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두 주먹을 합친 것만큼 자란 멜론은 뿌리부터 썩어 줄기와 잎사귀가 힘없이 메말라갔다. 조금만 더 자라면 당도가 부쩍 오르고 크기도 커져 최상급으로 판매할 수 있었는데, 어느 것 하나 쓸 수 없게 됐다.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멜론을 거둘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야속해 눈물이 났다.
그러다 문득 ‘그래도 육질이 단단하니 그냥 버리는 것보다 반찬으로 만들어 먹을 순 없을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양념을 버무리니 마치 노각처럼 아삭하고 맛있었다. 주변의 가까운 교인들에게도 나눠줬다. 누군가 ‘깍두기를 만들면 좋겠다’고 아이디어를 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마침 멜론으로 김치와 장아찌를 담그는 조리법이 소개돼 있었다.
소금으로 절이니 삼투압 현상으로 당도가 한결 높아졌다. 별다른 양념을 하지 않아도 맛이 올라왔다. 무보다 식감이 부드럽고 연해 노인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너무 무르지 않아 아이들도 좋아하는 별미가 됐다. 요즘 시쳇말로 ‘단짠 단짠’했다. 교회는 이를 아예 주변 소외계층 이웃들에게 반찬으로 만들어 제공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지난달 19일. 예산교회 앞마당에 트럭 한 대가 들어섰다. 짐칸에는 400개가 넘는 멜론이 실려 있었다. 13명의 성도들이 구호봉사부(부장 맹교선)의 지휘로 오전 9시부터 교회 식당에 모여 ‘멜론 깍두기’ 작업을 했다. 너도나도 팔을 걷어붙였다. 남자들은 깨끗하게 씻고, 여자들은 껍질을 자르고 속을 파내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한편에서는 소금에 절이고, 고춧가루에 버무려 담아내는 손길이 바쁘게 오갔다. 매콤달콤한 멜론 깍두기는 미리 구입한 2리터들이 김치전용 용기에 담았다. 뚜껑엔 교회스티커를 붙여 누구라도 알기 쉽게 구별했다.
이튿날, 이번엔 배달 봉사가 이어졌다. 안식일예배를 마친 성도들의 손에는 저마다 반찬통이 들려있었다. 학생들까지 합세한 6개 팀은 읍내에 사는 독거노인과 저소득층 주민, 구도자 등 50여 가정을 찾아 전달했다.
추석에 즈음해 뜻밖의 별미를 받아든 수혜자들은 “안 그래도 오랜 장마와 수해로 채소값이 폭등해 김치 담가 먹기가 부담이었는데, 이렇게 맛있는 반찬을 주셔서 정말 고맙다. 잘 먹겠다”며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취지를 전해들은 읍사무소 담당직원은 “코로나19 사태로 경기가 둔화돼 푸드뱅크의 음식도 줄고, 기부나 도움의 손길이 끊겨 어려움을 겪는 빈곤층이 많았는데, 재림교회가 적절한 도움의 손길을 펼쳐주어 정말 감사한다”고 말했다.
A 집사 부부는 “멜론이 여기저기 나뒹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침통했는데, 이렇게라도 활용할 수 있으니 마음이 한결 좋다. 바쁜 와중에도 봉사하느라 여러 성도들이 애쓰셨다. 쓸모없게 된 낙과가 맛있는 음식으로 변해 이웃들에게 기쁨을 줬다고 생각하니 감사하다. 나눔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진 것 같아 기쁘다. 이제는 빈 밭에 들어가도 가슴이 아프지 않다”고 했다.
그는 “나도 힘들 때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이 반찬을 받으신 분들의 마음에 부디 영생의 약속과 구원의 소망이 함께 심어지길 바란다. 이번 봉사가 그들에게 재림교회를 알리고, 전도하는 작은 통로가 되길 기도했다. 실제로 집집방문 과정에서 대화를 나누고, 교회에 관심을 보이는 구도자가 생겼다는 말씀을 듣고 뿌듯했다”며 활짝 웃음 지었다.
민삼홍 담임목사는 “가슴 아픈 눈물의 낙과 열매가 삶에 지친 어려운 이웃에게 새로운 기쁨의 씨앗이 되었다. 집사님이 흘린 오늘의 눈물을, 빛나는 내일의 웃음으로 바꾸어 주실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 같다. 전대미문의 코로나19 사태로 저마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이웃사랑 온정을 계속 펼쳐야 한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였다”고 강조했다.
민 목사는 “아이디어는 냈지만, A 집사님과 여러 성도들이 호응해 주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바쁜 일상에도 너나없이 자청해 교회로 와서 약 6시간 동안 김치 만들기 작업을 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각 가정에 배달을 위해 나아가는 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힘차고 가벼워보였다”며 봉사자들에게도 고마움을 표했다.
한편, A 집사 부부는 합회와 교회가 지원한 수해 위로금을 청소년선교를 위해 써 달라며 희사해 더욱 귀감이 됐다. 이들은 “내가 교회에 헌신하는 것도 부족한데, 교회의 자금을 받아쓴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한사코 거절하며, 봉투도 뜯지 않은 채 위로금 전액을 헌금했다. 그는 “우리야 어떻게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는다. 큰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학생 선교사업의 밑거름이 됐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부부는 요즘 열무 재배에 한창이다. 멜론을 제외한 3동의 비닐하우스에서는 요즘 쑥쑥 자라고 있다. 열무를 수확하면 이것도 이웃에게 나눠줄 마음이다. 비닐하우스로 씩씩하게 발길을 옮기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과연 이런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버릴 수밖에 없는 작고 보잘 것 없는 낙과가 누군가에게는 입맛을 돋우는 ‘육의 양식’으로, 누군가에게는 재림기별을 접하는 ‘복음의 접촉점’으로, 누군가에게는 교회를 알리는 ‘봉사의 손길’로 쓰임 받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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