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전하라”는 무슨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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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총회 성경연구소의 성경 난해 문제 해석
Interpreting Scripture: Bible Questions and Answers

[대총회 산하에 봉직하고 있는 선발된 학자 49명이 내놓은 성경 난제 94개에 대한 균형 잡힌 해석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전하라”는 무슨 의미인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어떻게 인간이 하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무죄한 존재이시다. 그러나 타락 이래로 인간은 죄성을 타고난 존재가 되었다(엡 2:3).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산상설교: 마태복음 5:48에 있는 예수님의 분명한 이 말씀은 산상설교의 두 번째 부분의 결론이다. 산상설교 전체는 마태복음 5-7장인데, 그것의 둘째 부분은 5:17-5:48이다. 이 부분의 서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케 하러 왔다고 주장한다. 서언 다음에 연속되는 여섯 개의 대조 진술(antithesis)이 뒤따라 나오는데, 예수님은 구약의 성경절이나 전해 내려오는 말씀을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인용한다.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5:21, 22).
이 대조 진술들은 구약의 개념들을 거부하고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으로 대체하려 한다는 인상을 준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매 경우마다 구약의 가르침을 더 심도 있게 적용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자신이 온 목적이 구약의 원칙들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옛 명령의 깊이와 더 폭넓은 적용을 보여 주려는 것임을 나타내셨다.


“그분은 당신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분께서 우주에 대해 빛과 축복의 중심이 되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작은 사회에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나, 그분의 사랑의 빛이 우리에게 비췸으로 우리는 그 빛을 반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역에서 온전하신 것같이, ‘선하신 그분의 선하심을 빌어’우리는 우리의 영역에서 온전하게 될 수 있다.”(산상보훈, 77쪽).

원수를 사랑함: 마태복음 5:43-48에 나오는 마지막 대조 진술은 원수를 사랑하는 문제를 다룬다. 예수님은 레위기 19:18의 일부(”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를 인용하면서, 거기에 전통으로 내려오는 진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런 다음 그분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그 유명한 원칙으로 전통적인 진술을 뒤엎는다. 계속하여 주님께서는 원수에게 이런 원칙을 행동으로 옮기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결과가 나온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위와 맞먹는 일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만을 사랑하는 사람들 또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을 언급하심으로써 자비가 크신 하나님의 행위와 대조하신다. 그런 사랑은 세리나 이방인 곧 성경적 종교의 범위 밖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하는 사랑이나 진배없다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하여 두 부류의 행동 방식 곧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사랑과 관심을 베푸시는 하나님과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는 세리나 이방인이 대조되고 있다. 이런 내용이 있은 후에 제자들에게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처럼 온전하라(마 5:48)는 요청이 뒤따라 나온다.
마태복음 5:48의 문맥을 이해하는 것이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다. 마지막 대조 진술의 문맥 안에서 온전[완전]은 결점이 없거나 일체의 도덕적 결함이 근절된 상태로 정의되지 않고, 오히려 우리와 사이가 가장 먼 자들 곧 우리의 원수에게까지도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대조 진술의 전체 문맥 안에서 마태복음 5:48의 온전하라는 요청에는 가장 높은 도덕적 순결에 대한 의식이 포함돼 있다. 예컨대, 미움도 살인으로, 음욕의 눈길도 간음으로 재정의하고, 미움도 품지 말고 음욕도 품지 말라고 명한다.
이런 최상의 요구에 대면하여, 우리는 간단히 제자도를 포기해 버리려 하거나, AD 2세기에 한 저술가가 디다케(Didache)라는 책 6장 2절에서 마태복음 5:48에 대해 말한 것처럼 생각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대가 주님의 온전한 멍에를 멜 수 있다면 완전해 질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대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 또는 예수님의 의도가 그렇지 않은데도, 완전은 불가능한 것이며 게다가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구원받기 때문에 그런 것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온전”[완전]의 의미: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말한 식으로 낮은 표준의 노선을 취한다면 매우 중요한 것을 잃게 된다. 마태복음 5:48에서 “온전”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텔레이오스인데, “완전한, 결함이 없는, 온전한, 충분히 발전된, 성숙한, 목표나 목적을 달성한” 등을 의미한다.(1) 어떤 것이 다 성장하여 그것의 목표에 도달하면 텔레이오스라고 말해진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목표가 있다. 그것은 하늘 지향적이다. 위에서 부르신 복음의 부름은 분명하다(빌 3:12-14). 하나님이 어떤 수준의 지점에서 우리를 발견하든 우리를 가납하시지만, 그 수준에 그대로 머물도록 내버려 두진 않으신다. 그분은 그리스도인 성숙으로의 여행으로 우리를 초청하신다. 마태복음 5:48의 예수님의 명령은 그 여행의 결실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 명령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여행을 받아들여 그분의 뜻 안에서 걸어가는 것을 말한다. 온전[완전]의 목표 곧 그리스도인 성숙, 다시 말해서 하늘 아버지처럼 되는 것은 우리를 좌절시키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도덕적 어둠의 세계에 비치는 우리의 길라잡이별과 같은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
48은 그리스도인의 목표[온전]를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라는 주님의 초청이다.

Tom Shephe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