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총회 성경연구소의 성경 난해 문제 해석 Interpreting Scripture: Bible Questions and Answers [대총회 산하에 봉직하고 있는 선발된 학자 49명이 내놓은 성경 난제 94개에 대한 균형 잡힌 해석들] |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행 20:7).
다수의 주석자들은 사도행전 20:7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을 특별한 예배일로 지켰다는 최초기의 확고한 증거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이 구절을 쓴 누가의 의도가 아니었다. 더 큰 이야기의 일부로 묘사된 이 구절은 먼저는 지상에서 인간으로서 하신 예수의 사역과,
그런 다음에는 당신의 택한 사도들을 통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주시는 예수의 사역에 대한 누가의 개괄적인 기술의 문맥에 비추어 이해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던 바울:
가르침과 제자삼음이라는 예수의 모델을 충실하게 따라 전도했던 사도 바울의 사역은 사도행전 20장에서 거의 끝나가고, 이제 예수님처럼 곧 시련과 고난을 당할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다(행 20:22, 23; 21:10∼14).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바울은 드로아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그가 앞서 양육한 다양한 무리의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나아갔다.
누가는 이때 바울이 방문한 도시 가운데 몇 개만을 간단하게 언급하지만 드로아에서 있었던 특정 사건(행 20:6∼2)을 좀 더 생생하게 보도하려고 한다. 이층 다락에서 졸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부활시킨 놀라운 사건을 기술함으로써 누가는 바울도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의 사역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함을 드러낸 것이다. 논의하려는 본문인 사도행전 20:7은 전체 이야기 자체 속에 들어 있지 않고 주요 사건에 도입적인 배경을 제공하는 부분이다. 이 본문에 대하여 후대의 그리스도인이 제시한 해석과 관련된 의문 및 주장들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검토하기 위해 주요 구절들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강론할새”:
이 구절은 이 본문의 중심이 되는 진술로, 유두고 이야기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장면을 도입한다. 사실, 나머지 다른 부분은 이야기와 관련된 추가적인 정보를 주는 역할을 하는데, “강론”이 언제, 왜 있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오래 계속되었는지를 말한다. “강론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디알레고마이)의 의미를 찾아보면 바울이 드로아 사람들에게 “설교”를 한 것이 아니라 그들과 “대화” 곧 토론했음을 알 수 있다.
“안식 후 첫날”: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안식일로부터 첫 번째”이다. 이것은 누가 및 초기 그리스도인 문헌이 헬라어 삽바톤(“안식일”)을 일반적인 “일주일”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실례 중 하나이다(참조 눅 18:12; 디다케 8:1).(1)
바울의 예루살렘 여행에 대해서 말하는 기사에서도 자주 그런 것처럼(행 20:6, 15; 21:1, 4, 5, 7, 8, 10, 15), 누가는 이 중대한 사건이 벌어진 시간을 기록하기로 선택했다.
누가의 독자 같은 그리스-로마 문화권의 사람들 및 현대 서구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대로 말한다면 이 사건은 “일요일”에 일어나야 했을 것이다(이런 로마식 방식으로 요 20:19에서 “안식 후 첫 날 저녁”은 분명하게 일요일 저녁 시간을 가리켰음. 로마인의 계산 방식인지 유대인의 계산 방식인지는 문맥에 따라 결정해야 함).
하지만 누가가 여기서 저녁에서 저녁을 하루(참조 창 1:15; 눅 23:54)로 계산한 유대인의 방식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바울은 안식일을 충실하게 지키기 위해서 드로아에 남아 있었을 것이고, 그런 다음 일요일 아침 그의 다음 목적지를 향해 지체 없이 출발하기 전 토요일 저녁에 그의 친구들과 함께 송별 모임을 가질 틈을 얻었을 것이다.
어쨌든 누가는 예수님도 첫날에 부활했듯이 유두고를 살린 일이 주일 중 “첫날”에 있었다는 데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데, 이는 바울의 이야기와 예수의 이야기 사이에 나타난 또 하나의 눈에 띠는 평행적 내용이다.
이 구절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일요일 준수에 관한 증거인지를 평가하면서, 탁월한 교회 역사가 아우구스투스 네안드로스(Augustus Neander)는 이렇게 말한다. “이 구절이 아주 확신을 주는 것은 아니다. 사도의 임박한 출발은 사랑어린 송별 식사로 그 작은 교회를 연합시켰을 것이며, 이때 사도는 그의 고별사를 했지만 이 경우에 특별하게 일요일을 기념한 것은 아니었다.”(The General History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Church, vol. 1 [London: Henry G, Bohn, 1851], 337]. |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사람들이 함께 “모인” 것(헬라어 쉬나고)은 다양한 이유 때문이었다(눅 22:66; 행 4:31; 15:6, 30). 떡을 떼려 모인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특별한 날이나 장소에 국한 된 것이 아니고 일상적인 일이었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예수께서 사람들과 나누신 식사는 누가복음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사도행전 20:7에서 “떡을 떼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구절(클라사이 아르톤)은 누가의 글에서 대체로 일반적인 식사를 가리키는 말로 거듭거듭 사용된다. 목요일 저녁 유월절에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떡을 떼시고”, 그들에게 당신을 기념하여 계속 그렇게 하라고 당부하셨다(눅 22:19). 예루살렘에서 최초의 회심자들은 날마다 집집을 돌아가며 “떡을 뗐고”(행 2:42, 46), 바울도 배가 난파되기 직전에 “떡을 떼어…먹었다”(행 27:34∼36). 이와 같이 드로아에서도 모여 떡을 뗐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다음 구절에 암시돼 있다.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계속하고자 했고, 그 때문에 드로아 사람들과 마지막 담화를 나누고자 한 것이다. 바울이 지금까지 방문했던 신자들의 무리에게 그렇게 한 것처럼 드로아에 있는 그의 친구들에게도 권면하고 용기를 주었지만 분명 아직도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그들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았고, 따라서 누가는 바울이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라는 구절을 덧붙인다.
새로운 예배일이 제정되지 않았음:
이러한 도입을 통해, 누가의 독자들은 이제 유두고가 어떻게 하여 한 밤중에 다락 창에 앉아 졸다가 급기야는 밑으로 떨어져 죽었는지를 이해할 채비를 갖추게 된다(행 20:9). 여기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누가는 주일 중 첫째 날에 정규적으로 떡을 떼고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야 했다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누가의 공표된 기록 목적은 데오빌로 각하와 그의 친구들이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도록 하는 것이었지만(눅 1:4), 그는 새로운 예배일로의 변경 같은 단조로운 일의 확실함에 대해서 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진 않는다. 오히려 누가는 하나님께서 바울의 봉사와 자라나는 교회에 여전히 함께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나타낸 유두고를 다시 살리는 놀라운 기적의 장면을 언급하기 위해 먼저 도입으로 신자들과 대화하면서 떡을 떼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Teresa Reeve
<70인역> 이야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중동 지역을 정복한 후에 헬라어가 피정복 국가들의 공용어가 되었다. 특별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같은 헬라 문화의 거점들에서 많은 유대인들은 헬라어를 선호하여 아람어를 포기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이 더 이상 히브리어를 사용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게 되어 구약의 헬라어 번역을 필요하게 된 때는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BC 285∼346년)의 통치기였다. 그때 <70인역>으로 알려진 표준적인 헬라어 번역본이 만들어졌다.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장이 프톨레마이오스를 설득하여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이 사용하도록 토라를 헬라어로 번역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렇게 하여, 12지파에서 번역자를 각각 여섯 명씩 선정하여 72명이 정확히 72일 만에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야기의 세부사항들은 허구적일 수 있지만, 편지는 <70인역>이 헬라어를 말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믿을 만한 사실에 대하여 말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전하고 옹호하는 데 <70인역>을 자유롭게 사용하였다.
<70인역>은 그것의 내용이나 배열 순서뿐 아니라 번역의 질적인 면에서도 히브리 정경과 사뭇 다르다. 히브리어 구약의 22권에 더하여, <70인역>은 헬라어 권에서 돌아다니던 여러 책들을 포함시켰으나 그것들은 히브리어 정경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70인역>은 일반적으로 원(原) 히브리어 본문의 독법들에 충실했는데, 그래서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중요하다. (1)
<70인역>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히브리어를 말하는 사람과 헬라어를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종교적 간격을 메웠다. (2) <70인역>은 유대인들의 히브리어 정경과 <70인역>을 신약과 함께 사용하는 헬라어권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적 간격을 메웠다. (3) <70인역>은 성경을 다양한 언어와 방언으로 번역한 선교사들에게 하나의 전례를 남겼다. (참조 N. L. Geisler and W. E. Nix, A General Introduction to the Bible [Chicago, MI: Moody Press, 1986], 530).
<미주>
(1). 디다케는 4세기 때의 그리스도교 문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