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 이끄는 몽학선생은 어떤 법을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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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총회 성경연구소의 성경 난해 문제 해석

Interpreting Scripture: Bible Questions and Answers


[대총회 산하에 봉직하고 있는 선발된 학자 49명이 내놓은 성경 난제 94개에 대한 균형 잡힌 해석들]


그리스도께 이끄는 몽학선생은 어떤 법을 말하는가?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 3:24, 25).

갈라디아서 3:24에서 바울이 율법을 몽학선생으로 말하는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율법의 위상에 대해서 무어라 말하는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으로 성숙하게 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은 폐지되었는가?


“율법”이라는 말의 의미:

“율법”이라는 말은 십계명 같은 특정한 명령 체계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도 타당하지만, 그 이상을 의미한다. 헬라어 노모스(율법) 및 이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순전히 사법적인 면에만 국한되진 않는다. “율법”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토라는 일반적으로 “교훈”을 의미한다. 문맥에 비추어 토라가 구체적으로 명백한 명령을 가리키지 않으면 이런 일반적인 의미로 볼 수 있다.


율법의 목적:

갈라디아서 3:19∼29에서 바울은 율법의 목적에 관해 말하면서 그것을 몽학선생에 비교한다. 3:22에서 그는 모든 것이 죄로 둘러 싸여 갇혀서 구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말이 이 장면에 나타난 상황이다. 율법이 진정한 구원을 이루진 못한다. 그 대신 율법은 죄인의 상태를 드러내고, 구원을 실재로 만드시는 분을 가리킨다. 그분을 믿는 믿음이 구원에 필수적이다.


율법이 몽학선생으로 기능함:

사람들은 “몽학선생”을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하곤 한다. “몽학선생은 종종 엄격한 훈련사였으며, 따라서 그들의 보호 아래 있는 자들은 몽학선생의 감독에서 자유로워질 날을 바랐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보여 줌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께 데려다 준 몽학선생이었다.”[1] “몽학선생”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다고고스(24절)는 헬라 문헌에서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가르치는 개인 가정교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어원적으로, 파이다고고스라는 말에는 아이를 지도한다는 개념이 들어 있다. 어떤 경우에 그런 가정교사가 아이들을 돌보는 책임을 맡은 노예였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파이다고고스의 역할이 확대되어 더 고귀한 일이 되었다. 그의 보호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아이의 품성과 도덕성을 꼴 짓고, 심지어는 학교선생은 아니지만 가정교사가 되었다.”[2]


어떻게 의를 얻을 수 있는지가 갈라디아서의 쟁점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주제가 갈라디아서 전체에 걸쳐 논의되는 쟁점이다. “의를 어떻게 얻는가?”가 질문이다. 그것은 율법(의식법 또는 도덕법 등)을 지킴으로써 얻는가, 아니면 예수를 믿는 믿음 곧 그분의 의에 의존함으로써 얻는가? 로마서 4:3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이 그에게 의로 간주되었다고 명백하게 말한다. 믿음이 의에 이르게 하는 열쇠이다. 그러나 의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의의 원천과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율법의 기능을 설명해야 했다. 갈라디아서 3:21에서 바울은 실질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거스르지 않는 다는 것을 상술한다. 그가 이런 입장을 취하는 것은 율법을 반대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함이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라는 19절의 질문에 대해서 바울은 통찰력을 가지고 그것이 생명을 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역설한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르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21, 22절). 그러므로 율법이 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기능에 비교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를 받아들이면 더 이상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진 않지만, 율법을 무시해도 된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시 율법의 정죄 아래로 돌아가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율법에 순종할 능력을 받는다(롬!
3:31).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3:24, 25은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는 이해는 율법의 위상에 대해 말하는 예수님의 가르침(마 5:17)과도 조화된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루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의도된 율법의 목적 곧 예수 안에 체현된 하나님의 의를 가리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다(고전 1:30).

Ganoune Diop

<미주>

[1] John MacArthur, The MacArthur Bible Commentary (Nashville, TN: Thomas Nelson, 2007), 1667.
[2] Ceslas Spicq, Theological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translated and edited by James D. Ernest, 3 vols. (Peabody, MA: Hendrickson, 1996),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