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속에서도 놓을 수 없는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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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가난을 감내하면서 경전을 열심히 읽고 옛 성현들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것은 바로 물질문명에 내 욕망을 던지지 않고 나 자신을 오롯이 지키며 살아가려는 삶의 의지다. 욕망대로 살아간다면 인간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진다.

옛날이야기를 하면 이른바 ‘꼰대’가 ‘라떼’를 마신다며 은근히 비웃음을 당하는 시절이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동네에서 살았다고 하면 마치 백 년 전의 일처럼 생각하지만 불과 수십 년 전의 일이다. 그만큼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를 살아왔다. 지금도 세상은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달려가고, 그 안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조금만 마음을 놓아도 모르는 것들이 순식간에 나타나고, 따라잡은 것 같은 순간 또 다른 무언가가 나타난다. 꼰대가 라떼를 마시는 것은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조바심에서 생기는 현상이거나 혹은 지금의 빠른 변화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에서 생기는 현상일 것이다. 세상을 주도하지 못하면 늘 다른 사람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기서 생긴다.
   왜 우리는 무언가를 주도하고 싶어 하고 새로운 흐름을 빨리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오묘한 세상 이치를 가난한 서생이 어찌 알겠는가마는 내 눈에는 그 안에 욕망이 가득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욕망을 터부시 할 것만은 아니다. 인간의 문명이 이만큼 쌓인 것은 욕망이 시킨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때로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원동력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무엇이든 넘치거나 부족하면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공자도 ‘과유불급(過猶不及)’(『논어』 <선진> 편)이라고 했다. 지나친 것은 부족한 것과 같다는 뜻이다. 지나친 것보다는 차라리 모자란 것이 낫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 말은 지나친 것이나 부족한 것이나 모두 문제가 있다는 맥락에서 발화된 것이다. 욕망도 마찬가지다. 욕망이 부족한 것도 문제지만 넘쳐 나는 것도 문제다. 넘치는 욕망 때문에 인간은 무리수를 둔다. 내가 지금 먹을 수 있는 음식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것을 구해서 곳간에 쌓아 두고 싶어 한다. 훗날을 대비해서 그렇게 한다. 그렇지만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은 패착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던가. 물론 현재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래를 위해 너무도 많은 것, 때로는 현재의 모든 것을 포기하며 살아간다. 현재를 전당 잡혀서 미래를 보고 살아가는 것이 영원히 오지 않을 미래를 위해 내 삶을 허비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동서고금의 성현들이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는 훈련을 꾸준히 하도록 가르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왔으리라.
   모든 성현이 마찬가지겠지만 『논어』를 관통하는 몇 가지 가르침 중에 인간의 욕망을 과도하게 드러내는 것에 대한 경계가 들어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존을 위해 욕심을 내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욕망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적절한 욕망을 발현할 것인가가 우리의 화두가 될 수밖에 없다. 욕망을 줄이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것을 없애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 아닐까 싶다.
   우리 마음속의 욕망을 과도하게 만들지 않는 방법, 과도한 욕망은 무엇인지 탐색하는 일, 나아가 욕망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공부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 공부가 인문학의 중요한 영역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적절한 수준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 공부이고, 그 적절함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중도(中道)일 것이다. 수십 년 전부터 인문학의 죽음을 선언하는 일이 많아졌고, 대학이 어려워지자 대학에서는 인문학 관련 학과가 가장 먼저 폐지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은 근대가 만들어 낸 자본이 우리의 등을 떠민 결과 중 하나일 것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우리 욕망을 들끓게 만들고, 그렇게 생성된 욕망은 다시 자본을 소비한다. 그 고리를 끊는 일, 그 방법을 연구하고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우리 사회를 새로운 지평으로 인도하게 하려는 일, 그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옛날 책을 읽는 것은 고루하고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비판을 받기 일쑤다. 그렇지만 오랜 옛날부터 인간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은 꾸준히 이어져 왔고, 우리는 옛 성현들의 말씀을 읽음으로써 좋은 세상으로 가려는 희망을 발견하고 공부하는 것이다. 『논어』를 읽는 것은 현대 문명의 거센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을 지키면서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남들이 가는 길을 가지 않고 새로운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니 현실에서는 가난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문학을 하면 가난하다는 인식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가난을 감내하면서 경전을 열심히 읽고 옛 성현들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것은 바로 물질문명에 내 욕망을 던지지 않고 나 자신을 오롯이 지키며 살아가려는 삶의 의지다. 욕망대로 살아간다면 인간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진다.
   가난 속에서도 오직 공부와 실천에만 힘을 쏟았던 사람을 떠올린다면 단연코 공자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안연(顏淵)이다. 너무도 가난해서 누추하기 그지없는 골목에서 살았으며 쌀독이 자주 비어서 굶는 날이 많았다. 그 와중에도 공자의 말씀을 들으면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완벽주의자였다. 오죽하면 공자가 안연에게 무언가를 말해 주면 질문하는 법이 없다고 했을까. 스승의 말씀을 들으면 그 뜻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나아가 삶 속에서 실천했으니 참으로 대단하다. 공자가 제자 자공(子貢)과 이야기를 하다가 ‘너나 나나 모두 안연보다 못하다’고 했을 정도다.
   호학(好學)은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두 번이나 호학하는 사람으로 안연을 거론한 바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天喪予) 하는 탄식을 두 번이나 반복하면서 통곡을 하기도 했다. 옆에 있던 제자들이 공자가 통곡하는 것을 우려하자 ‘안연과 같은 사람을 위해 울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울겠느냐’(非夫人之爲慟而誰爲?”, <선진> 편)고 말하였다. 그만큼 공자에게 안연은 아끼는 제자이자 진리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벗이었다. 가난 속에서도 덕행과 호학으로 불꽃처럼 살다 간 안연을 『논어』에서 만날 때마다 내 공부를 돌아보게 된다. 사회적 관심에서 배제되는 인문학이야말로 인류가 절망적인 상황을 마주했을 때 새로운 활로를 여는 희망이라고 믿으면서, 늘 안연의 공부를 떠올리곤 한다.

김풍기
강원대학교 국어교육학과 교수

가정과 건강 9월호 제공