로 인해 자신들과 이방인 간의 사회적 교제를 막는 장벽을 세웠다. 예수께서 이 장벽들이 무너지기를 원하셨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특정 나라나 인종에게 국한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방 여인은 예수께 이렇게 대답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 7:28). 이 대답에는 구속사에 대한 의식이 암시돼 있다. 그 여인은 신학적으로 풍부한 의미를 지닌 칭호인 “주”라고 예수님을 부르면서, 그분이 유대인을 하나님의 “자녀”(출 4:22; 신 14:1)로 본 것은 지지하지만 예수님의 그 간단한 비유를 유리하게 역이용한다. 그녀는 먼저 먹을 수 있는 자녀의 특권은 인정하면서, 개라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먹을 순 있다고 주장한다.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하는데도 처음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축복들이 이방인에게 흘러 나갈 것을 암시한다. 그녀는 대단한 겸손과 구원의 계획에 대한 이해를 나타내면서, 굴하지 않고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치유해 달라는 요청을 관철한다. 예수께서 그녀의 확고부동한 믿음을 보고 귀신을 쫒아내어 그녀의 딸을 먼 거리에서 치유해 주셨다(7:29-30).

결론: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사이가 벌어진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해시키려는 은혜롭고 사랑 깊은 하나님에 대한 성경 전체의 초상을 보여 준다. 진짜 이방인 곧 악명 높은 이방 지역인 수로보니게 출신의 “부정한” 여인은 예수님의 범세계적 선교사명을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지칠 줄 모르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놀라운 경험을 얻었다.

Leo Ranzolin, J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